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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가족이 되는 법 | 이훈희 예비 사회복지사, LG유플러스 광고모델 가족 | 세바시 922회


강연 소개 : 저는 구화가 가능한 청각장애인입니다. 같은 청각 장애인 동생, 비장애인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이 특별한 가족처럼 느껴지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장애인 사회와 비장애인 사회를 넘나들며 느낀 가족의 의미,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진짜 가족이 되는 법을 전합니다. 


게시일: 2018. 5. 30.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구화가 가능한 청각장애인 이훈희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영상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상 잘 보셨나요?

어딘가 많이 낯익죠?

영상 속에 나오는 주인공은 제 친동생 이윤희이고 

저는 병풍으로 나온 이훈희입니다.

형제 모델로 발탁되어서 같이 광고영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영상 속) 유니폼을 보시면 아시다시피, 같이 '안산 빅토리' 라는 농아인 야구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회에 있는 수많은 취준생과 별 차이 없는 사회복지사를 준비하는 취준생이기도 합니다. 



오늘 강연회의 주제는 가족인데요. 가족 하면 여러분은 어떤 게 떠오르시나요?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세요?

저 같은 경우에 가족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 '희로애락'인지에 대해서 3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여러분과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강연의 첫 번째 키워드는 

야구

입니다


제가 'H'야구팀의 팬이고요

주변에서 저에게 농담으로 '보살'이나 '부처님'이라고 많이들 말합니다.

그래도 (팀이) 암흑기를 거치면서 팬들과 함께 응원하다 보니까. '보살'이라는 별명도 생겼고 

다 같이 목소리를 내며 응원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큰 교훈을 얻었거든요.  

그게 뭐냐면 '인내', '참을성', '해탈의 경지' 이 3가지를 배웠습니다. 

그런 야구를 고등학교 때부터 보면서 학창시절에 힘을 얻었습니다 


저희 동생은 특수학교에 다니고 저는 일반 학교에 다니면서 학창시절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차별, 왕따, 장애인 이슈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을 저희 형제가 많이 겪었습니다.


저희 학급에서 청각장애인이 저 한 명 있었고, 나머지 학생들은 비장애인이었는데요 

선생님께서 비장애인 위주로 수업을 하다 보니까

제가 선생님께 

“천천히 말해주세요" 

“다시 한번 말해주세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는데

선생님은 그걸 무시하시고 비장애인 위주로 수업을 진행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저도 상처를 많이 받고 사춘기에는 야구를 통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야구 덕분에 학창시절의 힘든 점을 많이 극복했었고요,



강연 두 번째 키워드로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 키워드는 '이성민 사회복지사 선생님'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기 관객석에 이성민 선생님이 와계시는데요

(박수)


저는 이성민 선생님을 처음 봤던 날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때 당시에는 처음 부임했던 사회복지사셨고요.

청소년을 담당하셔서 저와 자주 만났습니다.

그렇게 자주 만나다 보니까 싸우기도 하고 서로 욕하기도 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너무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바보 같은 행동도 해서 제가 '동네 바보형'이라는 별명을 붙여드렸어요 

그러면 선생님은 저희를 '동네 바보형의 동네 바보 동생들'이라고 불러주셨어요

그래서 저희는 편하게 8년 동안 친형제처럼 투닥거리면서 지내왔습니다


고민을 털어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희로애락의 순간을 같이 나눴습니다

보통 사회복지사는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 짓는 직업 중 하나라서 

특별한 요청이 있는 거 아니면 가정사에 개입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저희 부모님의 요청이 있긴 했지만 선생님도 거리낌 없이 훅 들어오더라고요

덕분에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족관계가 되어버린 거죠 저희는

선생님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저도 '동네 바보형'처럼 따뜻한 사회복지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저는 또 하나의 인격체를 가진 한 사람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고 사회복지사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꿈은 아직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강연 세 번째 키워드는 역시 지금의 저를 만들어주신 부모님입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1999년에 동작구청에서 청각장애인 두 자녀를 헌신적으로 키우신 걸로 상을 받으셨습니다. 

제 마음 같아선 대통령께서 주시는 상을 받게 해주고 싶지만 앞으로는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유명해져서 

대통령께 “대통령님! 저희 부모님 상주세요!" 이런 식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관중들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 번 상상해보세요 

여러분께서 결혼하고 만약 아이를 낳았어요



그런데 아이가 알고 보니 선천적, 후천적을 떠나서 어떤 장애를 가졌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마음속으로 한번 상상해보세요.


저 같은 경우는 (입으로) 소리는 내도 (귀가) 들리지 않아서 (소리가 나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한번 검사를 받아봤는데

이 아이는 청각이 없다며 청각장애인 판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 부모님의 마음은 정말 행동은 고사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오만가지 복잡한 심경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도 저희 어머니가 대단하신 게 제가 장애가 있는 걸 알고 한동안 마음고생 하셨는데



저희 동생도 장애가 있다는 걸 알고는 뭔가 '깡'이 생긴 거죠 

'장애 있는 큰 애 하나 키웠는데 같은 장애를 가진 동생까지 두 명을 못 키울까? 한번 키워보자' 

그런 배짱이 생겨서 지금까지 계속 키우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희 형제를 훌륭하게 키워내 주신 저희 부모님과 가족에게 

궁금한 점이 있으신 분이 계실 겁니다. (가족 분위기에 대해서)

어떨 것 같아요? 여러분이 보시기에?

저희는 여러분과 다르지 않아요.

(부모님은) 평범하게 부부싸움 해요

욕해요. 잔소리해요.

또 형제끼리 싸웁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그러실 거예요

학창시절에 잔소리 듣기 싫어서 문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가신 분도 계실 거예요 

이런 회피행동을 많이 하셨을거예요.

저도 똑같아요 

아예 잔소리 듣기 싫어서 일부러 보청기 빼고

안 들리는 척합니다

(박수)

"에이 뭐야 안 들려" 

이런 식으로 회피행동을 합니다.

이렇게 때로 반항하기도 하는데도 장애가 있다고 해서 특별히 대하기보다는 

보통 부모 자식 관계처럼 서로를 보듬어주기도 하고,

야단치기도 하고 

많이 잔소리도 하고 욕도 많이 하셨어요.

저도 욕 많이 먹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 부모님은 밖에 나가서 저희의 장애를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장애가 있으면 어때?' (이렇게 생각하셨어요) 

부모님은 저희를 장애인이 없는 일반 유치원에도 보내고 

"늘 집에 있지 말고 제발 좀 나가서 싸우고 사고라도 치고 와라" 

이런 (세상과 직접 부딪히길 바라는) 간절함이 있으셔서 (저희를) 사회에 내보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회와) 부딪히며 스스로 깨닫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어차피 장애를 가진 애들이 나한테 온 거니까. 그냥 열심히 살자' 



대신에 크게 잘 해주지는 못해도, 아이들이 스스로 살 수 있게끔 내가 희생하면서 길을 닦아놔야겠다' 

이런 마음으로 저희를 키워주셨습니다

(박수)


그렇게 키워주셔서인지 

제 동생은 새벽 훈련 갈 때 귀가 들리지 않는대도 불구하고 알람 없이도

스스로 일어나서 아침 챙겨 먹고 부모님 손을 거치지 않고도 스스로 야구 배트를 들고 훈련할 정도로 든든한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특히 (부모님은) 저와 제 동생의 장래희망을 스스로 정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동생이 야구라는 꿈을 이야기했을 때 처음에는 다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야구는 힘들 텐데”하고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열심히 노력하는 걸 보시고 믿어보자는 마음으로 동생의 편을 들어주시고 

동생이 열심히 노력하는 걸 보시고 믿어보자는 마음으로 동생의 편을 들어주시고 

지지해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지원도 해주시고

이성민 선생님도 지원해주시고 주변에서 많이 지원해주셨습니다

저는 사회복지사가 되기로 했고 동생은 특수체육을 전공했기 때문에 장애인 체육과 관련된 쪽으로 가서 우리나라는 야구의 불모지기 때문에 동생이 그것을 부흥시키고자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서로의 꿈을 갖고 자라고 있습니다.

(박수0


그래서 언제 한번 동생과 부모님께 미역국 한번 끓여드려야 하지 않겠냐고 얘기를 해서

(미역국을) 직접 만들진 않았지만 미역 재료를 부모님께 갖다 드리고 

“엄마 아빠. 미역국 해주세요" 이렇게 말했죠

안마의자를 사드리고  “엄마 아빠 이거라도 하시고 만수무강하세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식으로 효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또 부모님뿐만 아니라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이 저희 할아버지입니다. 

보시다시피 65세라는 늦은 나이에 저라는 손자를 보셨습니다. 


지금은 국립대전현충원에 국가유공자로 안치되어 계셔서 어제 제가 다녀왔습니다.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다녀왔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학교 선생님이셨죠 할아버지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남들처럼 살되, 너만의 방식대로 세상과 싸우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똑똑한 거?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저 잘 듣고 말도 잘하고 건강하게만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부모님보다 더 정성껏 키워주셨습니다

남들과 똑같이 싸우고 다투고 삐치고 그러다 또 화해하고 미안하다는 사과하는 방법을 배우고


누가 다르다고 해서 배려하려고 하다 보면 (배려를) 안 하게 되잖아요? 

내가 언제까지 배려해야 하나 싶은 마음으로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멀어지죠

배려하다 보면 외면하게 되죠 

그래서 저는 결국 싸워야 해요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게끔 싸워야 해요

지금도 여전히 동생과 싸우고 부모님과 많이 싸웁니다


동생은 말도 잘 안 하고 수화만 하려니 서로 의사소통이 잘 안 돼서 자주 싸웁니다

형인 제가 양보해서 동생을 봐서라도 수화를 배워야겠다 싶어서

동생 따라 농아인 야구팀에 가입해서 야구를 시작할 겸 수화도 배웠습니다.



팀 특성상 모두 농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수화로 소통을 해야 해서 제가 수화를 배우기 시작했고

야구를 하다 보니까 상대 팀에서 '시간 뺏는 거 아니야?'라는 부정적인 시각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상대측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서로 교류도 없이 인사만 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그러한 부분이 많이 안타깝게 느껴졌고 야구만 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아서 심지어 경기를 보러온 관중이 있는데 

수화를 하다 보니까 (관중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며 오해가 생기고

원치 않은 상황이 많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심판과 선수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매니저의 수화통역 없이 스스로 다 했습니다 

덕분에 야구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동생과 많이 친해졌고 또 동생도 저를 보면서 '형을 따라서 구화를 배워야겠구나' (생각해서)

저와 함께 구화와 수화를 같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습니다. 맨날 욕했죠

말을 왜 그따위로 하냐고 하면서요

(ㅎㅎ)


하지만 들리지 않는 건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연습하면 됩니다. 

야구는 동생과 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이자 세계와 저를 연결해주는 연결고리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내년 2019년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세계농아인야구대회'에 국가대표로 나가고 싶다는 꿈도 꾸게 되었습니다. 

동생하고 저는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박수)


마음에 담아둔다고 해서 사랑이 저절로 전해지지 않잖아요 

행동하고 말로 표현하고 다 해야 하잖아요

여러분에게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사랑을 전할 방법이 있을 겁니다

저희에게는 야구였지만 여러분에게도 또 다른 매개체가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랑은 단번에 전할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시간을 들이면서 천천히 (전해야지)

사랑이 전해지고, 또 같이 시간을 보내고 노력할 때 그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강연 처음 말씀드렸던 '가족은 희로애락이다'라는 말 기억하시죠? 


기쁘고 즐거운 순간만 같이하는 것이 가족은 아닙니다. 

희로애락 모두 함께 하는 것이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미운 정 고운 정 들면서 모든 감정을 공유할 때

가족이라는 존재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감정을 나누고 공감해준 여러분도 

역시 저와 같이 희로애락을 나눈 친구이면서도 가족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박수)


가족과 함께 더 많이 희로애락의 순간을 많이 나누시길 바랍니다.

그게 가장 가족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청각을 잃은 제 친구를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전체 또는 일부가 잘못듣고 잘못 옮겨적은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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