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 된 자의 효도, 그 역사적 의미 | 김소라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 #부모 #자녀 #효도 | 세바시 1559회
우리가 흔히 조선 시대는 되게 아름다웠을 것이라 생각해요.
오늘날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식을 버리고 부모를 때리거나 죽이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정조는 이런 사회를 살아가면서 절망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정조는 재위 기간 중에 능으로 가는 행차를 66번 합니다.
백성들로부터 소원 수리하는 것이 3355건이에요.
한 번 갈 때마다 450번씩 멈춰서 얘기를 듣는 겁니다.
안녕하십니까
교장 가게 하계사 김소라입니다.
제가 몸 담고 있는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은 18세기 정조가 직접 수립한 규장각의 자료와 정신 그리고 역할까지 고스란히 계승한 기관입니다.
옛말에 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없다.
그래서 성군이라면 백성들이 먹고살 길을 마련해 주는 걸 급선무로 해야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정조 임금은 제 직장의 창업주시기도 하니 저에게는 누구보다도 성군이십니다.
자 그런데 과거로 돌아가서 정조랑 제가 규장각 생활을 같이 했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해집니다.
제가 자료를 보면요.
정조는 성실하고 꼼꼼하고 똑똑한 완벽주의자예요.
근태 관리 철저합니다.
복무규정 다 자기가 직접 만들어요.
신하들하고 회의를 하다가
'아 그 자료에 대해서 가져와라'
'어 그게 뭐죠?'
"나는 기억하고 있는데, 너희는 몰라 몇 월 며칠 자료 펴보면 나오잖아. 아 답답하네 "
이런 식으로 이제 일 처리를 하거든요.
만약에 정조가 제 직장 상사였으면 저는 맨날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녔을 거예요.
더군다나 정조 임금은 조선의 왕 중에 가장 첫 번째로 안경을 낄 만큼 지독한 책벌레입니다.
그러니까 말이나 글로도 제가 그 사람이 이겨볼 수가 없어요.
또 활 쏘기 대회를 하면 10발, 소로 나가면 9발만 딱 맞추고 내려놓습니다.
한 발은 겸손하러 안 맞추겠다. 그러고 나가요.
그러니까 제가 이 사람은 싸움으로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참 그 얄미운, 엄치나 캐릭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찬찬히 이 사람의 생애를 살펴보면, 이 인간으로서의 정조는 참으로 외람되게도 '가엽다' 이런 말이 절로 나옵니다.
이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가족들이 계속해서 그 곁을 떠나가기 때문입니다.
정조의 태몽은 그 아버지 사도세자가 꿔줬다고 해요.
사도세자가 꿈에 실용이 나타나서 구술을 쫙 품고 이제 방으로 쓱 들어왔는데,
꿈에서 깨고 나서도 그게 어찌나 생생하던지,
비단을 가져와라 해서 직접 그 실용을 그림으로 그리고 벽에다 걸어놓고 10달 동안 아이를 기다렸다 합니다.
그리고 정조가 태어나는 순간 할아버지 영조가 한 달음에 달려옵니다.
그리고 딱 보더니 잘 생겼다 어떻게 이렇게 나를 똑 닮았느냐 하면서,
이런 아이가 태어났으니까 앞으로 우리에게는 걱정 근심 없겠다 했다 합니다.
실제로 정조는 정말 영특했어요.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랍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 사도세자 상황은 점점 나빠집니다.
그래서 급기야 정조가 11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 사도세자는 유명을 달리합니다.
그런데 정말 슬프게도 정조는 자기 아버지의 입관에도 발인에도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 아버지가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된 정조에게도 시련은 계속 이어집니다.
여러분 드라마 옷소매의 붉은 끝동 잘 보셨을 텐데요.
거기 나오는 의빈 성 씨를 정주는 정말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어요.
문효세자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는데요.
그 아들을 금지 요격 기르지만 5살짜리 아들이 곧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의빈 성 씨는 3개월 만에 숨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의빈은 회임한 상태였거든요.
그러니까 정조는 아들, 아내 그리고 배 속의 아이까지 3명의 가족을 3개월 만에 잃게 되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이런 정조였기 때문에 그에게 가족이라는 것의 의미는 정말 각별했을 겁니다.
살아계시는 어머니 혜경궁 홍 씨를 정말 극진히 모시고,
또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 세자에게도 이렇게 융숭하게 묘를 지어서 모실만큼 애틋함을 표현을 합니다.
원래 사도세자의 묘는 여기 있지 않고요.
서울 동대문의 배봉산 기술에 있었고 그 이름도 원래는 수운 묘라고 불렸습니다.
네 정조가 직위하고 나서 이 수운 묘를 한 단계 높여서 원으로 바꿉니다.
묘가 아닌 원으로 바꿔주면서 그때 이름을 영우원이라고 바꿔줍니다.
그리고 몇 년 지나서 풍수지리적으로 좀 더 좋은 곳이 없을까 찾다가 바로 이곳 화성으로 묘를 옮기게 되고 이름을 혈륨원이라고 붙여줍니다.
지금은 우리가 육릉이라고 부르는데요.
이 육릉이라는 이름은 1899년에 고종 황제가 사도세자를 왕의 급으로 올려주면서 왕릉의 수준으로 높이며 새로 붙인 이름입니다.
현룡원을 마련하면서 정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불초한 소자가 하늘에 사무치고 땅끝까지 뻗치는 원한을 품고서도 멍청하고 구차하게 흙처럼 바위처럼 오늘날까지 죽지 않고 있던 것은 자식으로서 뒤를 이어 중대한 책임을 지고 부모님의 크나큰 축원을 대신이나마 이뤄볼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습니
이 불초한 소자가 하늘에 사무치고 땅 끝까지 뻗치는 원한을 품고서도 죽지 않고 있던 것은
자식으로서 내 뒤를 이어서 부모님의 큰 축원을 대신 이뤄볼까 하는 그 작은 기대 때문에 내가 버텼다고 말입니다.
정조는 기존의 영웅원보다 이 현룡은 을 훨씬 크고 웅장하게 짓습니다.
그리고 이 돌로 만든 석물들도 왕릉 수준까지 미치지 못하지만, 그 선에서는 가장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자 이렇게 공들여서 단장해 놓은 만큼 정조는 매년 이곳을 행차하면서 찾습니다.
사도 세자를 기리는 공간에 이 묘 말고도 사당이 별도로 있습니다.
도성 안에 경모궁이라는 이름의 사당이 있는데요. 거기에는 정조가 매달 갑니다.
만약에 혈룡원이 좀 더 가까웠으면 아마 여기도 더 자주 왔을 거예요.
정조 재위 기간 중에는 이제 국왕이 궁 밖으로 나가는 행차를 일컫는 거둥이라는 것의 횟수가 급격히 증가합니다.
정조 제 일 기의 거둥 횟수는 숙종의 4배 정도에 달합니다.
그중에서 상당수가 이 혈룡안을 찾은 행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임금께서 현륭원에 가시겠다는 것이 결정이 되면 미리 그 지난의 행차 길을 정합니다.
그리고 그 길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나와서 그 길을 청소하고 정비하고 쓸고 닦고 페인 곳을 황토를 뿌려서 메우는 등등 길 닦기를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이 행차가 밤에 지나는 마을이다 그러면 그 마을 주민들이 등불을 준비해서 길에 미리 달아놓고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궁궐에서 출발하는 사람들도 무척 바쁘게 움직입니다.
현룡왕 가는 날은 자정 12시 땡 하면 궁궐에서 출발해야 됐기 때문에 이제 모든 사람들이 막 준비를 서두르는데요.
정조 임금을 필두로 해서 각 부처 관계자, 호위병, 마병, 보병, 기약대, 나인 등등등 평균 6천 명가량의 사람이 서울에서 여기까지 방문합니다.
그럼 이 사람들이 어떻게 올까요? 말 타고? 아 물론 지위가 높으신 분들은 말을 타고 옵니다.
하지만 대다수 신하들은 걸어옵니다.
서울의 창덕궁에서 여기까지 걸어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지금 잘 뚫린 큰길 따라서 우선에서 온다 해도 시간이 14시간 정도 걸립니다.
물론 한 번도 안 쉬고 와야 합니다.
반차도라는 것이 있어요.
행렬 사람들이 그린 그림인데요.
이 사람들 보면은 물건을 다 하나씩 들고 임무가 있습니다.
그냥 걸어오지 않아요.
깃발도 휘두르고 악기도 연주하고 향도 피워야 돼요.
이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이 사람들의 발을 걷게 했을까? 무엇이 발걸음을 옮겨 주었을까?
바로 내가 임금을 수행하고 있다는 막중한, 책임감 그리고 내가 그의 효도에 함께하고 있다는 일종의 사명감 때문이었을 겁니다. 일반 백성들에게도 행차는 좋은 구경거리가 됐습니다.
워낙 행렬 자체가 너무 화려해요.
옷을 색 색깔로 갖춰 입고 계속 음악을 연주하면서 가기 때문에 귀도 즐겁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부용향이라는 이름의 왕실 전용 향이 있어요. 그럼 그 향을 싹 피우면서 가면은 코가 자극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임금의 행차는 오감을 자극하는 좋은 구경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나들이 가거나 벚꽃 구경할 때 미리 자리 선점하듯이 왕께서 나가신다더라 하면 미리 좋은 자리를 맡아 놓으려고 다툽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이 행차 구경에서 재미있는 것은요.
이웃나라 중국이나 일본처럼 무릎을 꿇고 있다든지 머리를 조아리고 있어야 한다든지 하는 룰이 없었다는 겁니다.
임금이 지나가시는 길만 침범하지 않으면 그 옆에서 서서 보든 앉아보든 누워서 보든 뒹굴면서 보든 상관없어요.
그래서 이제 임금을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특징입니다.
오히려 임금의 행차 기를 당당하게 막아서고 나선 백성들도 적지 않습니다.
"임금님 저 할 말 있어요." 이러면서 이제 나타나는 건데요.
정조는 재위 기간 중에 능으로 가는 행차를 66번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에 백성들로부터 소원 수리하는 것이 3355건이에요.
한 번 갈 때마다 450번씩 멈춰서 얘기를 듣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걸 되게 의식적으로 그냥 하고 지나갈 수 있잖아요.
음 알겠다 갈 수 있는데. 정조는 흘려듣지 않습니다.
일일이 다 기억하고 적어뒀다가
일정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면 반드시 그것에 대해서 조사하고 처분해서 답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백성들에게 임금의 행차는 그 자체로 무척 즐거운 유희이기도 하면서 백성과 임금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되어주는 아주 다행스러운 행차입니다.
정조에게도 이 혈류 건우를 행하는 것은 무척 행복한 여정이었을 겁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개인으로서 아버지에게 효를 당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가 꿈꾸던 이상적인 군주가 되는 과정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정조는 성리학을 무척 중시합니다.
그런데 성리학의 특징은 무엇이냐면요.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인이라는 것은 타고나는 내추럴 본 성인이 아니고,
누구나 인간이라면 마음속에 도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데,
그걸 누가 톡 건드려서 한 번 깨워주기만 하면,
너도 나도 얘도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주자학의 큰 특징이거든요.
근데 이때 그걸 깨울 수 있는 그 시작점이 뭐냐 바로 효입니다.
제가 외국인 학생들한테 한국의 효도 문화에 대해서 이제 설명할 일이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제가 사전에 열심히 이제 검색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어에는 효도, 효자 이게 단어로 남아 있지 않아요.
단순히 이제 '자식으로서의 의무' 이 정도로 그냥 두루뭉술하게 번역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떻습니까?
갓난아기라도 밥 잘 먹고 잠 잘 잠 우리에게 효자네 이런 칭찬을 하잖아요.
이러한 문화적인 차이는 유교의 영향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유교의 기본 경전 중에 대학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 대학은 수신 제가 치국평천하 이걸 강조하는데 그 시작이 효다라고 얘기합니다.
효경이라는 경전도 있는데요.
그 효경에서는 효라는 것이 천하를 다스리는 큰 방법이다라고도 이야기를 합니다.
부모가 나에게 베푼 사랑을 내가 그냥 먹고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체화해서 다시 감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가정을 넘어서 이웃 사회 국가로까지 확장시키는 것이야말로 유교적인 유토피아 대동사회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조선은 유교 국가가 되고자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을 억압하고 누르기보다는 교화시켜야 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정조는요 자기 스스로가 군사,
왕이자 세상을 가르치는 스승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정조는요. 백성들을 처벌하고 억제하는 것보다 이 개개인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믿었어요.
바뀔 수 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내가 모범을 보이면, 그리고 그 시작인 효의 모범을 보이면 이 백성도 바뀔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조선 시대는 되게 아름다웠을 것이라 생각해요.
가족끼리 친족끼리 잘 뭉치고 이웃끼리 서로 돕고 살았을 거다.
그런데 자료를 보면요. 어 오늘날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 사회에도 자식을 버리고 부모를 때리거나 죽이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혹은 내 자식 내 부모는 정말 애지중지 아끼는데, 바로 이웃집 사람이 굶어 죽어도 상관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정조는 이런 사회를 살아가면서 절망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왜냐? 바꿀 수 있으니까.
어떻게? 내가 모범을 보임으로써
저 사람을 감화시키면서 내가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맹점이 뭐냐. 정조가 보여주어야 하는 효는요. 여느 집 아들이 하는 그것과는 달라야 했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임금은 무한한 권력을 지닌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느 것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공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정조는 효마저도 절제되어야만 했습니다.
정조를 왕위로 즉위시킨 뒤에 뭔가 시시비비가 불거질 걸 염려하면서 그 할아버지 영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를 왕으로 만들기 전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아닌 그 형 효장 세자에게로 너를 입양 보내고자 한다."
정조는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약속을 합니다.
"저는 앞으로 근본을 두 개로 두지 않겠습니다."
마음에서 사도 세자를 지우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인 겁니다.
여러분 혹시 태정태세 문단세 이거 외우셨죠? 자 그러면 이제 그걸 잘 외우면서 생각해 보세요.
진종 목조 익조 환조라는 임금 이름 혹시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없으실 겁니다.
실제로 임금 역할을 한 것은 아니고, 아들이 임금이 됐을 때,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가 왕이나 왕비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서 이름을 하나 붙여주면서 왕 대접 왕비 대접을 하는 겁니다.
이것을 추숭이라고 해요.
자 그러면 이제 정조는 왕이 됐으니까 자기 아버지 너무 사랑하니까 왕으로 만들어 줄 수 있잖아요.
실제로 정조는 직위 하면서 이렇게 하기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합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하지만 끝까지 사도 세자를 왕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물론 사도세자에게 새 이름을 올립니다. 장헌 세자라는 이름을 올리고 묘를 원으로 승격을 시켜줍니다.
하지만 결코 왕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군주라면 부차 하게 작위를 줘서 아버지를 높이는 것이 효과가 아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정조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군들 자기를 낳아준 어버이를 높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선왕이 제정한 예는 어길 수 없다.
옛말에 이르기를 임금이 뭔데 못 이르겠느냐 하지만 예 법만큼은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했다.
사람이라면 누군들 자기 어버이를 높이고 싶지 않겠느냐 하지만 얘를 어길 수는 없다.
현륭원을 웅장하게 만들고 또 6천 명 이상의 사람을 이끌고 행차를 거행하는 것은 아들로서의 효를 다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세자를 왕으로 올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끝까지 지켜나간 것은 군주로서의 효를 다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조가 인간인 동시에 임금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도 이러한 정조의 절제, 왕의 절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도세자라는 임무를 도구 삼아서 정조를 계속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이 한 단어 무위를 고수했습니다.
어기지 말라 감정이 아닌 예에 따라서 절제하라라는 말을 되새긴 겁니다.
정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아도 예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해서는 안 될 것을 해도 예가 아니다.
자 그럼 이제 우리는 이 말을 되새기면서 지금 우리 사회에는 어떤 형태의 효가 과연 적절한 것일까?
오늘 나에게는 어떤 방식의 효가 요청되고 있을까? 정조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보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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