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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1664회 | 견디는 삶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 박재연 리플러스 인간 연구소 소장

견디는 삶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 관계를 맺는 저희 방식 중에 하나는 절대 참지를 않습니다.
  • 제가 원하는 말을 다 하려고 애를 씁니다. 
  • 그리고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굉장히 파악하려고 애를 씁니다.
  • 왜냐하면 몇 안 되는 인간관계마저 끝낼 수 때문에 그분들의 필요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은 아주 중요하죠.
  • 우리가 해야 된다라는 삶 속에는 나의 감정이나 또 나의 행동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행동들을 하게 됩니다.
  • 우리가 선택한다라고 바꿀 때 무엇이 달라질까라고 보면 세 가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박재연 소장의 견뎌야 하는 삶에서 탈출하는 방법

 

 

네 안녕하세요.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이제 강연 주제가 고독사인데요.
저는 이 고독사 안에서 몇 가지 키워드를 조금 뽑아봤어요.
관계라는 게 있고요. 이라는 게 있고요. 죽음이라는 게 있고 대화라는 거 

이 네 가지의 키워드로 우리가 한번 나눠보려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친구가 제가 이 강연을 준비할 때 고민을 좀 많이 했었거든요.

그런데 자기 직전이었는데 재현아 이 구절 너무 좋지 않아? 하면서 보내준 구절이 있었어요.

요즘에 김 부장 이야기라는 거 많은 분들이 아실 텐데 조직 안에서의 이 꼰대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두 직원의 이야기가 이제 나왔어요.

한 팀원이 자신의 상사에게 이런 말을 해요. "과장님 인생은 한순간이죠. 폼나게 살아야죠"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런데 과장님이 그 얘기를 이렇게 듣더니 "아니지 죽음이 한순간이지 인생은 매일매일이야" 이런 얘기를 남기더라고요.

지금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계시는데요.

아마 이 문장에서 느껴지는 바가 각자의 삶 속에 다 있으실 겁니다.

저도 그랬어요. 

인생은 매일매일이거든요. 

 

 

 

 

여러분은 매일매일의 일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저는 현대인들이 모두가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 핸드폰부터 봐요.

그리고 오늘 해야 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요.

아주 일상에서 여러분이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 지금 딱 하나만 머릿속에 잡아보세요.

예를 들면 아침을 매일 차려야 된다 화가 나도 웃어야 된다 견뎌야 된다. 회사 가기 싫지만 가야 된다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제가 두 번째 질문을 한번 드려보고 싶어요.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것들이 꽉 채워진 일상 중에 여러분 뜻대로 다 되시던가요?

그렇진 않을 거예요. 저도 그래요. 

저도 이제 중년의 나이로 살고 있고 제 생각으로는 이제 제 나이가 인생의 전반 정도는 끝나지 않았을까 이제 후반전으로 돌입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쫓아오고 애쓰고 노력했던 많은 것들을 떠올려보면 그 모든 것들이 저의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았어요.

물론 되어온 것도 지만 되지 않은 것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우리가 삶의 어느 시점에서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저마다의 많은 경험을 하게 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의 많은 경험만큼 많은 상실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분은 사랑하는 사람하고 원치 않지만 이별을 해야 됐을 수도 있고, 

어떤 분은 정말 내 평생 직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곳에서 나와야 되는 경험이 있었어 수도 있고요.

또 어떤 분은 정말 다시 보지 못하는 그곳으로 가족분들을 떠나보내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우리는 예측하지 못하는 많은 사건들 앞에서 때로는 어찌할 줄 모르는 삶을 살아오면서 삶의 어느 시점 저마다 다른 시점에서 이 삶 쪽으로만 바라보던 우리의 관계 속에서 이제 저 멀리 어쩌면 우리하고는 굉장히 멀리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죽음의 관점, 죽음의 방향으로도 눈을 돌리는 시점이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저마다 지금 현재 자기가 놓여진 상황과 위치와 관계를 점검하게 되는데요.

우리가 정말 잘하고 싶었지만 원하는 만큼 이루어내지 못한 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외로움을 느끼고 또 그 외로움을 느낄 때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관계가 진짜 어떠했는가를 돌아보기도 하는 것 같아요.

 

 

이분은 몇 년 전에 저희 교육생으로 만났던 분이었습니다.
이분을 보면서 저의 감정은 첫 번째는 참 훌륭하다라는 생각이었고요. 

이제 두 번째 감정은 안타까운 마음이 조금 들었습니다.

이분이 후회를 다루는 세션에서 이제 자기 이제 가족 이야기를 조금 하셨는데요.

아버지께서 아주 어린 나이에 돌아가시게 됐어요.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우린 이걸 이제 외상적 죽음이다라고 이야기를 하죠.

이제 갑자기 돌아가신 가족들이 이제 장례식을 정신없이 치르고 엄마의 허망한 얼굴을 봤던 기억이 자기가 아주 어렸지만 또렷이 기억난다 그래요.

자기가 그때 무슨 결심을 했냐면 내가 지금부터 우리 엄마를 힘들게 하면 안 되겠구나 우리 어머니를 편안하게 해드려야만 한다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두 번째는 호칭이 바뀌게 되었는데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 어린 나이가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 자녀의 아버지가 되는 그날까지도 어머니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 아이가 잘 자랐어요. 

그리고 자기는 단 한 번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쁜 일로 엄마를 학교에 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더니 무더니 노력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제 이분은 훌륭한 성인이 되셨어요. 

그리고 이제 어머니께서도 어느 순간 죽음의 방향 앞에서 연로하신 상황이 되셨습니다.

병원에 계시는 엄마 옆으로 가서 이분이 이제 어머니 어머니라고 계속 불러왔잖아요.

근데 그날 엄마가 굉장히 몸이 많이 안 좋으셨대요.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너무 다급한 나머지 엄마라고 이렇게 몇 번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그 어머니께서 아들을 이렇게 보시면서 한마디를 힘없게 하더래요.

'아들아 나는 니가 나에게 엄마라고 불러주기를 늘 기다렸다'라고

 

 

여러분 우리가 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은 다르지만 우리가 해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살아갈 때 물론 결과적으로 좋은 것들을 많이 얻기도 하지만 과연 그 과정에서 놓치고 있는 것들은 없었는지 한번 살펴봐야 된다라는 것이죠.

 

 

우리가 해야 된다라는 삶 속에는 두 가지가 존재하는데, 물론 해야 한다라는 그 생각과 더불어서 나의 감정이나 또 나의 행동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행동들을 하게 됩니다.

 

 

저는 아까 그 어머니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여러분 그 어머니께서 과연 이 아들에게 나는 네가 나를 엄마라고 부르기를 원했다라는 말을 그때 처음 하셨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마 수도 없이 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이 왜 그 아드님에게는 그때서야 들렸을까요?

우리가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거나 우리 삶에 어떤 고비가 오게 되면 우리는 누구나 내가 정말 잘 살고 있는가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그때는 그전에는 전혀 들리지 않던 것들도 그 순간이 되면 우리한테 아주 묵직한 말로 들려오게 됩니다.

그래서 같은 말도 어느 시점에 누가 어떻게 나에게 했느냐에 따라서 우리에게는 다르게 그게 들리는 거죠.

 

 

여러분 내가 정말 사랑하는 내 동생이 직장생활을 할 때 어떻게 하기를 바라세요?

내가 정말 사랑하는 내 자녀가 어느 순간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할 때 그 배우자하고의 관계가 어떻기를 바라세요?

내 아이가 자신의 욕구는 다 집어치우고 상대 욕구에 모든 거를 바쳐서 헌신하길 바라십니까?

내가 사랑하는 동생이 조직생활할 때 자신의 욕구 다 집어치우고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 팀의 성과를 위해서만 몸을 굴려서 일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그 대상이 자신의 욕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필요한 것들을 선택하면서 살아가기를, 그렇게 주체적으로 살아가기를 사실은 누구보다 바랍니다.

 

이 어머니께서 그 아들을 그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들아 나는 니가 항상 나에게 엄마라고 편안하게 불러주기를 바랐다'라고 말씀드렸던 그 엄마의 묵직한 사랑을 우리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아까 여러분이 해야 된다라고 생각했었던 하나의 행위가 있으셨을 겁니다.

그것을 추주의 삶으로 우리가 왜 바꿔야 되는지는 두 가지 이유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게 우리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데 너무나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그게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필요한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 아까 해야 한다라는 것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스스로 잠깐 이렇게 자막처럼 띄워보세요.

내가 해야 하는 일, 나는 아침마다 우리 아이의 밥을 차려야 한다.

그런데 그 말을 똑같은 그 말을 지금 잠시 내가 이 행위를 무엇 때문에 하기로 선택한다로 한번 바꿔보는 겁니다.

예를 들면 나는 우리 아이가 건강하게 하루를 살아가길 바라기 때문에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을 선택한다라는 겁니다.

 

인간관계 맺어야 된다가 아니라 나는 내가 좀 더 행복하고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 인간관계를 맺기를 선택한다입니다.

자기계발해야 된다가 아니라 나는 좀 더 의미 있고 성장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자기계발을 선택한다로 한번 바꿔보는 겁니다.

 

 

 

 

우리가 선택한다라고 바꿀 때 무엇이 달라질까라고 보면 세 가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전혀 다른 마음의 동기로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그 일이 정말 내가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되어서 이게 정말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다면 과감하게 포기할 혹은 과감하게 끊어낼 용기를 준다는 겁니다.

세 번째는 그것이 빠져나간 자리에 이제 공간이 생기잖아요.

여유가 생기잖아요. 그럴 때 그곳에 내가 정말 원하는 무언가를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는 겁니다.

 

선택한다라는 거 이것은 우리에게 실로 굉장히 많은 것들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연 선택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여전히 견디고 해야 하는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만약에 여러분 모두가 각자의 삶 안에서 큰 상실을 경험했다면 그래서 내가 정말 잘 살고 있는지 내가 제대로는 살아가고 있는 건지 앞으로 어떻게 정말 살아가야 내가 제대로 사는 건지를 고민하고 계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이 두 가지가 어느 정도의 균형감을 갖고 있는지를 우리는 한번 생각해 봐야 된다라는 거죠.

 

 

 

이게 깨어질 때는 인간이 세 가지의 고립을 경험한다 그래요.

첫 번째는 개인 내적인 고립입니다. 혼란스러워집니다.

내가 잘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무너지면서 마치 절로 쭉 가면 잘 사는 거라고만 믿어왔는데 그게 아닌 거라는 걸 알게 되는 어느 날 우리가 붕괴되면서 이 내면이 굉장히 고립된다는 거예요.

두 번째는 대인관계가 고립됩니다.

내가 애를 쓰고 나를 다 포기하고 이만큼을 잘해줬는데 저 사람이 거기에 대한 감사를 모르거나 더 많은 걸 바라게 되거나 심지어 나를 조종하는 것 같을 때 우리는 대인관계적으로도 무너집니다.

그렇게 되면 실존적인 고립이 이어집니다. 

나라는 한 사람의 삶이 이 정도였던가? 내가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선택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연결이죠.

우리가 해야 된다라는 것을 선택적인 방식으로 바꿔내는 거 이건 자기 자신과의 연결입니다.

내가 무조건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런 필요에 의해서 이런 소망에 의해서 이런 욕구에 의해서 이 일을 하기로 선택한다라는 주체적인 삶으로의 회귀 이게 자기 자신과의 연결이죠.

이것을 위해서 가급적 가능한 방법으로 상대에게 표현해 보는 겁니다.

 

 

 

제 교육생 중에 50대 후반의 한 전무님이 계셨어요.

그런데 이분이 효자손을 구석구석에 좀 두셨습니다.

그런데 그날 여기저기도 효자손이 보이지 않는데 자기 습관이 등을 이렇게 시원하게 긁어야만 좀 하루가 좀 개운했던 거예요.

근데 그다음 날이 교육 날이었었는데 그분이 이제 오시면서 그냥 우스갯소리로 무슨 말씀하셨냐면 효자손이 없어서 등을 못 긁었다는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댁에 아무도 안 계셨냐 그랬더니 아들은 있었다고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아들이 26살이었습니다. 

제가 물었어요. 

"전무님 그런데 왜 아드님한테 가셔서 '아버지 등 좀 긁어다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해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해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왜 표현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그냥 그런 걸 부탁을 하냐는 거예요.

제가 숙제를 내드렸어요.

반드시 오늘 가셔서 효자손을 쓰지 마시고 아들한테 가셔서 '아버지 등 좀 긁어달라'라고 그리고 아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듣고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다음 주에 저희가 이제 8주 과정의 교육이었었는데 그다음 주에 오시더니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선생님 말하길 너무 잘했던 것 같아요. 왜 그러시냐? 그랬더니 등 좀 긁어달라고 그랬더니,

아들이 등을 긁어주면서 자신의 체형에 대해서까지 이야기를 해주시더래요.

아드님이 아버지가 이렇게 몸이 작았는지 몰랐다.

아버지 이렇게 살이 근육이 많이 없어지신 것 같다.

운동을 좀 하셔야 될 것 같다. 

그러면서 아들이랑 어떻게 운동하면 좋은지까지 이야기를 나누셨다는 거죠.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표현해도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표현해 주기를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마지막은 얄롬의 이야기로 좀 해보려고 그래요.

얄롬은 제가 아주 좋아하는 학자이기도 한데요. 심리 치료와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 말미 쪽에 헤르마네스가 거론했었던 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요셉이랑 디온이라는 심리치료사가 있었어요.

양쪽 지역에서 내놓으라 하는 심리치료사였습니다.

요셉이는 아주 젊은 심리치료사였고요. 

아주 명석한 귀를 갖고 있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요셉 앞에 와서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만 해도 마음이 놓이고 편안함을 느끼고 다 힐링되는 아주 매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리고 양 끝에 있었던 이 디온이라는 심리치료사분은 나이가 많은 분이었는데 이분은 굉장히 분석적이고 아주 남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후벼 파서 그것을 치료하고 고치고 아주 리더십이 뛰어난 또 심리치료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시는 분이었어요.

이 두 사람은 라이벌이었습니다. 

몇 년이 흐를 동안 이 각자는 자신의 지역에서 명망을 떨치면서 많은 사람들을 돕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 젊은 요셉의 상담사에게 마음의 병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은 위안을 받았어요.

아무리 그냥 그냥 소설의 한 부분이지만, 인간은 누구도 완전할 수 없구나.

많은 사람들을 돕고 있는 요셉이라는 심리치료사도 결국 마음의 병을 얻어서 나중에는 점차 자기 파괴적인 목소리를 계속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겁이 질린 요셉이 디온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길을 떠납니다.

몇 날 며칠을 걷고 걸어서 중간쯤 다 달았을 때 힘들어서 잠깐 쉬고 있었을 때 한 노인이 그렇게 머물러 앉아 있는 곳을 봅니다.

요셉이 다가가요. 그러면서 그 노인에게 이런 얘기를 합니다.

제가 지금 이런 이런 사연으로 여기를 걷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이 깜짝 놀라면서 "내가 디온이다"라고 얘기를 해요.

당신이 정말 그렇게 어렵고 난 당신의 명성에 대해서 익히 듣고 있었는데 힘들다면 가자. 내가 도와주겠다. 

굉장히 적극적 치료자라고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몇 년 동안은 학생처럼 가르치고 몇 년 동안은 너무 친해져서 두 사람이 동료처럼 지냈다고 합니다.

 

디온이 이제 많이 나이가 들어서 늙어서 병이 들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디온이 요셉을 이렇게 불러요. 그러면서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자네 몇 년 전 나를 중간에서 만났을 때 기억나나? 선생님 제가 그날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날이 제 삶을 완전히 바꾸어준 날입니다.

저는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이렇게 감사함을 표현합니다.

그러자 디온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자네한테 비밀을 하나 말할 게 있었는데 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나도 사실은 너무나 마음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자네를 찾아 자네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떠나서 가고 있는 길이었네.

그런데 중간에 당신을 만나서 이렇게 우리가 함께 지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제가 이 글을 보면서 느꼈던 건 뭐냐 하면 연결입니다.

첫 번째 요셉의 멋진 점은 자신의 필요와 자신을 선택으로 이어냈다는 겁니다.

내가 아프구나, 내가 도움을 원하고 있구나, 도움을 받기를 선택해야겠구나, 디온에게 가야겠구나, 하고 부탁한 겁니다.

 

 

여러분이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선택하는 것, 우리는 그것을 절대로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지난 17년 동안 사람들과 대화 훈련을 하면서 지내왔습니다.

제가 이제 보기에는 사람들이 ENFP인 줄 아는데 저는 INFP입니다.

사실 개인적인 인간관계가 넓지 않아요. 

이렇게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가면 제가 기껏 해봐야 제 개인적인 관계에서 저의 모든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은 5명이 채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냥 만나는 사람만 만나요. 

그런데 제가 그분들 하고 관계를 맺는 저희 방식 중에 하나는 절대 참지를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말을 다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굉장히 파악하려고 애를 씁니다.

왜냐하면 몇 안 되는 인간관계마저 끝낼 수는 없기 때문에, 그분들의 필요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은 아주 중요하죠.

그러나 한 가지의 비밀을 발견했습니다. 

지난 17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오랫동안 깊이 있는 진실된 인간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결코 희생적이지만 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자신이 원하는 욕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타자의 욕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해서 서로의 욕구를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거죠.

얄롬이 저 책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냐면,

살아내지 못한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산 사람일수록 죽음을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이 말을 뒤집어보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살면서 원하는 것들, 필요로 하는 것들,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들을 많이 해볼수록 죽음에 대한 불안은 낮아질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삶이 저는 이렇게 돌이켜보면 많은 것들이 후회가 있었고 많은 아쉬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걸 통해 우리는 배웠고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너무나 감사한 그 경험을 토대로 우리의 미래를 바라볼 때, 그런데 그 미래는 사실은 죽음의 방향이죠.

우리가 그동안 삶의 방향으로만 살아왔다면, 이제 어쩌면 이 나이 어떤 삶의 한 시점으로부터는 죽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게도 됩니다. 그런데 죽음은 마치 태양을 계속 볼 수 없는 것처럼 죽음을 계속 볼 수는 없어요.

그러나 죽음이 있다라는 것은 우리가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인식하면서 오늘 하루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우리가 고민해 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외롭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거 

두 번째는 그 죽음이 더 이상 고독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라는 거 

이 두 가지를 여러분들한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강연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