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고난이 미래의 사명이 된다 | 임현정 피아니스트 @HJLimOfficial | #piano #classic #billboard | 세바시 1610회
5개월 만에 최연소로 수석 졸업 최연소 조기 졸업 최연소 및 조기 수석 한국인 최초 빌보드 클래식 종합 차트 1위.
제가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 거는 피아노를 잘 쳐서 간 게 아니에요.
거기다가 인종차별까지 그때 갑자기 정말 음악이 제 귀에 들리기 시작했어요.
음악의 음 하나하나가 단어 같이 들렸고, 화성 하나하나가 모든 다채로운 그런 변화무쌍한 감정으로 정말 다가왔거든요.
저는 그때 피아니스트가 되어야지 하는 꿈은 그냥 버렸어요.
음악가가 되어야 되겠다.
피아니스트 임현정은 만 12살에 홀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피아노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진짜 음악을 배우고 싶어서였죠.
음악가 집안도 아니었고, 어릴 때는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취미로 시작했습니다.
🏆 최연소 졸업 & 빌보드 1위의 비결
- 프랑스 콤피앤느 음악원 5개월 만에 수석 졸업
- 15살에 루안 국립음악원 조기 졸업
- 파리 국립고등음악원 최연소·조기 수석 졸업
- 한국인 최초 빌보드 클래식 차트 1위
하지만, 그 화려한 성과 이면에는 외국인, 소수자, 그리고 인종차별이라는 벽이 있었습니다.
🧑🎤 "음악이 나의 통역사였다"
프랑스 시골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그는, 동물원 동물을 보는 듯한 시선과 차별을 경험합니다.
어느 날 음악 시간, 선생님이 갑자기 임현정에게 피아노를 쳐보라 하셨고
쇼팽의 흑건을 연주하자 반 아이들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습니다.
"음악이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고,
말로 할 수 없던 감정과 소통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 경험으로 '피아니스트'라는 꿈 대신 진짜 음악가,
음악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 “억압에서 자유로워야 예술가다”
루안 음악원 시절, ‘16살 전엔 리스트 소나타를 칠 수 없다’는 규정에도
몰래 연습하며 스스로 한계를 넘어섰고, 결국에는 학교를 설득해 퇴학 위기까지 겪습니다.
“무대 위에서는 오직 나만이 나를 연주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콩쿠르보다 예술 자체를 선택했고,
결국 베토벤 전곡을 연주하며 EMI 클래식스와 데뷔, 빌보드 1위에 올랐습니다.
✨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개성입니다"
마지막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누군가 차별하거나,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느껴질 때도
우리의 존재의 본질은 꺾을 수 없습니다.
눈송이, 지문처럼 우리는 모두 단 하나뿐인 존재입니다.
개성은 애써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피아니스트 임현정입니다.
만 12살에 홀홀 단신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프랑스 콤피앤느 음악원을 5개월 만에 최연소로 수석 졸업
루원 국립음악원에 입학해서 15살의 나이로 최연소 조기 졸업
바로 1년 뒤에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에 입학해서 최연소 및 조기 수석 졸업
그 후 한국인 최초 빌보드 클래식 종합 차트 1위 그리고 빌보드 역사상 최초로 데뷔 앨범이 클래식 종합 차트 1위
대한민국의 사이 님보다 먼저 빌보드 크래시 차트를 점령한 사람이 바로 저랍니다.
감사합니다.

네 여러분 솔직히 이 프로필 이 양력을 들으셨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사기 캐릭터
그래서 원래부터 그냥 뭐 신동으로 태어나자마자 바로 뭐 거의 피아노와 함께 엄마 뱃속에 있다가 태어나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면서 이렇게 피아노를 공부했을 것 같잖아요.
제가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 거는 피아노를 잘 쳐서 간 게 아니에요.
저희 집안은 이제 음악가 집안도 아닙니다. 음악인은 제가 유일해요.
3살로 돌아갈게요.
제가 만 3살에 피아노를 시작했는데, 사실 저희 어머니께서 그냥 동네 학원에 피아노를 치면은 뇌가 좋아진다.
이 두뇌 양뇌 발달하는데 굉장히 좋다. 해가지고 그냥 피아노 학원에 저를 보냈고
그때 당시에도 피아노 학원에 가는 게 굉장히 유행이었잖아요.
그래서 피아노를 그냥 취미로 쳤고, 뭐 그런 동네 콩쿠르 이런 데 가서 대상 한 번 타 본 적도 없어요.
저희 어머니가 저에게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현정이 너가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더라면 네가 아무리 피아노를 잘 치고 해도 너의 등을 막 떠밀어도 절대 너는 안 갔을 거야.
그 나이에는 동네 슈퍼에도 혼자 못 갈 나이거든.
이 엄마의 말에 모든 진실이 다 담겨 있어요.
제가 결심한 거예요. 제가 부모님께 파리에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이라고 둘 씨 그러고 라벨 생상스 이런 전설적인 작곡가들이 나온 학교인데 그 학교에 나도 한번 들어가 보고 싶다.
이런 클래식 음악을 배우기 위해서는 저는 본토에 가서 배우면 너무 좋다고 생각을 했어요.
사실 우리가 판소리를 만약에 배운다고 생각을 하면 어떤가요?
당연히 외국 사람이 판소리를 배우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 오는 게 좋잖아요.
저희 엄마의 지인 분의 가족분들이 이제 프랑스의 콤피앤라는 도시에, 작은 소도시인데 이제 거기에서 자리를 잡고 계셔서
거기에 홈스테이로 제가 가게 됐습니다.
그 어린 소녀가 어떻게 보면은 아주 거대한 꿈을 품고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저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프랑스는 베르사이유 궁전이었어요.
모든 것이 다 아름다울 것만 같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차 타고 다니고 말 타고 다니고 드레스 입고 다니고 모자 쓰고 다닐 줄 알았는데 전혀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학교에 이제 처음 갔는데 우선 모든 게 다 신비로웠어요.
생긴 것도 다 다르고 지구 반대편에서, 물론 말하는 것도 하나도 이해가 안 갔고요.
그때 당시에 저는 봉주루에 봉자도 발음을 잘 못했어요.
프랑스어 배워놓기 잘했네요 이렇게
근데 이거 제대로 발음하는 데 정말 6개월 열심히 해서 됐는데,
그래서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들리고 이해도 못하겠고 제가 말을 해도 아무도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런데 사실 그것보다 가장 생소하고 힘들었던 거는 그 외국인들이 저를 쳐다보는 눈빛이었어요.
거기 가서는 제가 외국인이잖아요.
외국인이 된다는 거를 그때 제가 처음 느껴봤는데, 한국에 있어서 한국에 있을 때는 제가 전학 한 번 가본 적도 없거든요.
동네 이사 가 본 적도 없고, 외국인이라는 걸 갑자기 느껴보니까
우선 굉장히 신기한 느낌이었는데 거기다가 인종 차별까지 당하게 되고 말았죠.
자 인종 차별이란 무엇이냐 여러분 학교에서 우리 왕따 막 하고 왕따 당하고 그런 적 있잖아요.
그 왕따랑은 또 차원이 다른 겁니다.
제가 이제 처음 살았던 그 꽃피앤이라는 소도시에는 정말 외국인이 거의 저밖에 없을 정도로 흑인 분들도 없었고 아랍인 분들도 없었고 동양인들은 더더욱 없고 전교 중학교 전교에서도 또 저만 동양인이고 막 이러다 보니까
제 눈으로 보기에는 전 국민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저를 동물원에 동물 보듯이 했어요.
그러니까 막 막 싫어서 이렇게 보는 게 아니라 정말 이렇게 하대하는 건데 동물원에 동물 보드 저 이게 되게 신기하다.
제 그런 눈빛을 느끼기 시작하니까 되게 당황스럽더라고요.
그때 어떻게 보면은 제가 직접 극소수 가 되고, 그런 약자가 되다 보니까는
막 더더욱 약자에 대한 공감 이런 게 또 많이 생기고
우리 모두는 다 동등한 인간인데 내가 지구 반대편에서 그냥 태어났다고 피부 색깔만 다르다고 어떻게 나를 이렇게 차별을 하는가
정말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게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를 제가 직접 피부로 느끼게 됐죠.
근데 음악 시간이었어요.
음악 시간에 시에라고 이제 선생님이신데, 모든 여학생들이 좋아하는 잘생긴 선생님이셨는데,
갑자기 선생님 옆에 있는 전자 피아노를 가리키시더니 림 좀 나와서 이거 연주해 봐 이러더라고요.
너무 깜짝 놀랐죠.
그렇게 모든 증오를 막 다 받고 있는 전데 한몸에 증오를 받고 있는 저에게 갑자기 이렇게 피아노를 쳐보라고 하니까
너무 당황스러워서 제가 앉아 있는 그 의자와 전기 피아노까지 이렇게 걸어가는 게 한 3000년은 걸리는 것 같았어요.
뚜벅뚜벅뚜벅 걸어가서 뭐를 연주하지? 하다가 그냥 제일 자신 있는 거 내가 제일 잘 치는 거 쳐보자.
그래서 쇼핑에 흑건을 쳤어요.
되게 이렇게 생동감 있고 발랄하고 어떻게 보면 저를 잘 나타내는
지금 이 친구들이 내가 원래 굉장히 말괄량인데 나의 지금 원래 캐릭터를 정말 모르고 있는 것 같잖아요.
그래서 이걸 한번 쳐보자
그 곡을 치는 순간만큼은 외국인이다 내가 지금 인종차별을 당하고 있다 뭐 이런 거는 다 잊어버리고
그냥 맑고 해맑고 순수하고 걱정 하나 없는 소녀로 되돌아가서 그 그 흑건을 연주를 했죠.
연주가 끝나니까 갑자기 교실에 정적이 흐르는 거예요.
애들이 날 더 싫어하나? 했는데
갑자기 우래와 같은 우리와 같은 박수를 치면서 애들이 저를 축하해 주는 거예요. 막 브라보 브라보 외치면서
그리고 쉬는 시간이 됐는데 갑자기 애들이 막 저랑 친해지고 싶다고, 갑자기 친구가 되고 싶다고, 그때 저는 음악의 힘을 알았어요.
음악이 저의 통역사가 되어줬고
제가 말로 할 수 없고 손발짓을 해도 안 되는 거를 음악이 그 1 2분밖에 안 되는 그 음악이
저와 세상의 다리가 되어 주었고 저의 통역사가 되어 준 거예요.
한국에 있을 때 제가 그렇게 음악을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렇게 언어의 장벽을 느끼면서 사실 내가 지금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음악밖에 없다 보니까는
그때 갑자기 정말 음악이 제 귀에 들리기 시작했어요.
음악의 음 하나하나가 단어 같이 들렸고 화성 하나하나가 모든 다채로운 그런 막 변화무쌍한 감정으로 정말 다가왔거든요.
저는 그때 피아니스트가 되어야지 하는 꿈은 그냥 버렸어요.
음악가가 되어야 되겠다
음악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음악으로 이렇게 세상과 세상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
그런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전진을 했습니다.
루안 국립음악원에 입학을 해서 이제는 그때 언어도 잘 하고 어느 정도 적응도 해서 이제 열심히 음악만 하면 되잖아요.
제가 그때 리스트 소나타를 너무 연주하고 싶었거든요.
리스트 소나타가 30분 정도 되는 곡인데,
교수님이 안 된다. 이거는 16살이 되어야만 칠 수 있다. 거절을 하셨어요.
좀 이렇게 가르치시는 스타일이
'내가 하라는 것만 하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라.'
약간 그런 거 있잖아요.
근데 저는 그 리스트 소나타를 연주하지 않고서는 밥도 못 먹겠고 잠도 안 오고 아무것도 못하겠는 거예요.
이중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수님이 가르치시는 이 수업실의 반대편에 있는 스튜디오에 가서 맨날 연습하고,
아침에 일찍 가서 연습하고 밤늦게까지 연습하고,
이렇게 한 1년 정도 열심히 연습하고 15살이 돼서 제가 선생님한테 선생님 저 이거 이제 리스트 소나타 다 외웠어요.
한번 쳐보겠습니다. 했더니 선생님이
'너 왜 내 말을 거역했어?'
라고 하면서 전혀 기특해 하지 않으신 거예요.
제가 그때 결심을 했죠.
그때 또 마침 제가 루한 국립음악원을 졸업을 한 상태여서 피아노과를 졸업을 했어서 제가 선생님께 가서 선생님 저 휴학하겠습니다. 피아노과를 좀 휴학하고 저 혼자 좀 해보려고 합니다.라고 했죠.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굉장히 이제 노발대발 하시면서, 이제 안 된다 안 된다 이렇게 하시더니
그다음 날 루왕의 영사관이 있었는데 그 한국 영사관에 그 명예 영사님께서 직접 저를 찾아오셨어요.
현정아 너 루안 국립음악원의 교수님이 너 프랑스에서 추방시켜야 된대.
너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거니?
너 왜 선생님이 추방하라 그러는 거니?
뭐 보통 엄청난 범죄를 저질러야 어떤 나라에서 추방을 당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너무 놀라가지고
아 제가 리스트 소나타를 연주했다고 선생님 말을 거역하면서, 그리고 휴학을 한다 그랬는데 선생님이 굉장히 이제 어 굉장히 분노하셨나 보다 그렇게 말씀을 드렸더니, 갸우뚱 갸우뚱하시더라고요.
그다음 날에 학교와 음악원에서 학교 선생님들이랑 음악원 교수님들이 다 모이셔 가지고 회의를 하셨어요.
거기에 저를 이제 불러내더라고요. 수학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저를 불러내는 거예요.
이 엄청나게 큰 이 라운드 테이블에서 너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얘를 퇴학시켜야 된다.
이제 루안 국립음악원 쪽에서는,
음악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무 다행히도 저도 오르가니스트였는데
음악을 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워야 된다. 억압을 받아서는 안 된다.
결국에는 무대 위에 가서는 내가 연주하는 거잖아요.
누가 나의 손을 빌려서 연주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해서 저를 대변해 주셔서 퇴학을 모면하게 되었고, 1년 뒤에 혼자 입시 시험을 이제 준비하게 됐죠.
완전 미운 오리 새끼가 돼서 파리 국립음악원, 꼭 들어가야지 해서 열심히 연습을 하고 해서
루안 국립음악원이 창립된 후 최초로 피아노과에서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을 하게 됐어요.

뭐 그래서 여러 가지 신문에 이제 나오고
그럼 이제 중요한 게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에 갔는데 제 콩쿠르를 해야 되잖아요.
콩쿠르를 해야지 또 이름도 날 거고 뭐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는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 저희 교수님께서는 항상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아 음악은 부기 영화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러면서 이제 많은 제자들한테 제발 좀 너희들 이름 날리려고 뭐 하려고
음악을 이용해서 좀 너희들이 북이 영화를 얻으려고 하지 말아라.
순수하게 예술을 추구해라.
그래서 그냥 저는 19살에 그래 내가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난 콩쿠르는 나가지 않을 거야라고 제 자신에게 다짐했어요.
대신에 콩쿠르에 나가게 되면은 사실 베토벤 소나타 하나 바읍 평균율 프렐류드 하나 두 개만 연주하면 되거든요.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그렇게 할 때 나는 평균율 전곡을 하고, 베토맨 소나타 전곡을 연주하고, 쇼핑 액추도 전곡 라흐마니노프 액추도 전곡을 할 거야.
그렇게 그 수많은 레퍼토리를 10년이라는 시간을 제 자신한테 주고, 정말 순수한 예술을 추구하다 보면은 부귀영화 같은 거는 그냥 덤으로 따라오는 거야.
저 혼자서 정말 열심히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연주하고, 에세이도 쓰고, 분석도 했는데,
어느 클래식 음악계의 가장 전설적인 음반회사죠. EMI 클래식스에서 저에게 데뷔 앨범을 내자고 제안이 왔어요.
사실 스크리아빈과 이제 라벨을 해달라고 그랬는데 제가 역제안을 했죠.
안 된다. 나는 지금 베토벤을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어서 베토벤을 해야 한다.
그거를 했는데 아니 그게 빌보드 차트 1위를 하더라고요.
감사합니다.

콩쿠르는 전혀 생각을 안 하고
그냥 제 예술에만 몰두를 하면서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보여드리려고 제가 외국에서 연주한 영상들을 유튜브에 올렸는데
그 올린 영상들 중에 왕벌의 비행이 있는데 또 그게 갑자기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이제 그게 저를 알려주는 계기가 됐어요.
그래서 정말 인생은 새옹지마구나
정말 순수하게 예술만 추구했더니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결과대로 되지 않았다 할지언정
오히려 그 결과가 내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더 좋은 기회로 나를 이끌어줬다.
지금의 저는 인종차별을 반대하기 위해서
전 세계 어 각종 공연과 강연을 다니고
사실 어 더 이상 음악뿐만 아니라 이런 사회적인 활동도 굉장히 많이 하고 있어요.
그런 공로로 스위스 누셔델의 국제 문화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콩쿠르이나 소수의 클래식이 아니라 대중에게 클래식을 전하기 위해서 이렇게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비록 여러분이 지금은 직업이나 공부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경쟁의 환경에 있다고 하시더라도
혹은 각종 차별이나 이런 불합리한 환경에서 매일 눈물을 흘리고 있는 분들께서 계시다면
여러분
여러분의 존재의 본질까지는 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바로 유일하기 때문이에요.
하늘에서 그렇게 눈송이가 많이 내리는데 그 눈송이의 결정체 현미경으로 보면 그 많은 눈송이 중에 크리스털이라고 그러죠?
크리스탈 그림이 똑같은 게 단 하나도 없대요.
지문도 단 하나도 똑같은 게 없어요.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개성은 추구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냥 우리는 존재한다는 그것 자체로 벌써 개성 그 자체인 거죠.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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