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질주가 아니어도 괜찮은 이유 | 이시형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 #올림픽 #국가대표 #피겨 #김연아 | 세바시 1611회
부모님 시영이가 조금 이상해요.
쉬는 시간만 되면 막 복도에서 빙글빙글 막 춤을 추는데 꼭 미친놈 같아요.
스케이트를 시작한 지 7년 만에 국가대표라는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저는 제 인생 최악의 연기를 펼치며 최하위인 27위에 머무르게 됩니다.
아 안 되나 보다 할 수 없나 보다.
“환경이 안 된다고 꿈을 포기하지 마세요”
– 피겨 국가대표의 성장 이야기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했습니다. 보통 선수들에 비해 많이 늦은 나이였죠. 집안 형편이 어려워 엄마는 12시간씩 김밥집에서 일하시고, 저는 같은 시간 동안 훈련장에서 연습을 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고시원에서 살며, 방 한 칸짜리 집에서 힘들게 훈련을 이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던 중 중3 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단 1점 차이로 탈락하고, 어머니의 어깨 부상으로 훈련조차 이어갈 수 없게 됐습니다. 좌절하던 저에게 팬들의 크라우드 펀딩과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고, 덕분에 7년 만에 국가대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올림픽 무대에 섰지만, 최하위인 27위라는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큰 좌절감에 빠졌지만, "나는 왜 스케이트를 시작했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던졌습니다. 금메달이나 1등이 아니라, 그저 스케이트가 좋아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 결과보다는 과정과 꿈을 즐기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됐습니다. 이후 세계대회에서 첫 메달을 땄고, 지금도 스케이트를 즐기며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결과가 기대만큼 나오지 않아도, 환경이 어렵다고 느껴져도, 포기하지 않는 한 이미 꿈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결과가 어떻든 포기하지 않는 당신, 참 잘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혹시 스포츠 선수들의 꿈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국가대표
그렇죠 국가대표도 있고 금메달도 있고
그렇죠 올림픽도 있죠 맞습니다.
올림픽 출전입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올림픽을 꿈이나 목표로 생각합니다.
그런 꿈 같은 올림픽 출전의 기회가 작년 저에게 찾아오게 됩니다.
바로 올림픽 티켓을 분배하는 세계선수권에서 국가 순위 10위로 대한민국 사상 최초로 두 장의 올림픽 티켓을 획득할 수 있게 된 것인데요.
원래대로였다면 바로 두 장 확정이었지만, 바뀐 룰 때문에 세계선수권에 출전하지 않은 다른 선수가 네베론 트로피라는 지정 대회에 나가서 7위 안에 들어 7위 안에 들어 나머지 한 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드디어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기회가 나한테 오는구나.
정말 훈련에만 매진을 했고, 그렇게 네베론 트로피에 나가서 4회전 점프를 성공시키면서,
최고의 연기를 펼쳐 5위에 올라 나머지 한 장을 획득하며 대한민국 사상 두 명이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여기까진 너무 좋습니다.
이렇게 선수들의 꿈만 같은 올림픽에 낑낑 거리며 전 출전했습니다.
1등이나 좋은 결과는 아니어도 제가 준비한 모든 것을 보여드리길 바랐지만,
저는 제 인생 최악의 연기를 펼치며 출전 선수 30명 중 최하위인 27위에 머무르게 됩니다.
저는 그때 제 인생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나 안 되나 보다 할 수 없나 보다.
제 아쉬움은 어쩌면 다른 피겨 선수들보다는 훨씬 더 무거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올림픽에 출전하기까지 어떤 일들을 어떤 일들을 겪어왔는지 설명드리면
여러분들이 조금은 더 저의 슬픔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다른 피겨스케이팅 선수들보다는 조금 늦은 초등학교 4학년에 시작했습니다.
사실 보통 선수들의 시작 나이는 빠르면 5살, 평균 8살, 9살에 시작하는 걸로 보면 저는 굉장히 늦게 시작한 편입니다.
저는 2009년인 3학년 때부터 스케이트를 하고 싶다고 엄마한테 졸랐었는데요
엄마가 알아보시고는 피겨 스케이팅은 엘리트 종목이라서 우리 형편과 맞지 않고 시켜줄 수 없다라고 하셔서 저는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하고 싶어서 학교 쉬는 시간만 되면 복도에 나가서 동작, 점프, 스핀 등을 따라 했었어요.
근데 그걸 보신 담임 선생님께서 어머니를 학교로 호출하셨습니다.
담임 선생님께서 어머니에게
"어머님 시영이가 조금 이상해요.
수업시간에 잘 있는데 쉬는 시간만 되면 막 복도에서 빙글빙글 막 춤을 추는데 꼭 미친 놈 같아요."
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게 아니고 사실 시영이가 3학년 때부터 TV에 잠깐 나온 김연아 선수가 하는 피겨 스케이팅에 하고 싶다고 조르는데 얘가 운동에 하고 싶어서 그러나 해서 지금 수영도 시키고 있어요.
근데 이번에 올림픽에서 1등하는 김연아 선수를 보고는 이제는 꼭 해야겠다면서 조르고 있는데 가정 형편상 시키지 못하고 있어요.
라고 말씀드리니까 담임 선생님께서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세요 그냥 가까운 링크장 가서 한번 시켜보세요."
본인이 정말 하고 싶으면 끝까지 할 거고 좀 하다 지치면 그만하겠죠라고 말씀하셨다네요.
그 담임 선생님의 호출은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평소대로 어머니와 하교를 하며 집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한테
"시영아 피겨가 정말 하고 싶어?"
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딱 들었을 앞으로의 내 이 대답 하나로 앞으로의 내 인생이 달라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어 나 하고 싶어"
라고 대답을 했고, 그렇게 저는 1년 동안 조르고 졸라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정 형편상 저 어머니는 집을 나와 훈련지 근처인 고시원에서 고시원 생활을 하면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어머니는 저희 뒷바라지 때문에 김밥집에서 12시간씩 일을 하셨고,
저는 같은 시간 다른 장소인 훈련장에서 12시간씩 훈련을 했습니다.
4학년인 그때에는 어머니가 12시간씩 김밥집에서 일을 하신다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 줄 몰랐었는데,
돌이켜 보면 참 죄송하고 감사하면서도 정말 대단한 헌신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저는 훈련을 위해 고시원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좁아서 둘은 잘 수도 없는 공간이었어요.
한 명은 바닥에, 한 명은 침대에서 잤는데, 너무 좁아서 새벽 훈련이 있는 새벽 훈련이 있는 날이면
훈련지에 있는 훈련장에 있는 탈의실에서 자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집을 알아보게 되고, 부족한 재정으로 찾은 집은 저의 훈련지에서 30분을 버스를 타고 가서
또 30분을 올라야 있는 언덕 밑에 있는 집으로 월세가 20만 원으로 가장 싼 집이었습니다.
사실 집이라고 하기도 뭐한 방 한 칸에 심지어 방 안에 화장실도 없었고,
밖을 나가면 여섯 일곱 집들과 같이 사용하는 공용 화장실 하나밖에 없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그 집에서 생활하면서 기억나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요
갑자기 집이 정전이 됐어요. 그래서 '어 무슨 일이지?'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물을 데우려 커피 포트를 꽂았는데,
커피 포트도 끓일 수 없을 정도로 전력이 약해서 차단기가 내려갔던 것이었는데요.
저는 정전이 되던 순간 옆방 아저씨들의 욕지거리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생활을 하다가 중학교 3학년 저에게 국가대표의 기회가 찾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총합 점수 1점 차이로 아쉽게 석패하게 되는데요.
저는 석패 후 1시간을 넘게 걸어다니면서 울었는데, 그 눈물은 국가대표 선발전에 떨어져서도 있었지만,
너무 열심히 김밥을 마시던 어머니께서 어깨 회전근개 파열로 더 이상의 뒷바라지를 하기 힘드신 상황이었고,
또 내가 국가대표로서 훈련 수단과 훈련비를 지원받지 못한다면, 더 이상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경제적 상황을 마주한 눈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으로 훈련을 쉬게 됩니다.
그렇게 훈련을 쉰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저의 사정을 아신 스케이트 팬 분들이 크라우드 펀딩 후원을 열어주셨고,
많은 분들의 후원과 사랑으로 저는 다시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 스케이트를 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알려지다가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저의 사연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훈련비를 지원해 주심으로써 더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저는 다음 시즌에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당당히 3위에 올라 스케이트를 시작한 지 7년 만에 국가대표라는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렇게 저는 낑낑거리며 올림픽에 출전합니다.
그렇지만 제 삶을 담은 시합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하면서 날개 덮을 펴지 못하고 최하위인 27위에 머무르게 됩니다.
피겨 스케이팅에는 2분 50초의 쇼트 프로그램과 4분 10초의 프리스케이팅 두 가지의 프로그램이 있는데요.
하지만 모든 출전 선수가 이 두 가지의 프로그램을 펼칠 수는 없습니다.
앞선 쇼트 프로그램의 결과로 상위 24명만이 프리스케이팅,
즉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저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27위로 본선 진출도 하지 못하고 저의 삶을 담은 올림픽은 끝이 나버렸습니다.
안 되나 보다. 배경도, 백도, 돈도 없어서. 난 안 되나 보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다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내가 스케이트를 왜 시작했지?
올림픽 금메달 따려고 1등하려고 대회 나가서 막 수상하려고?
아니야 난 스케이트가 너무 좋아서 시작했잖아.
너무 좋아해서
그렇게 해서 시작하게 된 거잖아.
내가 스케이트 지금 못 하게 된 것도 아니고
난 여전히 스케이트 좋아하고 나는 이미 꿈을 이루는 거잖아.
그렇게 저는 결과에 담담하게 되었고 다시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
올 시즌 제가 올림픽 티켓을 획득했던 네베론 트로피에서 2위에 올라 시니어 국제대회 첫 메달을 획득했고,
그리고 시니어 그랑프리 3차 대회에서 4위에 올라 한국 남자 선수 시니어 그랑프리 데뷔 최고 순위를 기록하며 다시 열심히 스케이트를 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꿈을 낑낑거리면서 살아왔는데
이제는 제가 이미 꿈을 이뤘고, 이 꿈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과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계속 스케이트를 탈 거고, 또 살다가 안 되나 보다 싶은 순간이 또 올지도 모르지만,
세상에서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결과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저처럼 환경 때문에 안 되나 보다 하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결과가 어떻든 포기하지 않는 당신은 참 잘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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