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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1485회 | 공감한다는 착각ㅣ김태경 ‘용서하지 않을 권리’ 저자, 서원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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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한다는 착각

 

 

선한 의지가 항상 선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의지나 동기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뭘 어떻게 도와줘야 될지 모르는 상태가 되는 거죠.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으신가요? 가장 먼저 실천할 것 세 가지

 

 

공감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지 않으려면

 

 

안녕하세요. 

임상심리학자 김태경입니다. 

범죄 심리학자이기도 하고 피해자 학자이기도 하고 진술 분석가이기도 합니다.

반갑습니다. 

 

거짓말 

 

여러분은 하루에 몇 번이나 거짓말을 하시나요?

뭐 어떤 분은 분명히 이 질문을 듣고 '나는 절대 거짓말 따위는 하지 않았어요'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어제 누구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떠올려보시고,

그 사람과 정말로 진정성 있는 대화만 하셨는지,

그 사람에게 혹시라도 진심을 담지 않은 죄수천은 하지 않으셨는지 한번 곱씹어 보시겠어요?

단 한마디도 진심 어리지 않은 말을 뱉지 않았다. 네, 자신할 수 있는 분이 혹시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저요? 저는 거짓말을 좀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어제 사실은 되게 많은 사람을 만났고요.

그 사람들을 만나서 세상 기쁘고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반갑습니다. 정말 기쁩니다라는 말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굉장히 내향적인 사람이어서요.

낯선 사람을 만나서 몹시 즐겁고 반갑고 기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살짝 오버한 거죠.

 

물론 제가 현실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상대방을 기만한 건 아닙니다.

더욱이 상대방 역시 뭐 제가 부드럽게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의례적으로 인사를 했다고 생각하겠죠.

우리는 생각보다 일상에서 거짓말을 많이 하고 지냅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 하루에 최소 두 번 이상의 거짓말을 한다고도 하네요.

가족일수록 서로 거짓말을 안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정서적으로 매우 가까운 사람일수록, 특히 가족일수록 거짓말을 별로 안 한다는 것입니다.

대체 왜 그럴까요? 

생각보다 가족들에게 거짓말을 많이 할 것만 같은데 정작 연구 결과는 그렇지 않죠 

뭐 솔직히 말씀드려서 가족끼리는 거짓말은커녕 대화 자체가 현저히 줄어들기 마련인데요.

가뜩이나 대화가 줄었는데 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만 같은 백색 거짓말

고맙습니다 이해합니다 응원합니다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이해합니다. 응원합니다. 괜찮습니다. 

이런 말들을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밖에서는 영혼 없이 막 난발하던 백색 거짓말들을 대문을 여는 순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 십상이죠.

하지만 그러면서도 굳게 믿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거라고 왜요?

그만큼 정이 쌓였으니까 정만 쌓이면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헤아려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가족이니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거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뭐 몇 분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도 세대 차이가 있다고 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착각을 자주 하죠.

그러다 보니 실망도 많이 하게 되고 오해도 자주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뭐 다른 한편으로는 충고 뭐 혹은 조언을 가장해서 간섭하고 비난하고 때로는 자기를 무시한다고 오해해서 화를 내고 폭력을 행사하기까지도 하죠.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혹시 누군가의 마음을 딱 보면 척하고 알 수 있다고 쉽게 공감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고 믿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착각에 빠진 상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잘 아는 사람이라도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거든요.

뭐 심지어 나이도 다르고 어울려서 노는 친구들도 다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만, 이해한 마음을 정확하게 공감해서 반영해 주는 건 더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 주변의 사람들 중에는 저에게 자주 질문을 하시는데요.

 

어떻게 공감하고 반응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

 

마음은 어렵사리 어떻게 하다 보니 이해는 됐어, 됐는데, 이 이해한 마음을 어떻게 전달해야 되는지 잘 모르겠어라는 말들을 많이 하십니다.

이해한 것과 공감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요.

 

 


저의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요? 

저희 집에 그 질풍노도의 상태인 뇌와 나름 고군분투하고 있는 아이가 한 명 있습니다.

이 아이가 한때 조커라는 영화에 굉장히 과몰입했었는데요.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호아킨 피닉스 조커

 

저는 개인적으로 조커라는 영화에 그렇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마음속 깊숙이 어느 곳에선가 저게 과연 정의로운 것일까라는 의문이 자꾸 올라와서 영화를 보는 것 자체를 방해했던 그런 기억이 나는데요.

이 아이는 조커의 어느 지점에 굉장히 꽂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같은 부분을 계속 반복해서 보기를 계속했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휑해진 눈으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엄마 어제 봤던 영화의 굉장히 끔찍한 장면들이 자꾸 머리에서 떠올라요.

아 이 기억이 머리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요 너무 힘들어요."

여러분이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되게 많은 말들이 떠오르시죠. 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너무 많이 보더라, 정도 꽃 좀 하지,

제가 아이의 엄마가 아닌 상담가였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영화의 끔찍한 장면들이 머릿속에 자꾸 떠올라서 힘들구나" 

"영화는 재밌었는데 그걸 보다 보니 기억이 머리에 각인되어서 그것을 없애는 게 혼자서는 쉽지 않은 모양이네."

자 그러면 덜 힘들게 하기 위해서 나랑 좋은 방법이 있는지 찾아볼까? 아마 이렇게 얘기했겠죠.

근데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저는 엄마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게 너 요즘 좀 과하게 보시더라 조절이 잘 안 돼? 그럼 엄마가 대신 좀 해줄까? TV 다시 보기 좀 제안을 해볼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네 가족 간에서도 공감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닌 건 분명하죠.

 

 

 

저는 트라우마 특히 범죄 트라우마 피해자를 되게 오랫동안 상담을 했습니다.

살인강도 강간 폭행 치사 방화 피해자 등등등 

그간 정말 많은 피해자를 만났는데 이런 저에게는 그러면 상담가로서 공감하는 것이 늘 쉬운 일일까요?

많은 분들이 저를 포함한 심리 상담가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이런 거죠 

모든 날 모든 순간에 항상 매우 공감적으로 반응할 수 있을 거다.

그럴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저도 사람이거든요.

저도 저 나름의 욕구와 감정들이 있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아마 이건 저뿐만이 아닐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심리 상담 전문가 선생님들에게 여쭤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실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이유는 공감이라는 게 생각보다 많은 집중력과 정신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집중력이 필요한 '공감'

 

매 순간 이렇게 고도로 집중하면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러면서 지낸다면 아마 수명이 많이 단축될 것 같습니다.

 

 

심리 상담 장면에서 말하는 공감은 같은 경험이 없어도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서 이해를 하되 조건이 하나 더 붙습니다.

중립성과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 

 

중립성과 객관성

 

그래서 타인과의 심리적인 거리 이걸 이제 경계 혹은 울타리라고도 하는데요.

이런 울타리를 유지하는 게 되게 중요합니다.

 

 

이건 숙련된 전문가에게 조차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울타리나 경계가 너무 단단하고 두꺼우면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감정적으로 충분히 헤아려 이해하는 건 쉽지 않고, 오히려 오해를 할 가능성도 많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저의 생각과 감정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데 이 경계가 너무 약하거나 없어도 문제가 생기는데요.

상대방과 저와의 경계가 없으니 상대방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저에게 넘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전이

 

이걸 심리학에서 전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전의가 생기면 중립성을 유지하는 건 굉장히 어렵게 됩니다.

때로는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동감하게 되면서 2차 트라우마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어 저를 포함해서 제 주변의 트라우마 상담가들은 항상 이 과잉 동감, 그로 인해서 생기는 2차 트라우마에 대한 걱정들을 많이 하고 어떤 분은 2차 트라우마 때문에 이 일을 그만두시기도 합니다.

 

 

대상 관계 이론

 

이런 면에서 정신 분석의 하위 영역 중에 대상관계 이론이라고 있는데요.

대상관계 이론에서는 나의 정신적인 울타리 그리고 나의 울타리와 다른 사람의 울타리 이 사이에 공간이 있겠죠 이 적정한 공간을 유지하는 것, 공간을 확보하는 것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건강한 심리적 거리는 사람마다 심지어 같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래서 상대에 따라서 혹은 상황에 따라서 매 순간 적정한 거리,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리를 가늠해야만 합니다.

 

 

어린 자녀를 살인 사건으로 잃은 어머니를 상담할 때였는데요.

상담 시간마다 유족께서 죽어가는 아이를 보내면서 그 아이의 시신을 만졌을 때 손에 닿았다는 느낌 

어 마지막으로 아이가 토해냈던 말들, 

뭐 사건 현장에서 났던 여러 가지 불쾌한 냄새 이런 걸 이야기하시면서 울기를 반복하셨습니다.

매주 한 번 내지 두 번가량의 상담 회기를 가지게 되었는데요.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건 사실은 경험 많은 트라우마 상담자에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 역시도 유족의 감정에 과잉 공감하게 되어서 굉장히 울컥하기도 하고요.

집에 갈 때 아이를 잃은 엄마의 마음으로 이렇게 집으로 향하는 그런 감각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이런 감각을 느끼는 게 상담자 자신에게도 굉장히 큰 부담이 되지만 상담 관계 자체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정말 많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이제 이런 방법을 쓰죠. 

울거나 두려워하거나 걱정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서 울타리를 구축합니다.

 

 

 

저는 한동안 제가 울타리를 꽤 잘 치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족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분의 감정에 잘 공감하고 더불어서 저의 정신적 안녕도 잘 지켜내고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상담을 했고 어느 날 운전을 하고 가다가 도로가 꽉 막혔습니다.

정말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됐죠. 

가끔은 이제 이렇게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저 같은 사람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갑자기 많아지는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문득 뭔가 멍하게 생각을 하던 중에 갑자기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119 구급차가 달려가는 게 보였습니다.

그 순간 수없이 반복해서 듣고 머릿속에서 떠올렸던 장면, 

즉 유족께서 아이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울부짖던 모습.

그 장면이 제가 직접 본 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 갑자기 툭 하고 떠올랐습니다.

마치 심리적 안정감을 확보하기 위해서 멀리 두었던 줌 아웃해두었던 장면이 줌 인 하면서 저를 덮쳐오는 듯한 느낌이었죠.

결국 저는 운전대를 부여잡고 꽤 오랫동안 흐느껴서 울었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지금도 사실은 감정적으로 좀 동요되는 느낌을 느낍니다.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나는 꽤나 좋은 상담가인 것 같고 그분하고 분명히 상담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사실은 제가 그분의 감정을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밀어냈던 거죠.

난 너무 저도 역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기 때문에 유족의 아이를 잃은 상실감을 구구절절이 들으면서 제 마음에서 내게 저런 일이 일어나면 나는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던 것 같고, 

그래서 저런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유족과 거리를 쭉 길게 두었던 것 같습니다.

 

이걸 계기로 해서 정말 다행히도 저에겐 굉장히 이렇게 좀 좋은 중요한 경험이었는데요.

적정한 거리를 다시 조정을 했고 상담은 감사하게도 유족께서 좀 많이 회복하는 방향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성선설과 성악설 중에 어느 쪽을 믿으시나요?

뭐 어렸을 때 저는 막연하게 성선설이 진리이기를 바라는 마음 그 마음으로 살았던 것 같고요.

심리학을 공부하면서는 뭐 교육과 경험에 따라서 선악은 결정되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트라우마 상담을 오랫동안 지속하면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피해자 보호를 위해서 얼마나 애쓰는지 제 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지금 여기에서 저는 대부분의 인간에게 내면 깊숙이 선한 의지가 자리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범죄자를 많이 만나기도 하는데요. 

범죄자를 많이 만나니 세상이 악한 사람들로 가득한 것처럼 보일 거라고 기대하시는 분들도 있으신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세상이 정말 위험한 곳이고, 누군가 악의적인 마음만 먹으면 끔찍한 범죄는 생길 수 있고, 그 대상이 어느 순간 내가 될 수 있어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저도 한때 그랬고요. 

이걸 이제 대리외상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이 대리 외상으로부터 회복하게 해주는 게 피해자와의 상담이었던 것 같습니다.

피해자분들이 회복을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제가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분을 포함한 그분이 소속되어 있는 지역 공동체가 그분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보면서 

'아 세상은 여전히 꽤 살만한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더 강하게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될 지점이 있는데요. 

선한 의지가 항상 선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선한 의지 ≠ 선한 결과

 

이건 제 생각에는 의지나 동기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타인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샘솟는 것까지는 되게 좋았는데,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보니 뭘 어떻게 도와줘야 될지 모르는 상태가 되는 거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이 아닌 나의 경험을 기준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고,

나라면 이럴 거야라는 생각으로 위로의 말과 도움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가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살인으로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게 되는 거죠.

 

 

이렇게 말씀드리는 어떤 분은 그러십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이 왜 문제가 되는 거죠?

네 산 사람은 살아야죠. 

근데 그분들은 살고 싶지 않은 상태이시거든요.

가족을 잃고도 이렇게 살아있는 것에 대한 죄책감하고 고군분투하는 분에게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은 위로라기보다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오는 중에 저는 되게 되게 많은 걸 잃었어요.

뭐 이제 사람도 못 믿겠고요. 다 짜증 나요. 그냥 

내가 피해자인데 근데 내가 수사받아야 하고 내가 거짓말 아니냐고 의심받아야 되고 

뭐 수사기관이든 법원이든 해달라는 건 다 해줬어요.

근데 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여전히 저는 무고 혐의자고요.

그래서 이제는 그냥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고소고 뭐고 이럴 줄 알았으면 저 고소 안 했어요."

 

상담 과정에서 범죄 피해자가 하셨단 말입니다.

 

 

 

여러분은 범죄 피해자의 경험에 대해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계신가요?

아마 뭐 꽤 많은 분들이 적어도 머리로는 제법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안타깝게도 오랜 시간 동안 강력범죄 피해자들의 곁을 지켜온 저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범죄를 행한 사람 즉 범죄자에게만 주로 관심을 기울이고 

피해자의 경험에 대해선 별로 깊이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피해자는 그저 범죄의 잔혹성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소비되죠.

 

우리는 왜 '피해자'는 보지 못하는 걸까?

 

그러면 우리는 왜 사건 너머에 있는 사람, 즉 피해자는 보지 못하는 걸까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착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잘 모른다는 생각조차를 못하니까 제대로 된 이해를 위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게 되는 거죠.

그 대신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오해 편견 이런 것들을 토대로 해서 피해자의 경험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당연히 오해가 많이 생기겠죠.

그리고 그 오해를 이해라고 착각하다 보니 의도와 상관없이 크고 작은 2차 가해를 자기 자신도 모르게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 범죄 피해자가 되는 게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을 드리면 뭐 피해자가 뭐 뭐 했기 때문에, 심지어는 가해자가 이러이러하게 불우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라고 생각을 하시는데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범죄를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주체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거든요.

이 말은 운이 나쁜 어느 날 그 표적이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죠.

범죄 피해자가 된다는 거, 우리와 그렇게 무관한 남의 일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이 제가 범죄 피해자를 바라보는 적정한 시선과 태도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용서하지 않을 권리라는 책을 쓴 이유입니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


범죄 피해자의 건강한 이웃이 한 명씩 늘어날 때마다 피해자들의 회복은 한 뼘씩 빨라질 거거든요.

그런 건강한 이웃을 늘리기 위해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피해자라고 낙인 찍고 피해자처럼 대해요.

그래서 나를 동정하는 사람들은 만나기가 싫어요.

지금껏 누구도 내게 호의따위 베풀지 않았는데,

엄마가 죽고 나니까 새삼스럽게 관심 준다고 너무 달라붙고 자꾸 그러니까 부담스럽고 죽고 싶어요.

그래서 사람들을 더 피하게 돼요. 

피해자가 아니라 그냥 이웃으로 자연스럽게 대해줬으면 좋겠어요."

 

살인 사건으로 어머니를 잃은 어느 분의 말씀이십니다.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으신가요? 네 충분히 가능합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뇌 속에 공감 회로가 있거든요.

그것이 건강하게 잘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미

다만 연습이 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공감을 잘하기 위한 3가지 실천법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실천할 것 세 가지 

남의 감정과 남의 생각을 넘겨 짚지 마라.

잘 모르겠으면 물어봐라. 

그리고 나와 다르면 왜 다르지라고 의구심을 품고 비난하지 말고 그냥 인정하고 존중하라입니다.

 

나는 도와주고 싶은데 정작 상대가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할 수도 있죠.

그러거든 그 사람의 의사를 존중해 주시면 됩니다.

이건 아직 때가 안 되었다는 의미이니까요. 

특히 범죄 피해자의 경험에 대해서 너무 쉽게 넘겨짚고 이해한다 혹은 뭐 공감한다 이렇게 착각하지 마시고 

잘 모른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고 그 대신 그들의 조용하지만 배려심 있는 이웃이 되어 주시면 어떨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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