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 이길보라 감독 | 추천 강연 강의 듣기 #장애 #수어 #농인 | 세바시 1645회
'세상에 정말 좋은 소리가 많은데 농인들은 그런 소리를 못 들어서 안타깝네'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과연 상실이자 고통이기만 할까요?
'수나우라 테일러'는 미군과 그 폐기물이 내게 장애를 가져왔다.
"그리고" 나는 내 몸을 사랑한다 그리고 라는 접속사로 입고 있습니다.
상황을 극복하고 오늘도 열심히 살아간다라는 서사를 작가는 거부합니다.
비장애인이 이 장애인의 고통과 상실에만 집중할 때 불편함을 느낍니다.
✅ 강연 요약:
1. 나는 코다입니다
- 농인(청각장애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수어를 1차 언어로 사용하는 ‘코다’ 임을 소개.
- 코다는 농사회와 청사회 두 세계를 오가며 자람 → 자연스럽게 매개자이자 통역자 역할을 하게 됨.
2. “힘들지 않았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반응
- 반복되는 동정과 연민의 시선에 피로함.
- 장애인의 고통만 강조하는 질문에 답하기보다, 긍정적 경험과 자긍심을 더 많이 이야기하기로 결심.
- ‘불쌍한 삶’이라는 서사에 갇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삶의 서사를 쓰는 주체가 되고자 함.
3. 에이블리즘과 오디즘
- 에이블리즘: 비장애 중심주의
- 오디즘: 청인 우월주의
- 사회는 여전히 농인과 그 가족에게 ‘음성 언어를 써야 한다’는 식의 동화 강요를 함.
4. 수나우라 테일러의 이야기
- "미군과 그 폐기물이 내게 장애를 가져왔다 그리고 나는 내 몸을 사랑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닌 '그리고'라는 접속사의 전환을 강조.
- 고통을 인정하되, 그 몸으로 살아가는 가치를 온전히 긍정함.
5. 진정한 공감이란
- “불쌍하네, 안타깝네”는 자기중심적 연민일 뿐.
- 진짜 공감은 ‘나의 위치에서 너의 위치로’ 관점을 이동하는 것.
-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상상력과 이해, 행동으로 이어지는 복합적 감각.
자기소개를 수어로 해서 아마 놀라셨을 텐데요.
저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부모로부터는 수어를 배우고 세상으로부터는 음성 언어를 배우며 자랐습니다.
즉 수어가 1차 언어이자 모어인 것입니다. 이런 아이들을 코다
코다라고 부릅니다.
코다는 칠드런 오브 데프 어덜지의 줄인 말로 농인의 자녀를 일컫는 말입니다.
농인의 자녀 중 90%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인 저 같은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즉, 부모와 다른 감각을 지닌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코다는 이렇게 태생적으로 농인이 살아가는 사회인 농사회와 그리고 청인이 살아가는 청사회 이 두 사회를 오가면서 자랍니다.
그래서 이 두 사회를 잇는 매개자가 되기도 하고요 또 동시에 이 수어와 음성 언어를 통역하는 통역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청인 그리고 비장애인들은 끊임없이 묻습니다.
"농인의 자녀로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제가 지금 만 32살인데요.
과장을 조금 더 보태서 30년이 넘게 이 질문을 듣고 있습니다.
이제는 조금 지겨울 정도입니다.
이 질문은 눈빛과 분위기와 같은 비언어적 요소로 형성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안 봐도 뻔하다는 듯 '아~' 하고 탄식을 하기도 하고요.
어떤 사람은 하면서 혀를 차는 소리(ㅉㅉㅉ)로 이렇게 전달되기도 합니다.
'부모님이 말 못 하는 벙어리구나 정말 이제 안타깝네' 같은 말들이 쏟아지기도 합니다.
장애인과 그의 가정을 향한 동정과 연민입니다.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인데요.
눈을 크게 뜨고 목에 힘을 주어서 '저희 부모님은 농인이고 저는 그의 자녀인 코다입니다'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 자기소개를 하면서 농인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이 이야기꾼의 선천적 자질이라고 굳게 믿고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든다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굳게 믿는다"입니다.
짐작하시다시피 이 농인 청각장애인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을 주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건 늘 불쌍하고 안타깝고 가여운 일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두세 사이에서 태어나고 이 두 세 개 사이를 오가면서 자라는 것이 수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해낼 수 있는 자질이라고 먼저 믿기로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누구도 저의 선천적 배경을 긍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코다로서의 긍정적 경험을 말하면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럼 어렵고 힘든 일은 무엇이었나요?"
"그런 경험은 왜 더 이야기하지 않나요?"
고민에 빠집니다.
당연히 이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장애를 가진 몸으로 살아가는 것과, 그의 자녀가 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 사회 자체가 이 에이블리즘과 오디즘이 만연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에이블리즘(Ableism)은 비장애 중심주의 혹은 장애 차별주의를 일컫는 말이고요
오디즘(Audism)은 청인이 우월하다고 믿고 농인에게 청인처럼 행동해라고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들리지 않는 농인에게 '이제부터 말을 해 봐' 하면서 음성 언어로 소통하라고 하는 행위를 일컷는 말입니다.
이렇게 비장애 중심 음성 언어 중심으로 설계된 이 사회에서 저와 저의 농인 부모는 수용되고 포용되기보다 차별받고 거절당한 경험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만 있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의 인생이 그렇듯, 기쁘고 가슴 벅찰 때도 있고 화가 나고 속상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후자의 경험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눈물을 흘리거나 혀를 차며 동정합니다.
'오늘도 장애인과 장애인의 자녀는 이렇게 어렵고 힘든데도 역경을 이겨내면서 살고 있다'라고 하는 이 장애 극복 서사가 만들어집니다.
그 순간 저와 부모의 삶은 대상화됩니다.
불쌍하기만 한 건 아닌데 불쌍하기만 한 사람이 됩니다.
저의 삶과 인생을 스스로 정의 내리고 이야기함으로써 이 자신의 삶에 서사를 구축할 수 있는 이 주체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기를 택합니다.
대신 부모님이 농인이어서 제가 '코다'여서 더 좋았던 점을 더 크게 말합니다.
에이블리즘과 오디즙을 구축하는 서사로서 저의 경험이 쓰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장애인 중심 사회는 이 장애를 갖는다는 것이 곧 고통이자 상실이라고 표현하고 그렇게 믿습니다.
'세상에 정말 좋은 소리가 많은데 농인들은 그런 소리를 못 들어서 안타깝네' , '음악을 즐길 수 없어서 진짜 슬프겠네'
라고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저는 종종 멈춰 서고 맙니다.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건 과연 상실이자 고통이기만 할까요?
청각 대신 확장되는 이 다른 감각의 세계, 더 넓게 볼 수 있는 세계를 청인들은 미처 상상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지구상의 지면이 아닌 곳, 그러니까 예를 들어 물속이나 혹은 화성에서는 제가 지금 말하는 것처럼 이 음성 언어를 쓸 수 있을까요?
그곳에서는 누가 장애인이 되고 누가 비장애인이 될까요?
작가이자 예술가, 장애 운동가이자 동물 운동가인 수나우라 테일러는 선천성 관절 구분증 장애를 가진 당사자로서 동물이 겪는 억압과 장애인이 겪는 억압을 교차적으로 사유하는 책 이 짐을 끄는 짐승들에서 말합니다.
자신의 이 몸은 미군이 무단 폐기한 여러 독성 물질이 상호작용하여서 만들어낸 혼합물이라고요.
이 수나오라 테일러 작가의 어머니는 이 작가를 임신했을 때 독성 물질로 오염된 수돗물을 모르고 마셨습니다.
그 영향으로 작가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 수나오라 테일러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은 군대와 그로 인한 환경오염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체를 안타까워하고 동정하면서 비판했습니다.
'아... 이렇게 장애인으로 태어나다니' 하면서요.
여기에는 비장애인의 몸이 더 가치가 있고 좋은 몸이고, 장애인의 몸은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은 몸이라는 가치 판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수나우라 테일러는 자신의 몸의 장애를 인정함으로써, 장애를 가진 신체를 창의적인 장으로 만들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장애 당사자로서 이 장애를 가진 몸을 경유하여서 세상을 바라보는 특별하고 창의적인 관점을 가질 수가 있고,
그런 사유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운동가이자 작가, 예술가입니다.
마치 제가 이 농사회와 청사회를 오가면서 자란 코다로서
농인에게는 청인의 관점을 전달하고 청인에게는 농인의 관점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 장애를 가진 몸의 경험을 동정하고 안타까워할 때 수라온라 테일러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군과 그 폐기물이 내게 장애를 가져왔다 그리고 나는 내 몸을 사랑한다."
수나우라 테일러는 이 두 문장을 정확하게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입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이나 역경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장애인 이런 사회적 소수자에게 흔히 붙여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 상황을 극복하고 오늘도 열심히 살아간다 라는 서사를 작가는 거부합니다.
미군과 그 폐기물이 내게 장애를 가져온 것은 맞다.
그리고 내가 내 몸, 장애가 있는 이 몸을 사랑하는 것도 맞다
이 두 문장이 함께 설 수 있음을 작가는 보여줍니다.
고통을 인정하는 것이 이 장애를 경험하는 데서 비롯되는 가치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고 정확하게 씁니다.
저는 이 수나우라 테일러의 말처럼 장애인 스스로가 자신의 고통과 원치 않는 순간들에 대한 소유권을 쥐고 스스로의 서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이 이 장애인의 고통과 상실에만 집중할 때 불편함을 느낍니다.
일상을 살아갈 때마다 종종 멈춰 서게 됩니다.
에이블리즘과 오디즘에 입각한 편협한 사고와 자기중심적 사고를 만날 때면
혹은 그렇다고 의심되는 순간을 마주하면 조금 더 생각하게 됩니다.
수나우라 테일러의 말처럼 단순히 좋거나 나쁜 것으로 치부하기에는 장애는 너무나 복잡합니다.
장애가 있는 몸의 경험은 다층적이며 복합적이고 입체적입니다.
농인 부모와 코다의 경험 역시 그렇습니다.
수어를 사용하는 저희 아버지는 일상 속에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합니다.
특수교육의 한계로 문자 언어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해서 신문이나 책을 읽기 어렵고요.
뉴스를 봐도 수어 통역 화면이 작아서 혹은 통역의 질이 높지 않아서,
혹은 통역이 제공되지 않아서, 무슨 내용인지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다시 태어나도 수어를 사용하고 농문화를 향유하는 농인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세 밭이라는 큰 무대에 섰는데요
이 자리에 적절한 수어 통역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부모님은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말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전히 어머니는 제게 "말하는 사람들이 그러는데 보라가 말을 진짜 잘한다고 칭찬하는데 진짜인지 모르겠어"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좀 복잡한 마음이 듭니다.
그렇지만 저 역시 다시 태어나도 저의 농인 어머니, 아버지의 자녀로 태어날 것입니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청각이라는 감각 대신 더욱더 확장된 시각과 다른 감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농인이고,
코다 역시 그 언어와 문화를 물려받은 존재입니다.
저는 저의 고통과 상실을 단순하고 납작하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제 삶을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제 삶의 서사를 직접 쓰고 싶습니다.
우리는 종종 '고통에 공감한다'라는 착각을 합니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서 '안타깝네' , '힘들겠네', '불쌍하네'라는 연민과 동정의 감정을 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는 공감일까요?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는 공감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늘 이 자리에서 제가 하는 강연을 듣는다고 세상의 모든 것을 갑자기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코다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길보라를 통해서 오늘 이 자리에서 이 코다의 삶과 농인의 삶을 상상해 보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아닌 그리고로 이어지는 문장들을 상상해 보는 일은 가능할 것입니다.
제가 쓴 책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의 문장으로 이 강연을 마치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보고 있는지 타인의 경험과 감각을 상상하며 말하고 있는지 질문한다.
나의 위치가 아닌 너의 위치에서 듣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다르게 생각하고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나의 위치에서 너의 위치로 공감의 관점을 옮겨감으로써 확장되고 깊어지고
그로 인해 복잡하고 다층적이고 동시에 풍요로워질 다양성의 세계로 함께 나아갑시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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