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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1841회 | 그녀들이 공장에 다닌 진짜 이유 | 박송이 KBS청주 PD

그녀들이 공장에 다닌 진짜 이유

 

  • 공순이, 여공, 산업역군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이름이
  • 하늘에 떠 있는 달님에게 간절하게 빌었습니다. 돈도 벌고 양백여상에서 배울 수 있게 해 주세요.
    젊은 여러분들 우리들처럼 그렇게 간절하게 배우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나요?

 

40년 전 그 '소녀들' 관객석에 앉아 강연자PD를 울린 말

 

네 안녕하세요. 

저는 KBS 청주에서 다큐멘터리 만들고 있는 박송희 PD라고 합니다.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가 아직 남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제작자 혹은 창작자의 입장에 서보면 이미 좋은 이야기는 세상에 이미 다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먼저 소재부터가 걱정입니다. 

지역 방송에서 일하는 저로서는 이 한반도에도 새로운 이야기가 부족한데 충북 안에서 충북 도민만을 출연자로 하는 이야기라니?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제게 어떤 돌파구가 있을지 늘 고민하게 됩니다.

저는 얼마 전 약백의 소녀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의 중심 소재는 대농 방식인데요. 

 

대농방직

 

이 대농 방식을 발견하고는 조금 기대해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왜냐하면 대농 방직이 아시아 최대 규모의 방직 공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국도 아니고 아시아 최대 규모의 공장이 청주에 있다니? 하면서 반가웠죠.

습관적으로 다른 다큐에 나온 적이 있나 하고 바로 검색해 봤는데 다행히도 한 번도 없더라고요.

 

대농방직은 청주에서 10 가구 중에 3 가구는 관계가 있다고 할 정도로 청주 시민에게 또 청주 경제에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곳에서 일했던 8천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 역시 잊혀 가고 있었죠.

 

 

그때 그러니까 대농방직이 가열차게 돌아갔던 7,080년대의 사정을 잠시 소환해 보자면 그 힘든 공장에 들어가겠다는 10대 20대 여성들이 줄을 섰다고 합니다.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기도 하고요. 

방직 기계가 워낙 커서 키 제한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발 안에 스티로폼을 넣고 까치발을 들면서까지 들어가고 싶었다고 하시더라고요.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이 공장에 들어가고 싶으셨을까요?

바로 산업체 부설학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백여상

 

당시 여자라는 이유로 또 계집애라는 이유로 학교를 다니지 못한 어린 여성들이 제 발로 찾아왔죠.

 

 

 

졸업장을 따기 위해서 회사에서 있었던 부정한 일들은 모른 척하기도 했습니다.

회사에서 잘리면 학교도 다닐 수 없으니까요. 

사실 제가 여공을 소재로 삼았을 때 상상한 이야기는 따로 있었습니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도 열심히 일하다가 부동한 사용자에 맞서 싸워서 민주화에 기여하고 또 노동권을 사수한 멋진 여성 영웅 이야기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시지 않았나요? 

 

 

우리가 여공 하면 흔히 생각하는 천 개 노조 동일방직 yh무역 사건들이 그런 이야기였죠.

그래서 저는 당시 노동자분들께 찾아가서 파업은 없었는지, 노동조합은 없었는지 또 성희롱 사건은 없었는지 그런 것만 묻고 다녔습니다.

어쩌면 새로운 아직 방송에 한 번도 안 나간 소재를 찾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이번에는 재밌는 이야기 또 자극적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이미 익숙한 기승전결을 쫓아가려고 했던 거죠.

 

하지만 제가 기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고, 그동안 대농 방직이 다큐로 만들어지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그런 실망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짜 여기서 그만 접어야 하나 하면서 고민만 깊어가던 와중에 사전 인터뷰 때 받아놓았던 한 노동자분의 10권의 일기장을 그제야 좀 읽어보게 됐어요.

 

일기장을 열어보다

 

정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쓰셨더라고요. 

대농방직 시절에 일하며 공부하며 기록한 그 시절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수많은 좌절과 또 다짐들이 매일같이 반복되고 있었죠.

 

공장에서 혼난 이야기, 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서 공장 화장실에서 몰래 공부하면서 자책하던 날들, 

가족들에게 월급을 보내느라 빵 하나 마음껏 사 먹지 못한 설움, 

그래도 그 끝에는 견뎌보지 않은 다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기장 구석에 깜지처럼 영어 단어들도 막 쓰여 있더라고요.

 

그 일기장을 넘겨보면서 이런 반성이 먼저 들었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공부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

거기서 생각이 이렇게 이어지더라고요.

그렇다면 이들에게 공부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투쟁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공부는 투쟁이 아니었을까?

 

봉순이라고 또 산업체 출신이라고 업신여기는 바깥세상을 향해서 나도 공부할 수 있고 나도 내 꿈을 꿀 수 있다고 외치는 투쟁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녀들에게는 누구보다 성실히 살았던 하루하루가 투쟁이고 저항이었습니다.

노동자이기 이전에 학생의 정체성을 최우선으로 두고 꿈을 꾸고 미래를 그려나가는 한 명 한 명의 소녀들이 그제야 보였습니다.

네 그래서 결심했죠. 

 

학생의 입장에서 다시 쓰는 '여공' 이야기

 

단 한 번도 학생의 입장으로 쓰인 적이 없는 여공의 이야기를 만들어보자.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니 전에 없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밤샘 근무를 하고서도 저희와 똑같이 수학여행을 가고, 

 

 

이선희의 제희에게 노래를 듣고 남몰래 선생님을 흠모하기도 하고요.

기숙사에 모여서 밤새 수다도 떨고 찬란하기 그지없는 여공들의 학창 시절이 펼쳐졌고,

꿈을 향한 자주적인 태도가 드러났습니다.

 

 

 

지금까지 들으시면서 아마 머릿속에 떠오르는 분들 있으셨을 것 같아요.

제 또래라면 나의 엄마나 이모, 또 70~80년대를 살아오신 분이라면 친했다가 연락이 뜸해진 친구이거나요.

거창하게 얘기했지만 산업체 학교가 전국에 152개 학생 수 7만여 명에 이를 만큼 활성화된 시절도 있었으니 

어쩌면 우리 주위의 평범한 사연들입니다.

 

양백의 소녀들

 

다만 우리 중 그 누구도 먼저 물어보지 않았던 궁금해하지 않았던 이야기입니다.

당신에게 어떤 꿈이 있었는지, 당신의 학창 시절도 역시나 희망차고 아름다웠는지 말입니다.


그동안 주류 역사가 말해왔듯 산업화 성공 신화의 도구로 쓰인 여공이 아니라 

지역사로서 또 여성사로서 그리고 증언사로서 그 시대에 진짜 모습에 더 가까운 역사로 새로 쓸 수 있었습니다.

시대와 자신의 삶을 교차하며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마주해 왔는지, 

그 삶의 딜레마 속에서 어떻게 자신만의 답을 찾아갔는지를 쫓아가면서요.

 

 

 

저는 비로소 저희 출연자였던 '명순', '명옥', '연두', '주원' 님을 비롯한 수많은 양의 소녀들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욕망과 서사와 역사를 가지고 행동해 온 여성이었음을 우리는 이제 압니다.

 

 

 

중꺽마

요한 건 이지 않는 음이라는 말이 한참 화두에 올랐는데요.

시대에 맞서서 또 좌절에 맞서서 자신의 꿈을 꺾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 출연자분이 제게 연락을 주셨습니다. 

다큐멘터리 촬영을 끝내고 과거의 꿈이 되살아나서 얼마 전에 대학교에 입학을 하셨다고 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소녀들의 꿈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기존의 역사에 비겨 말해지지 않은 쪽으로 조금 더 귀 기울여 듣는 것, 

어쩌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돌파구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제 속에 내재된 편견들과도 마주해야 했고요.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한 번에 깨달은 듯이 여기서 얘기했지만, 오랫동안 쌓여온 편견은 순간순간 다시 튀어나와서

그 시절엔 다 그랬던 거 아니야 이게 과연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번지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더 다양한 주인공이 더 다양한 목소리와 더 다양한 메시지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주목받지 못한 곳에서 삶의 주체가 되어준 여성들이, 또 다른 소수자들이 있기에, 아직 숨겨진 이야기가 많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역 방송국의 다큐멘터리 PD로서 그런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을 더 해나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양백의 소녀의 주인공이자 또 제게 영감이 되어주신 출연자분들이 직접 자리해 주셨는데요.

한번 소감을 들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그 시절 지집애로 태어났기 때문에 중학교도 못 가게 되었던 소녀가 새 아이의 할머니가 돼서 서울까지 올라왔습니다. 섭외를 받을 때 정말 망설였어요. 우리가 그 시절에 불렸던 이름은 '공순이', '여공', '산업 역군' 그리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이름이 막 우리 기억 속에 나더라고요. 그래 이제 우리 남편한테 물어봤어요.  '이거를 대농에 대해서 다큐를 찍는다는데 이걸 내가 해야 돼요 말아야 돼요?' 이랬더니 우리 남편이 저한테 용기를 주더라고요. 당신이 그 대농에서의 시절을 부정한다면 당신 지금까지의 인생을 부정할 수밖에 없대요.

'아 그렇게 생각하냐고? 아 그럼 내가 해보겠다고'

 

 


안녕하세요. 저는 옥천에서 올라온 이주원이라고 합니다.

양백을 통해서 굉장히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지금까지 가지고서 제 생활을 하고 제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저한테는 그 양백이 너무너무 소중했었고, 우리들이 묻혔던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안녕하세요. 저는 이명순이고요. 어렸을 때 꿈이 간절한 기자였었거든요. 다행히도 대명이 이라는 학교에 공장에서 그 부설 중학교 고등학교가 있다는 걸 알고 맨발로 쫓아갔어요. 밤중에 그것도 중학교를 23살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래서 시집 결혼해서 30년 만에 14년도에 대학교 졸업을 했습니다. 지금도 끝으로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고 해보고 싶어요. 젊은 여러분들 우리들처럼 그렇게 간절하게 배우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저는 엄마 살려주세요. 너무너무 힘들어요.라고 간절하게 일기를 썼던 김연두입니다. 대농 면접 보러 갈 때 키가 작으면 면접에서 떨어진다는 선생님 말씀에 스티로폼을 발바닥에 맞게 잘라 양발 안에 넣고 신발을 한 치수 크게 빌려 신고 교복 바지를 빌려 입고 면접 보기 전날 밤하늘에 떠 있는 달님에게 간절하게 빌었습니다. 돈도 벌고 양백여상에서 배울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삶의 터전이었던 대농 양백여상 멋진 추억이 될 수 있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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