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 중독에서 벗어나는 법 | 이혜성 방송인 | 추천 강연 강의 듣기 | 세바시 1863회
제 친한 친구가 저를 도촬 한 사진인데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문제집을 풀었어요.
그런 행동들이 좀 유난스러워 보였나 봐요.
너 이렇게까지 공부했는데 전교 1등 못하면 쪽팔리겠다.
도나츠를 그 원 플러스 원 두 박스를 사서 앉은자리에서 다 먹고 그랬으니까요.
내가 식탐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공허하고 불안정해서 그런 것 같으니까 이 시기를 조금만 기다려줘요.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이혜성입니다.
요즘 인사이드 아웃 2라는 애니메이션이 진짜 화제더라고요.
혹시 보신 분 있나요? 벌써 보신 분들이 좀 있으시네요.
저도 며칠 전에 진짜 재밌게 보고 왔거든요.
영화에서 주인공이 계속 이런 말을 해요.
나는 충분하지 않아.
나의 존재가 여러모로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
어떤 기준에 못 미칠 때 내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겠죠.
그리고 그 기준이 높을수록 스스로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낄 거예요.
그런데 그 기준은 나 스스로가 정하는 걸까요?
그 기준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요?
오늘은 제가 어린 학생이었을 때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해요.
먼저 저의 중고등학교 시절 하루 일과를 떠올려볼게요.
아침이 밝았어요.
형광등이 환하게 켜진 상태로 책상에서 엎드려서 잠든 제가 피곤해 찌든 상태로 일어납니다.
제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침대를 안 샀거든요.
푹신한 곳에 누워서 자면 못 일어날까 봐 무서웠던 거예요.
이제 등굣길에는 영어 단어를 외우면서 가요.
이렇게 학교에 도착해서 수업을 듣고 토시 하나 안 빠뜨리고 선생님 말씀을 노트에 적어요.
중간에 제가 막 써둔 문구도 있을 거예요.
약간 좀 말투가 강할 수도 있는데 제가 스스로를 계속 가스라이팅을 하면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이제 점심시간이 됐어요.
다른 친구들은 이제 다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면서 밥을 먹는데 저는 계속 공부를 해요.
그리고 이제 급식 줄이 많이 줄었을 때쯤 제가 보고 있던 노트를 그대로 들고 급식 줄을 서요.
제 그런 행동들이 좀 유난스러워 보였나 봐요.
옆에 있던 한 친구가 저를 보더니
'너 이렇게까지 공부했는데 전교 1등 못하면 쪽팔리겠다.'
마음이 아리지만 상처를 곱씹을 시간도 없어요.
그냥 밥을 꾸역꾸역 대충 먹고 앉아서 또 공부를 해요.
식곤증이 올까 봐 무서워서 밥은 최대한 적게 먹었는데 그래도 워낙 잠이 부족하니까 졸리잖아요.
그럼 저는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로 달려갑니다.
목덜미에 찬물을 사정없이 끼얹어요.
이제 학교가 끝나면 버스를 타고 학원을 가는데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문제집을 풀었어요.
제 친한 친구가 저를 도촬 한 사진인데 이 친구가 나중에 싸이월드 올렸더라고요.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새벽 1시에 모든 자습이 끝나요.
저 그때 중학생이었거든요.
그리고 저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반에서 핸드폰이 없는 유일한 학생이었어요.
그때 제가 핸드폰을 안 샀던 이유는 친구들과 만나서 놀지 않는데 친구들과 연락할 그런 이유가 없었던 거죠.
저한테 허용할 수 없는 사치라고 생각을 했어요.
이제 독서실 마감 시간이 새벽 2시인데 그때 이제 가방을 싸서 집에 가죠.
독서실 사장님이
'혜성아 이제 가야 돼.'
새벽 2시에 집에 가면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까요?
저는 그 시간에 팔도 비빔면을 끓여 먹었어요.
그걸 먹고 소화시키는 동안에라도 잠을 안 자고 더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아버지가 제 건강을 좀 걱정하셔서
'새벽 4시 이후에는 무조건 소등이다. 불을 끄고 자야 된다'
이렇게 말씀하셔서 진짜 좀 드라마 장면 같겠지만 이불속에 숨어서 스탠드 조명을 켜고 공부를 한 적도 있어요.
항상 이렇게 불을 켜고 잠들고 입시에 대한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다 보니까 편두통이 가끔 왔었어요.
이제 편두통이 오면 항상 구토 증상이 동반이 됐는데
양호실에 가서 막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저는
'혹시 지금 수업시간에 선생님 하는 말씀 중에 시험에 나오면 어떡하지?'
불안해했어요.
근데 제가 아무리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해도요.
늘 저보다 머리가 좋고 전국권에서 날아다니는 친구들이 있었고,
저는 늘 스스로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쫓기는 마음으로 공부에 매진했어요.
이렇게 저는 결국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을 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박수가 나올 줄 몰랐는데 감사합니다.
입학을 했는데 행복했을까요? 어땠을 것 같으세요?
일단 매일 16시간 동안 의자에 앉아 있느라고 혹사당한 허리와 목을 치료하기 위해 열심히 병원에 다녀야 했고요.
무엇보다도 정신적 공허함이 저를 압도했어요.
내 인생 목표가 정말 대학 입학이었나?
이게 옳은 인생의 목표였나?
그제야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거예요.
그리고 진짜 많이 방황했어요.
난 무엇을 위해 산 거지?
엄마를 위해?
선생님을 위해?
그리고 찾아온 때늦은 사춘기
사춘기라는 표현으로는 그때 그 휘몰아치는 감정들을 다 표현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때 저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필요했어요.
이때까지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모든 걸 걸고 쏟아부을 어떤 목표가 필요했어요.
목표를 정하고 올인해서 달리기 저는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거든요.
근데 입시라는 과제를 끝내고 대학에 들어가니까 아무도 저한테 공부하라는 얘기를 안 하는 거예요.
대신 이제부턴 예뻐야 된대요.
20살이 되니까 갑자기 다들 헬스장을 끊어요.
하이를 신고, 화장을 하고,
한창 방황하던 저의 새로운 목표는 이제 다이어트와 외모 가꾸기가 됐어요.
이렇게 저는 극단적으로 금욕적인 생활을 또 시작해요.
학교에 무염 닭가슴살 한 덩이와 생오이를 싸가지고 다니기 시작했고,
일반식을 먹으면 살찔까 봐 밥 약속도 잡지 못했죠.
그리고 다이어트를 하면서 동시에 무리한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했어요.
정말 공부할 때처럼 독하게 악바리로 운동을 해서
한때 제가 정말 무게를 많이 짊어졌을 때는 양쪽에 100kg짜리 링을 걸고 스쿼트를 한 적이 있었어요.
무릎에 많이 무리가 갔겠죠.
이 체구에 제 모습이 충분히 예쁘지 않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충분하지 않다는 그 느낌.
그렇게 몸무게를 35kg까지 감량을 했는데 말이 안 되잖아요.
이거 지속 가능한 무게가 아니에요.
대학생활을 시작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서 폭식이라는 악연이 찾아와요.
폭식은 또 극단적인 운동으로 이어지곤 했고요.
이 시기에 저는 운동을 한 번 시작하면 줄넘기는 정확히 만 번, 그리고 달리기는 20km씩 해야만 끝을 냈어요.
1시간 48분, 1시간 39분 줄넘기도 비슷하게 걸렸던 것 같아요.
만 개 채우려면 한 1시간 45분.
제가 그 당시에 폭식을 하면 웬만한 성인 남성분들보다 훨씬 많이 먹었어요.
그것도 막 크림치즈 베이글, 생크림 도넛 치즈 케이크 이런 음식들로요.
도넛을 원 플러스 1 두 박스를 사서 앉은자리에서 다 먹고 그랬으니까요.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게 엄마가 이제 저를 걱정하셔서 폭식을 못하게 하니까
제가 방 옷장 속에 덩키도넛 봉지를 숨겨두고 몰래 꺼내 먹다가 갑자기 너무 서러워져서 엉엉 운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날 카페에 가서 엄마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어요.
엄마
엄마가 요즘 나한테 그만 먹고 살 좀 빼라고 잔소리를 하는 이유가
내 건강이 걱정돼서 그렇다는 거 알아요.
근데 내가 그렇게 계속 많이 먹는 이유는
내가 식탐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공허하고 불안정해서 그런 것 같으니까
이 시기를 조금만 기다려줘요.
나도 이렇게 건강을 해치면 안 된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잔소리하지 말고 지켜봐 줘요.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근데 엄마도 그 편지를 받고 좀 슬펐나 봐요.
그래서 엄마가
'엄마는 진심으로 네가 엄마보다 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라고 해주셨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달렸고요.
대학에 가서는 좋은 외모를 갖기 위해 달렸고요.
대학 졸업 시즌에는 KBS 아나운서라는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달렸어요.
이 좋음의 기준은 누가 정했을까요?
그건 제 안에서 온 게 아니었어요.
외부에서 왔죠.
남들이 좋다고 하는 대학, 남들이 좋다고 하는 외모, 남들이 좋다고 하는 직업, 남들이 좋다고 하는 취향
우리는 정말 많은 압박 속에서 살고 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짧고 굵은 성장을 해오면서 고통스럽게 노력하고 견디는 삶을 당연하게 여겨왔잖아요.
우리 부모님들도 다 그렇게 사셨고
그리고 이 좁은 땅덩어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니까 경쟁도 심하고 기준이 참 높아요.
성적은 이 정도 받아야 되고, 취직도 이 정도는 해야 되고,
또 요즘 핫하다는 곳 다녀와서 SNS에 올려야 되고
영어유치원 보내야 되고, 어떤 차를 타야 되고, 어떤 가방을 들어야 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높은 기준 덕분인지 참 뭐든 잘 만드는 것 같아요.
뉴진스 신곡 들을 때마다 그 힙함에 놀라고요.
영화, 드라마도 너무 잘 만들죠.
베이글, 도넛 마치 우리나라 음식인 것처럼 너무 잘 만들어요.
어릴 때부터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 하드코어 트레이닝을 받아서 그런 거일 수 있죠.
근데요.
이렇게 절박하게 목표를 세우고 성취를 하고, 또 목표를 세우고 성취를 하고, 반복이 되다 보니까
너무나도 외롭고 불안했던 시간들이 있거든요.
근데 그런 시간들을 견뎌내면서 스스로 깨달은 순간이 있었어요.
도대체 무엇이 중한디
삶에서 진짜 중요한 가치는 뭘까?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야 될까?
결국 다 먹고살려고 하는 건데, 건강을 잃고 또 행복하지가 않으면 성취만 해나가는 이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리고요.
결국엔 남들이 내 인생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조언하는 그런 말들은 생각보다 중요하지가 않더라고요.
저때만 해도 선생님들이
'야 너네 서울대만 가면 인생이 다 잘 풀리고 성공하고 돈 벌 수 있어'
이런 말씀하셨거든요.
근데 아직 인생을 오래 살지 않은 저도 알겠거든요.
인생이 꼭 그렇지가 않다는 걸요.
행복도 성적순이 아닌데 성공도 성적순이 아니더라고요.
제 주위도 보면 그냥 자기가 잘하고 좋아하는 게 뚜렷했던 친구들, 그게 웹툰이 됐든 유튜브가 됐든
그런 친구들이 돈도 잘 벌고 성공적으로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어요.
우리는 이 사회라는 큰 네트워크 속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동행하는 사회적 존재잖아요.
'전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요'라고 하면 거짓말이에요.
인정중독에서 완전 자유로워지는 건 불가능한 목표일 수 있죠.
근데 저는 이제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을 무시하지 않아요.
그 과정을 천천히 즐기면서 가려고 노력해요.
쉬는 날에도 꽉꽉 스케줄을 채워서 책을 읽고 영어 공부를 했던 제가
가끔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멍 때리는 날도 가지려고 하고요.
친구들과 빵 투어도 많이 다녀요.
가끔은 식탐에 질 때가 있다는 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살이 찌면 또 건강하게 운동하고 건강하게 먹으면 되죠.
마음이 힘들 때마다 제가 스스로에게 돼 내는 말이 있어요.
저희 집 거울 옆에 있는 벽에 붙여놓은 포스트잇이거든요.
나를 평가의 대상으로 만들지 말자. 저는요. 10대 때보다 20대 때가 더 행복했고요.
20대보다 지금이 더 행복해요.
그래서 제가 할머니가 되면 지금보다 얼마나 더 여유가 생기고 현명해질지 너무 기대가 돼요.
여러분들도 점점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를 더 보듬어줄 수 있는 나
그렇게 될 수 있길 기대하며 살아가셨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시 하나를 인용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어린 딸이 당신에게 자신이 예쁘냐고 묻는다면
마치 마룻바닥으로 추락하는 와인잔 같이
당신의 마음은 산산조각 나겠지
당신은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거야.
"당연히 예쁘지. 우리 딸 물어볼 필요도 없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딸아이의 양 어깨를 붙들고는,
심연과도 같은 딸 아이의 눈 속을 들여다보고는 말하겠지.
"예쁠 필요 없단다. 예뻐지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그건 네 의무가 아니란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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