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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1374회 | 죽음을 마주해야 삶이 우뚝 선다 | 최진석 (사)새말새몸짓 이사장,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죽음을 마주해야 삶이 우뚝 선다

 

 

  • 우리가 내 의지대로 태어나지 못했지만 죽음은 내 의지대로 결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
  • 삶 속에서 갖는 가장 높은 혹은 가장 근원적인 질문은 무엇일까요?

 

 

내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질문은 무엇인가?

 

 

안녕하세요. 

방금 소개받은 최진석입니다. 

저는 오늘 죽음에 관련해서 어떤 이론적인 이야기나 그런 얘기보다는 

그냥 제가 경험하고 또 죽음이 나한테 무엇이었는가? 죽음이 나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를 좀 더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지금의 나로 만든 것 중에 물론 부정적인 것도 있고 허술한 것들도 있지만 

그중에서 긍정적인 빛으로서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든 그 가장 근원적인 힘, 그것은 무엇이었을까?라고 생각해 보니까

그것은 제가 10대 후반부터 겪었던 죽음에 대한 공포였어요.

 

어느 날 제가 시골에서 그 덕석 꽤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건 이제 우리 어머니는 백숙을 쏘지 우리한테 저녁상을 차리시고 계셨고, 나는 이제 그 백숙이 오기 전까지 이렇게 덕석에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었죠.

하늘을 보고 있는데 별똥별이 지더라고요. 

그런데 그 별똥별이 지는 걸 보고 물론 그전에도 많은 별똥별들을 봤죠.

그런데 모르겠어요. 왜 그랬는지,

그날의 그 별똥별은 나한테는 매우 심각한 것을 그래서 별똥별을 보는 순간 그것이 바로 나의 죽음 나의 소멸과 관련돼서 나한테 다가왔어요.

그런데 그때 갑자기 죽는다는 사실이 엄청난 공포로 나한테 다가오는데 그 공포를 감당할 수 없었어요.

우리 어머니께서 백숙을 쏴가지고 그릇에 담아서 이렇게 가지고 오시는데 우리 어머니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 같았어요.

그리고 그날 저녁에 백숙을 한 점도 뜯어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서 며칠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주 힘들게 지냈죠.

 

근데 이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저는 40대 후반까지 약 30년 동안 왔습니다.

그러니까 의식처럼 저녁에 잠을 자려고 누우면 잠이 설이 들라 말라할 때 이 죽음이 의식이 돼요.

그러면 내 체온이 떨어지고 그다음에 심한 공포 빠져서 식은땀을 쫙 흘린 다음에 잠에서 소스라치게 깨고 그러고 나서 옷을 잠옷을 갈아입고 다시 자고 하는 거를 한 삼십 년을 했어요.

 

근데 이 죽음에 대한 그 공포는 나한테 그냥 공포만 준 것이 아니었어요.

내가 죽는다는 사실, 내가 유한하다는 사실 이것을 나한테 항상 알게 해줬어요.

제가 죽음을 통해서 내가 받은 세례는 뭐냐,

유한성 이것을 느끼면서 그 유한성을 궁금해하면서 무한성을 만들어내거나 무한성을 접하려는 노력을 하게 됐어요.

그러니까 이 무한성이라는 건 뭐냐? 헤르만 헤세에도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이다. 

 

자기 자신 이상이라는 것은 현재 자기 자신보다 더 나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적 의미다.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돼야 된다. 

더 나은 내가 되려는 부단한 노력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

이것을 이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 하는 힘을 계속 추적하고 추적하고 추적하고 보니까

아! 내가 어려서부터 가졌던 죽음에 대한 공포, 여기서부터 비롯된 죽음에 대한 인식,

이것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앎이 그렇게 틀린 것 같지가 않아요.

 

우리는 다양한 일을 하면서 삽니다.

그리고 다양한 성공을 합니다. 다양한 실패를 합니다. 

이 모든 과정들을 전부 통합해서 인간이 삶 속에서 갖는 가장 높은 혹은 가장 근원적인 질문은 무엇일까요?

 

저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 뭐냐 어떻게 살 것인가? 또 하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런데 이 삶과 죽음,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이 문은 두 가지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하나의 질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깊이 살피는 사람은 어떻게 죽을지가 답으로 나올 것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살피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이 두 질문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질문 가운데 가장 큰 질문이지만 이 가장 큰 질문은 사실 하나다.

우리가 내일 죽는다고 해봅시다. 내일 죽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오늘 내리는 결정들, 오늘 누리는 삶들이 진실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늘 내리는 결정들이 비윤리적이거나 하찮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요?

내일 죽는다고 생각한 오늘은 나한테 가장 윤리적이고 가장 생산적이고 가장 진실한 결정을 하게 할 것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인간은 자기가 자기한테 분명해져요.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를 궁금해.

이 자기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절대 윤리적인 범위를 벗어나기 어려워요.

진실하지 않기가 어려워요. 

성실하지 않기가 어려워.

이 죽음에 대한 인식, 이것은 자기를 자기로 분명히 드러나게 해 준다.

죽음이 강요하는 인식, 너는 유한하다 하는 이 충격으로부터 어떻게 나를 무한으로 확대할 것인가 하는 어떤 음모를 꾸미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인식할 때 내 삶이 더욱 우뚝 설 수 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아침에 눈을 뜨면 그냥 침대에 누워서 눈 뜨기 전에 중얼거리든지 그냥 속을 외우든지 나는 주문을 외웁니다.

나는 금방 죽는다. 

이걸 주문처럼 외웁니다. 

적어도 하루 중에 최소한 이른 오전까지는 사람이 쩨쩨해지지 않을 수 있어요.

 

삶이 힘든 분들, 길을 잃은 분들, 자기가 왜 사는지 잘 모르겠다는 분들, 

혹은 자기가 왜 사는지에 대해서 자기 자신한테 질문이 제기되지 않는 분들 이런 분들은 죽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죽음을 인식하면 그 안개가 걷히고 자기가 자기를 향해서 걷는 이 길이 분명해질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런 긴 시간 동안의 공포와 인식을 통해서 죽음을 대하는 태도도 나만의 방식을 갖게 됐습니다.

 

 

저는 저희 어머니께서 몇 년 전에 먼저 돌아가시고, 그다음에 이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어머님의 말씀도 있으셨고 또 저도 그거 좋다고 생각을 해서 우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부고를 하지 않습니다.

장례를 다 치르고 나서 사후 부고를 합니다.

당신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던 저희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이제 알려드리는 부고를 합니다.

그리고 저희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저는 그때 상중에 한중 간의 회의가 중국에서 열리는 그런 기간이었어요.

그래서 물론 제가 상중이기 때문에 취소해야 되기도 할 수도 있지만, 저는 삶과 죽음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 죽음을 의미 있게 하고, 죽음이 삶을 삶으로 살려낸다라는 인식을 갖게 됐어요.

그래서 저는 어머니 상 중에도 물론 아버님과 상의해서 제가 중국에 출장을 가서 회의에 참석하고 그리고 돌아와서 또 상을 계속 지내고 해서 6일장을 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뭐냐 사후 부고를 하는 이유는 조문객들을 맞이하느라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서 충분히 슬퍼할 수 없을 수가 있겠더라고요.

가족들끼리 앉아서 한 3일 정도 어머니 아버지를 충분히 기억하고 충분히 슬퍼하고 그리고 충분히 천천히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인간은 어떻게 말하면 경험하는 존재예요. 

경험을 쌓고 경험을 해석하고 거기서 빛을 발견하고 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경험하는 존재로 태어나서 마지막에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에요.

죽음만큼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을 내가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로 완성되는 꿈을 꾼 사람들한테는 가장 큰 도전일 수 있어요.

 

 

우리가 내 의지대로 태어나지 못했지만 죽음은 내 의지대로 결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내 죽음은 내 의지대로 결정하고 싶다. 그 이 야망을 갖게 된 이유는 뭐냐?

저희 아버님이세요. 저희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전 한 8일 전쯤이에요.

8일 전쯤에 유언인 것도 유언도 아니고 뭣도 아닌 한 말씀 남기셨어요.

그게 뭐냐?

"나 이제 그만 먹으련다. 나 이제 그만 먹으련다"

이 말씀 남기시고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8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흔히 말하는 고기를 끊고 가셨어요. 나한테는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그냥 그 이 충격은 그냥 동물적이고, 야만적이고, 감각적인 그런 충격이 아니라 매우 고도로 세련된 지적 충격이었어요.

우리 아버님께서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너 가끔 강의할 때 보니까 죽음도 이야기하더라. 

또 철학에서는 죽음이 중요한 주제지,

나는 죽음에 대해서 철학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죽을 수 있어

너는 어쩔래?"

 

라는 말씀을 하신 것 같아요.

이 말씀은 너도 니 죽음을 네가 결정할 수 있는 정도까지 네 영혼은 승화돼야 된다.

니 지적인 높이는 그 고도까지 도달해야 된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자신은 없지만, 자신 없지만

'죽음을 대하는 내 태도가 그 정도의 지적인 고도에 이를 수 있도록 나는 더 치열하게 살아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

 

우리는 아무 의지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의지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의지 없이 사는 것이 허락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지적으로 승화하고 내 삶을 완성의 길로 계속 끌고 가야 된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가질 수밖에 없는 사명이다.

그런데 이 길은 이 완성의 길은 가장 근본적으로는 자기가 자기를 궁금해할 때만 가능하다.

자기가 자기로 분명할 때만 가능하다. 

그런데 자기를 자기로 분명하게 하는 자극 중에 가장 센 자극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다.

죽음을 피하지 말고 마주해 보자. 

그러면은 우리 삶이 자신만의 고유한 삶으로 우뚝 설 것이다 하는 것이 제 이야기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