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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1373회 | 고졸이었던 내가 69세에 박사학위를 따야했던 이유 | 함정희 함씨네 토종콩식품 대표

고졸이었던 내가 69세에 박사학위를 따야했던 이유

 

 

  • 사람들은 제가 토종 콩에 미친 아줌마를 보고 절대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 바로 대학교로 가기로 제가 결심을 했습니다. 
  • 16년 만에 69세에 드디어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 남편한테 일찍 맞아서 죽을 수도 있었고, 정말 이혼당해서 쫓겨날 수도 있었습니다.
  • 그런데도 제가 아직까지 살아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 사람들한테 좋은 먹거리를 줘야 한다는 신념이 나를 살린 것 같습니다.

 

 

고졸이었던 내가 69세에 박사학위를 따야했던 이유

 

 

함정희

 

 

안녕하세요. 저는 전주에서 함씨네의 토종콩 식품을 하는 함정희입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콩을 좋아했습니다. 

콩을 좋아하니 제 모습이 콩같이 변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도 밥 속에 콩이 없었으면 안 먹었습니다. 잘 안 먹었습니다. 줄 때까지 울었습니다. 

 

 

또한 학교 다닐 때는 도시락 반찬에 콩자반이 없으면 잘 안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제가 결혼할 때가 됐어요. 저도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거든요. 저 공무원을 했습니다. 

그래서 좀 늦게 결혼을 하려고 저는 맘먹었었습니다. 그런데 늦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남편이 중매로 혜성처럼 나타났거든요. 저희 남편이 뭐 하는 집 아들이었냐면요. 두부공장집 아들이래요.

7남매 장남 그때 칠남매 장남한테 결혼 거의 안 했어요.

 

 

근데 저는 평생 두부 먹기 위해서 저는 결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여 가보니까 남편은 너무 출타를 많이 하고 집안일을 좀 소홀히 했어요.

 


그래서 실질적인 운영은 제가 했습니다. 우리 사모 장호가 함박 식품이었어요.

제 이름  남편 성기 해서 함박식품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근데 남편은 왜 여자가 앞에서냐 남자가 먼저 가야 된다고 그래서 남편은 박함을 하자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박함 이상하지 않아요? 그제 우겨서 함박식품이 제가 됐습니다.

 

 

1990년대에 우리나라에는 정말 수입공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수입콩 우리콩보다 엄청 쌌습니다. 정말 많이 쌌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수입콩으로 두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엄청 많은 곳에 납품을 했어요. 학교 급식도 또한 큰 대형마트도 슈퍼마켓도 그래서 직원 10명이 2교대로 근무를 하면서 엄청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리고 수금할 때는 지폐기로 돈을 세면서 했습니다.

그래서 덕분에 저희 남편은 전라북도 수입콩 연식품 조합에 있습니다. 거기에 대표 이사장이 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2001년도에 전주시청 강당에서 우연히 안학수 농학박사님의 강의를 듣게 됐습니다.

그 강의는 수입콩 유자의 콩에 대한 유예 강의를 들었습니다.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수입콩이 그렇게 나쁜 곡인지를 저는 전혀 몰랐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20년 동안에 그런 정말 나쁜 콩을 팔아서 내가 돈을 벌어서 먹고살았는가 정말 양심에 큰 가책을 느꼈고요.

정말 죄책감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콩으로 두부를 하고 청국장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여러분 용기의 진짜 뜻을 아시는지요? 

 

용기란 뜻한 바를 72시간 안에 행동하는 것이 용기라고 합니다.

나는 수입콩 사용을 중단하고 전부 우리콩으로 한다고 제가 선언을 했습니다.

수입콩은 그때 키로에 50kg 한가마니가요. 3만 원이었어요.

우리나라 콩은 50kg 한가마니 25만 원 20만 원 이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제 수입콩을 전부 안 한다고 한다고 하고 선포를 했는데 한 곳이 걸렸습니다.

그곳은 큰 우리나라 대형마트였는데 거기는 계약 기간을 법적으로 정했기 때문에 제가 임의대로 빠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담당 직원을 만나러 갔습니다. 

저희는 앞으로 수입콩을 안 하니 저희 여기 마트에서 퇴출시켜 주시라고 이제 못 한다고 그랬더니 그 담당 직원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당신 좀 이상한 사람 아니냐고 여기를 하려고 들어오려고 줄을 섰는데 당신 발로 나간다고 하냐고 정 나가고 싶으면 자필로 그 사유서를 쓰고 나가래요. 그래서 제가 자필 사유서를 쓰고 나왔습니다. 그때 그 직원이 제 뒤에다 대고 혀를 끌끌 찼습니다.

 

그때 당시에 저희 남편은 수입콩 이사장이었거든요. 이 소리를 듣고 남편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온갖 욕을 하고 저를 정말 구타를 하고 정말 저희 생명까지 위협을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절대 거기에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입콩 상징인 남편의 박 씨를 오히려 띠고 제가 함신의 토종콩 식품으로 회사 이름을 개명을 했습니다.

 

그때가 2001년 10월 21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콩의 꽃말을 아세요?
혹시 콩꽃을 보셨는지요? 제 가슴에 달고 다닙니다.


꼭 오고야 말 행복입니다. 행복이 오는데 꼭 온다는 뜻이 콩꽃이 꽃 말입니다.

콩은 거의 농약을 하지 않습니다. 설령 오염된 땅에 신고 농약을 한두 번 할지라도 콩은 깎지고 입으로 그 오염물질이 다 갑니다. 콩 알맹이는 전 1%도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콩은 또한 스스로 걸음을 만들어서 자라기 때문에 척박한 땅을 옥토로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님들은 농사 안 될 때 콩부터 심었습니다.

콩은 그런 정말 대단한 식물입니다. 

 

제가 수입콩을 배척하고 남편 성씨를 회사에서 떼어내고 토종콩 전도사로 살았습니다.

순수한 우리 콩만 사용하여 정말 가장 좋은 콩으로 만든 여러분 두부 콩물 청국장 드셔보셨나요?

그 맛을 보면 아마 반하실 겁니다. 저같이 

그래서 저는 우리 토종콩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제가 음식점도 제가 운영을 했습니다.

 

 

10년 동안 함신의 밥상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은 사정으로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정말 토종 공격 좋은 것을 알기 때문에 사방팔방으로 알리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제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아요. 

여러분 제 모습이 어떻게 보입니까? 저는 제가 척 봐도 무학의 식당 아줌마로 보입니다.

제가 하도 우리 토종콩 토종콩 하니니까 사람들은 제가 토종콩에 미친 아줌마를 보고 절대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전문가가 돼서 콩 이야기를 해야겠다.

 

저 솔직히 저 고졸입니다. 그래서 저는 바로 대학교로 가기로 제가 결심을 했습니다.

제 나이 52세 05학번으로 전문대학교 식품생명과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제가 이뢰뵈도 05학번 대학생이었습니다. 저 공부 진짜 열심히 했습니다.

두부 만들라, 콩을 만들라, 청국장 만들라, 정말 공부하라 저는 24시간을 48시간으로 늘려 썼습니다.

남편은 허구한 날 저하고 수입콩 섞어서 안 쓴다고 나를 날마다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절대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을 악물고 더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과 수석을 두 번이나 했습니다. 성적 장학금도 두 번 나탔습니다.

나이 먹어서 탄 장학금이 아니라 성적장학금으로 

그래서 2005년도에 전문대학 입학해서 16년 만에 69세에 올해 2월에 드디어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눈물의 박사학위였습니다.

정말 기뻐서 한없이 퍽퍽 울었습니다.

저 이뢰 봬도 69세에 종합 학사학위를 받은 사람입니다.

 

 

박사 논문 제목은 한국인의 건강 관점에서 콩의 영양과 우리 콩의 기원 유전자원에 관한 연구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46살에 생각지도 못한 아이를 제가 낳습니다. 늦둥이를 

그런데 늦둥이가 중학교 들어갈 때쯤 갑자기 쓰러졌어요.

 

 

그래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니 정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청청 벽랑 같은 진짜 결과가 나왔습니다.

당 지수가 1천이 넘었대요. 어쩌면 쇼크사로 죽을 수가 있는데 빨리 병원에 가서 응급처치를 해야 된다고 그래요.

평생 인슐린을 맞고 약물 치료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저는 정말 신께 간절히 참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제가 콩에 미쳐서 우리 콩 살린다고 정말 아이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진짜 혼자 그렇게 아이가 자랐습니다. 

정말 아이만 살려주신다면 제가 아이한테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정말 아이를 잘 돌보겠다고 정말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인슐린도 맞고 약물 치료도 하고 병원 치료를 했습니다.

근데 그렇게 인슐린을 한 번만 잘못 먹고 시간을 놓치면 또 저혈당으로 갑니다.

그러면 혼수상태가 돼요. 그러면 또 생명이 위험해집니다.

근데 이제 너무 많은 주사를 맞고 이렇게 하니까 이제 주사 치를 곳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아이가 이제 절대 병원에 안 간다는 겁니다.

저는 진짜 아이가 병원을 절대 완강히 거부를 해서 어쩔 수 없이 병원 치료를 끊고 식이요법과 정말 운동을 했습니다.

함씨네 밥상에서 했던 정말 다른 사람을 주기 위해서 했던 그 정성 들인 음식을 저는 저희 아한테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정말 특허를 내고 제가 개발했던 진운이 마늘 청국장 환을 한 주먹씩 먹였습니다. 정말 많이 먹였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먹고 나서 엄청난 양의 변을 봅니다. 차츰차츰 건강이 좋아졌습니다. 

정말 눈 시력도 회복이 되고 그래서 저희 아들이 이자 정상이 돼서 1종 면허를 따서 저 운전해서 저를 태우고 다닙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토종콩의 효능과 그 가치를 저는 분명히 이 쥐누니 마늘청장을 정말 더 개발하고 연구해서 세계 식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희 가요 이 토종콩이 너무 비싸거든요. 저는 한 번도 콩밥을 깎아본 적이 없습니다. 

kg에 600원 할 때 저는 8800원 콩을 썼습니다. 

콩만 좋고 정말 좋다면 강원도도 충청도도 강원도 경상도도 다 가서 콩을 구입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좋은 1등급만 썼습니다. 절대 콩값 깎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경쟁에서 완전히 밀립니다. 

오히려 콩값이 제품값보다 항상 비싸서 자금이 없습니다. 콩 자금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정말 적자로 지금 살았는데요.

남편이요 저보고 나라도 못 오고 대기업도 못 오고 네가 사업 사자도 모른 것이 사업한다고 나를 맨날 미쳤다고 저를 두들겼거든요. 정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말 저는 폭언, 구타, 다 때려 부수고 유리 깨서 다 그 제품에다 넣고 석유찌꺼서 불 지른다고 다 하고 다니고 날마다 저를 위협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정말 이러고 살았는데요. 

하루는 남편이 정말 저의 급소를 목을 졸라서 저 또 위협을 가하는 거예요.

그때 남편의 눈빛에서 정말 어떤 무서운 그런 살기를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러고 있다가는 제가 꼭 죽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용기를 냈습니다. 

아들한테 늦둥이 아들이 정말 이렇게 키가 크고 힘이 세거든요.

내가 이러다 맞아 죽을 것 같은데 아빠를 한 번만 묶어줘라.

내가 그만 좀 한번 되게 한번 때리고 싶다 그랬더니 아들이 안 한대요.

어떻게 아버지를 묵냐고 그래? 그러면 나는 죽을 건데, 나 죽어도 괜찮아? 그랬더니

아니 안 돼요. 엄마 죽으면 안 돼요. 그럼 어떻게 할 거예요? 됐어요 제가 아버지 묶으겠습니다.

드디어 디데이를 잡았습니다. 남편을 포박하는데 제가 성공을 했어요.

그래서 아들 보고 좀 나가라고 했어요. 아버지 때리는 거 보면 안 되니까 나가라고

당신 20년 동안 나 때렸으니까 당신도 이 맞는 기분을 알아야 된다 그래갖고 죽으라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제발 그만하라고 저한테 사정을 하는 거예요.

그래 그러면 타협을 하자. 당신 그 장롱 속에 깊이 가지 돈 나 그 돈 줘라, 나 그 콩값이 또 없다 콩을 사야 되니까

그랬더니 남편이 그 감추는 깊은 돈 그때 돈을 돈을 줬어요.

그래서 이제 남편을 이제 풀어줬어요. 저는 지금도 많이 상황이 어렵습니다.

항상 비싼 콩알을 팔아서 쓰니. 근데 저는 절대 포기할 수 없었어요.

20년 동안 그 안 좋은 수익콩으로 많은 사람들 건강을 해친 저는 정말 가해자고 저는 최고의 범죄자입니다.

그 사죄를 해야 되기 때문에 저는 제일 좋은 비싼 것만 써서 했습니다.

저는 아직 자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빨리 하루속히 자립해서 정말 그 사람들한테 좋은 제품으로 그 보상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는 또 꿈을 꾸었습니다. 일본은 나토의 날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콩의 날도 없고 청국장 날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토정공 재단을 설립해서 공익법인을 만들어서 연구하는 그 연구소를 꼭 저는 설립하고 싶습니다.

일부 제가 추진은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독립할 때 33인 독립군이 발족해서 우리가 해방했듯이 우리 토종콩도 발기인 33명을 정말 발족하여서 우리 토종콩을 작업하는 나라가 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콩 작업 10%입니다. 중국의 투유 학자는 개똥쑥으로 노벨 생리학상을 탔습니다. 우리 진운이 콩은 약콩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고 우리가 로열티도 안 준 우리 우리 종자입니다.

이 콩으로 저도 노벨 생리학상 꼭 타고 싶습니다. 그리고 토정공 재단을 통해서 도전하고 싶습니다.

미셸 가이드에서 선전하는 세계적인 음식점에도 도전하고 싶습니다.

별 세 개를 맞으면요. 세계 미식가들이요 관광 목적 관광으로 거기를 온대요.

그래서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정말 남편한테 일찍 맞아서 죽을 수도 있었고, 정말 이혼당해서 쫓겨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 공장은 10번 100번 1000번 망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왜 콩값이 10배 수입이 된 콩갑을 썼었으니까요.

정말 콩 살 돈이 없어서 지난 20년을 허덕이며 하루하루 하루살이 운명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아직까지 살아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사람들한테 좋은 먹거리를 줘야 한다는 신념이 나를 살린 것 같습니다.

나쁜 콩으로 식품을 만들어 팔았던 20년을 정말 속죄합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합니다. 

저는 분명히 정말 사람을 살리는 건강한 우리 토종식품으로 세계 식품을 만들어서 그때 지은 죄를 정말 속죄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제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닥쳐도 저의 후회하거나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아들이 지가 타든 지난달에는 솔직히 지금 급여 줄 수 있는 게 없어가지고 아들이 타고 다닌 차를 팔았습니다.

나이가 많이 슬퍼서 울었습니다. 저도 울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실망하지 않고 저는 우리 토종콩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콩의 꽃말 '꼭 오고야 말 행복'이 우리 모두에게 오기를 바라며 여러분 우리 토종 식품을 우리 목숨을 바치고 우리 혼을 바친 우리 제품을 애용해 주시고 응원해 주신다면 다시 용기를 갖고 또한 열심히 가겠습니다.

여러분 저희 두서없는 말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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