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분노 | 김훈 작가, 생명안전시민넷 공동대표 | #인권 #사람 #아름다움 | 세바시 1644회
✅ 강연 요약:
1. 일상의 아름다움
-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본 아이들과 부모들의 모습에서 ‘인간 생명의 찬란함’을 발견함.
- 봄볕 속 생명의 에너지는 설명이나 증명이 아닌 경험의 아름다움.
2. 수능과 청소년
- 수능 시험이라는 제도에 고통받는 학생들을 보며 어른들의 잘못을 통감함.
- 그럼에도 서로 응원하고 포옹하며 선배를 격려하는 아이들의 순수함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움.
3. 생명 자체의 신비
- 시험 후 축구하는 학생들의 땀과 기쁨, 그들의 몸에서 피어나는 **김(기운)**조차 아름다움.
- 꽃이 피는 원리나 까치집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설명할 수 없어도, 그 안에 자연의 질서와 신비를 느낌.
4. 사회에 대한 분노
- 세종로 현수막에 담긴 증오, 정치권의 언어는 한국 사회가 적대적 먹이사슬로 가고 있음을 보여줌.
- 학교폭력, 집단 간의 갈등 등은 인간 존재를 파괴하고 있음.
5. 희망과 회복의 가능성
- 그러나 그 와중에도 거리에서 키스하는 젊은이들, 햇살 아래 벤치에 앉은 노인의 평온은 희망의 징표임.
- 자연의 위로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우리의 감성이야말로 회복의 출발점.
6. 아름다움과 분노는 연결된다
- 인간의 존엄을 억압하는 것에 분노하는 이유는, 인간 존재가 그만큼 아름답고 고귀하다는 믿음 때문이다.
- 보편적 인권과 생명의 가치는 개별적 인간의 삶에서 실현될 때에만 진짜 의미가 있음.
저는 이 자리에서 사람과 사람 사는 마을의 아름다움을 말하려 합니다.
저는 너무도 할 말이 많아서 밤을 새워서 말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남을 욕하고 헐뜯는 언어에만 익숙해져 있어서 제 말이 이해받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저는 그 두려움을 무릅쓰고 말해 보겠습니다.
저는 여러 혁명의 선언서에 쓰여 있는 그 인간의 천부적인 존엄이나 인간의 고귀함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여러 조형물이나 구조물 또는 언어적 성취물의 아름다움을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단지 인간 존재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이 마을과 거리와 공원의 일상의 아름다움을 말해야 합니다.
저희 말이 너무나 심심하고 그야말로 일상적이어서 남에게 이해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런 말을 준비할 때 저는 신이 납니다.
지난 3월 첫째 주에 제가 사는 동네 초등학교에서 1학년 신입생들의 입학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70살이 넘은 노인인데 해마다 초등학교 입학식에 구경을 갑니다.
봄볕이 가득한 운동장에는 우리 마을의 젊은 어머니들이 1학년 신입생들을 데리고 모여 있었습니다.
젊은 아버지들도 몇 명 왔습니다.
처음 만난 아이들은 낯설어하는 기색도 없이 서로 친구가 됐고, 젊은 어머니들끼리 금세 친해져서 수다를 떨고 깔깔 웃었습니다.
젊은 교사들이 아이들과 손을 잡고 둥글게 대열을 이루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이 봄볕 속에서 인간의 생명의 아름다움은 찬란했고, 학교 운동장은 야생하는 꽃밭처럼 피어났습니다.
그 생명의 꽃밭은 설명하거나 분석할 필요가 없이 본래 스스로 그러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과 젊은 어머니, 젊은 아버지들을 바라보면서 인간은 아름답다, 인간은 이 아름다움을 의심할 수가 없다, 이것은 자명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날은 제 노년의 날들 중에서 기쁜 날이고, 저의 기쁨을 남에게 말해주고 싶은 날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과 대입 재수생들이 수능 시험을 치르는 날은 그 청소년들의 형성기에서 가장 힘들고 긴장되는 날일 것입니다. 이 시험은 전국의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일렬로 세우는 시험입니다.
수능 시험은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무자비한 경쟁의 틀 안으로 편입시키는 제도입니다.
이 시험이 끝나면 언론들은 문제의 난이도를 분석하고 성적을 예측하는 특집 프로그램을 내보내는데,
이때 시험을 치른 청소년들은 또 한 번 지역을 통과하게 됩니다.
저는 대입 수능 시험을 치르는 날마다 아침에 동네 학교 문 앞에 나가서 고사장으로 들어가는 청소년들을 구경합니다.
어른들의 제도 안으로 별 수 없이 끌려 들어가는 수험생들을 보면서
'아 우리가 지금 우리 자식들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회한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학교 문 앞에는 2학년 학생들이 새벽부터 몰려와서 가스불로 커피를 끓여놓고, 어묵을 벌려놓고, 꽹가리를 때리고 파이팅을 외치면서 고3 선배들을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고2 학생들이 고3 수험생들을 끌어안고 등 두들기면서
'형, 시험 잘 봐 파이팅 파이팅 우리 학교 처남 무적 올백 올백'
올백은 다 백점 맞이라는 얘기 올백을 왜 치고 있었어요
고2 학생들은 고3 수험생들이 시험 잘 보라고 응원하고 있지만 이 수능은 점수 1, 2점 차이로 우열을 가려서 줄을 세우고 성적에 따라서 차별을 매기는 시험이기 때문에 다들 시험을 잘 봐서 점수 나쁜 사람이 없다면 더 큰 문제가 생기는 제도입니다.
그래서 시험 잘 보라는 응원의 말은 참 무력한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수능 시험 날 학교 정문 앞에 모여서 고3을 응원하는 고2 학생들은 눈물 겹게도 예뻐 보였습니다.
지역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도 사람의 아들 딸들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생각을 하면서 나는 참으로 기뻤습니다.
이 고2 학생들도 내년에는 또 별 수 없이 고3이 되어서 또 고위의 응원을 받으면서 고사장 안으로 들어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슬프고도 또 기뻤습니다.
수능이 다 끝난 저녁 때 다시 내 학교에 가보니까 한 아이가 운동장 구석에 찌그리고 앉아서 집에 안 가고 머리를 무릎에 딛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 애는 아마도 시험을 망친 아이겠죠.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이 아이는 돌아가지 않고 있더군요.
저는 아이에게 다가가서 뭐라고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던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야 괜찮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다들 어른들이 잘못한 거다 꼰대들이 잘못했다' 아마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겠죠.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날 집에 돌아와서 그 아이의 그 슬픈 어깨를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능이 끝나니까 공부해서 풀려난 동네 남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와서 축구를 하고 있더군요.
추운 날인데도 남학생들은 짧은 바지에 우통을 벗고 막 달렸습니다.
골을 넣으면 길길이 날뛰고 끌어안고 좋아했고 손흥민이 흉내를 내서 카메라 찍는 그 골 세레머니를 했어요.
골을 넣은 아이들뿐 아니라 같은 편 애들 모두가 손흥민이 흉내를 내면서 좋아했습니다.
이 달리는 아이들 머리에서 보니까 찐빵 집처럼 김이 올랐어요. 김
입에서도 하얀 김이 막 나왔어요.
아이들의 머리통에서 올라오는 김을 보니까 참 아름다웠습니다.
이 김이 왜 아름다운 것인가를 묻는 질문은 이것은 질문으로 성립되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 그 김은 본래 그렇게 아름다운 거예요.
그건 설명할 필요가 없이 아름다운 것이죠.
그리고 인간의 마음 속에는 이 김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힘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 스스로 그 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 힘은 증명된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도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거침없이 끌어안고 키스하고 볼을 비비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나의 청춘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지금 세종로 네거리에 가보면은 여러 정당에서 써붙인 현수막들이 있잖아요.
온갖 욕지거리, 악다구니, 저주, 악담, 증오, 쌍소리, 가짜 뉴스 다 써붙여 놨어 현수막에.
그걸 보면 나는 저게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런가를 생각할 수는 없어요.
다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는 참 구제하기가 어려운 쓰레기통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아마 여러분들도 대게 비슷한 심정일 겁니다.
지금도 그 현수막이 가득 차 있어 광화문에 온 동네에.
그런데 그 현수막 아래에서 젊은 남녀가 키스를 해요.
광화문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는 그 동안을 못 참아 가지고 키스를 하고 신호등이 바뀌면 건너가는 거예요.
그거를 보면은 '야 우리나라는 희망이 있다 아직도 희망이 있다'
왜냐하면 이 젊은이들이 저렇게 살아서 육체로 이렇게 살아서 생명의 생명으로 가득 채워서 살아 있으니까 아 희망이 있구나
저 저런 썩어빠진 현수막 밑에서도 저렇게 키스를 하는구나 하는 기쁨이 있어요. 나한테.
그렇다고 내가 거리의 키스를 장령하는 건 아니에요.

권장하고 그렇게 많이 하라는 것은 아닌데 음 그건 아닌데 일단 그렇게 벌어지고 있는 키스는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그 생명의 에너지와 아름다움을 긍정할 수 밖에 없다는 거예요.
권장하는 것은 아니로되, 벌어진 사태는 긍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저는 젊어서 등산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높은 산에 못 올라갑니다.
그리고 마을 공원을 산책하는 정도죠.
공원에 벤치에 앉아서 햇빛을 쫄 때 저는 제 몸과 마음으로 행복을 느껴요.
저 호흡과 세포의 구멍마다 햇빛이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나와 태양 사이에 아무런 차단이나 장애물이 없이 태양의 기운이 내 몸속으로 이렇게 직접 들어오는 것을 느끼죠.
이럴 때는 내 몸과 우주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내 몸과 마음이 우주의 공간과 일치되는 기쁨을 느낍니다.
이런 행복은 늙은 사람만 알 수 있는 행복이에요.
여러분들은 아직 몰라요.
그게 뭐가 그렇게 행복한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행복감이 이렇게 시간과 공간에 가득 차기 때문에 이게 살아있는 존재의 신비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무에서 여기서 꽃이 피고 새빛 돋는 나무를 바라보는 기쁨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식물 속에 어떤 생명의 원리가 작동되고 있길래 꽃들이 저렇게 무수한 색깔과 형태로 피어나는지를 인간은 알지 못해요.
꽃 안에 어떤 에너지가 있길래 그렇게 다양한 꽃이 피어나는지 인간은 모르겠어요. 몰라요.
내가 식물학 전공하는 내 친구들한테 물어봐도 모른대.
그건 알 수가 없는 거래.
그리고 좀 아는 거를 좀 물어봐 달라고 그러 아는 거를 물어봐.
그리고 모르는 걸 좀 물어보지 말라. 이런
그래서 내가 이거 다시는 안 물어보겠다 그랬어.
근데 그것이 왜 그렇게 꽃이 그렇게 도대체 무슨 원리가 있길래 그렇게 아름다운 모양과 색깔로 다양하게 피어나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고, 증명할 수가 없고, 물어봐도 대답을 못 못 하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가 있어요. 그렇죠?
보면 그게 아름다우니까
이것은 참 인간 생명의 신비인 것입니다.
태풍이 오면 다 이렇게 무너져 버리잖아요.
사람이 지는 빌딩이 무너지고 다리가 무너지고 도로가 무너지는데,
그날 아침에도 호수 공원에 나가 보면 까치집이 안 무너지고 있어요.
그 안 무너져. 그 높은 나무에 그대로 매달려서 안 무너져.
그 안에 까치가 들어가서 깍깍 짓고 있어요.
그걸 보면 참 강력하고, 아름다운 존재로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내가 또 또 물어봤어요.
동물학자 야 까치집은 왜 안 무너지냐?
아니 니들이 사람이 진 집 다 무너져 가지고 엉망진창이 됐는데, 왜 까치집 저기 저렇게 엉성한 게 왜 안 무너지냐? 그랬더니
그것도 참 아는 거를 좀 물어봐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근데 아마 까치집이 안 무너지는 이유는 내가 잘 모르게 까치집이 이렇게 떨어진 거는 내가 한번 봤어요.
땅에 떨어진 거 무너지지 않았어, 깨지진 않았는데, 이게 떨어진 거예요.
이렇게 봤더니 어떻게 됐냐 하면은 그 몸이 닿는 안쪽 있잖아 거기는 아무튼 아주 섬세한 내장재로 했어요.
그리고 겉에는 이제 거친 나무 토막을 물어 싸고 자기가 자기의 새끼 아래에서 깨어난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안에 이렇게 보드라운 보드라운 재료로 해놨어요. 내장자로.
그걸 보니까 까치도 인간하고 별로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이 자연 속에는 아무런 그 자연 속에는 아무런 윤리적 의미나 도덕적 의미가 없는 거예요.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걸 증명할 수가 없어요.
자유는 영원히 인과 법칙의 지배를 받는 물리적 현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파도가 수억 년 동안 들어왔 들어왔다 나가잖아요.
그 수억 년이 계속된다고 해서 그 시간 속에서 어떤 윤리나 도덕적인 의미가 발생하지는 않는 거예요.
그건 물리적인 인과 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물리적인 환경이 그 인간을 위로하고 인간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잖아요.
이것도 우리 생명의 신비인 것입니다. 생명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죠.
이 문제는 나는 더 이상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그것은 누구한테 물어보면 또 '야 아는 걸 물어봐라' 이렇게 되니까.
그런데 아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마음 속에 그 같은 자연이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의 성질이 내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외계에 있는 자연을 보면 거기에 공감하고
가흥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막연히
증명할 수는 없어요. 물론 없지만 그것은 내가 경험할 수는 있는 것이죠.
이것은 과학 내가 지금 말하는 과학적 지식은 아니에요. 증명할 수가 없지만 나는 그것을 느낄 수가 있어요.
그것이 아름답다는 걸 느낄 수 있죠.
나는 그런 느낌 그것을 경험하는 것으로서도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가 있는 사람이죠.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집단과 집단 개인과 개인 또 집단과 개인 그리고 여러 그 먹이 사슬의 단계가 너무나 적대적이에요.
먹이사들의 관계가 이렇게 적대적인 시대를 나는 70 평생에 처음 봤어요.
먹이사슬의 관계가 적대적이라는 것은, 먹이사슬이 여러 층으로 구성되어 있잖아요?
이 단계가 다 적대적이에요.
저 놈이 먹으면 내가 못 먹는 거야.
저게 못 먹어야 내가 먹을 수가 있어요.
저게 많이 먹으면, 나는 조금 먹을 수가
이게 이 관계가 서로 의존하고 서로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적대적이게 돼서 서로 뜯어먹고 사는 거예요.
그리고 또 이 학교 폭력의 문제가 요새 문제가 되어 있잖아요.
학교 폭력은 정말 이건 심각한, 이것은 수많은 청소년들의 마음을 다 파괴하고 그 생애를 파괴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정치권들은 매일 아까 얘기했듯이 증오의 언어를 남발하지,
이 정치권이 증어의 언어를 증후와 저주의 언어를 이렇게 쏟아내면은 언론들이 그걸 받아서 쓰니까 확성기를 통해서 수백 배 1만 배로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죠.
그 이런 사태를 보고 게 분노를 느끼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성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꽃을 보고 이렇게 기뻐하는 것하고 똑같은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그런 것을 보고 느끼는 분노나,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는 행복감이나, 그 근원은 같은 것인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인간의 억압과 차별에 반대하고 거기에 분노하는 것은 우리는 인간이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에요.
그것을 믿기 때문에 거기에 그것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인간이 고귀하다고 말하잖아요.
인간의 존재가 고귀하다는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조직이나 집단이 고귀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인간이 고귀하다는 것은 인간이 만든 업적이나 위대한 건축물이나 예술품이나 무슨 인간이 만든 철학이나 사상이 위대하다고 고귀한 것이 아니고, 그 인간 하나하나의 개별적 존재가 존엄하고 고귀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러니까 인권, 인권의 문제, 생명의 문제 이런 것을 우리는 보편적 가치라고 하잖아요.
인류 어느 인류에나 해당하는 보편적 가치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닐 거예요.
그러나 그 보편적 가치가 이런 개별적인 현상, 개별적인 구체성, 개별적인 인간 속에서, 개별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다면은 그 보편적 가치는 전적으로 무의미한 거예요.
아무 의미 없는 거야. 인간한테.
그 보편적 가치라는 것은 뭐 인권은 우리는 평등하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것이 개별적인 인간의 구체성 속에서 실현되지 않으면, 그것은 어떻게 법 조문 속에서 그렇게 관념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그 인권일 뿐이에요. 그 보편성이라는 것이
그러니까 우리가 인권이나 생명을 말할 때는 개개인의 구체적 개별성을 존중해야 된다는 것이죠.
생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각성 그리고 이런 생명을 억압하는 사태에 대한 분노
그것은 우리가 인간에 대한 아름다움과 거기에 그것을 억압하는 사태에 대한 분노, 이것이 결합되어 있을 때,
그것은 더 큰 함성으로 번져나가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함성입니다.
시민들이 다 같이 질러대는 함성 시민들의 함성, the chorus of citizen 이게 없으면은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어요.
혼자서 아무리 내가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시민들의 함성이 울려퍼질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개선할 수 있는 어떤 정치적인 동력을 확보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합창의 선율은 합창의 주된 선율은 아름다움과 분노라는 것입니다.
합쳐서 합창을 만들어요.
그런데 오늘 말의 주제는 아름다움과 분노입니다.
제 말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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