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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1388회 | 젤리가 아니에요, 사랑이에요 | 산만언니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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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리가 아니에요, 사랑이에요

 

 

  • 저 한동안 행복에 대해서 되게 오해하고 살았거든요.
  • 불행이 너무 선명하니까. 서슬 퍼렇게 분명하니까.
  • 행복도 어느 날 막 유리창 깨고 안방으로 밀어닥치는 줄 알았어요.
  •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행복은요

 

 

상품백화점 참사 생존 이후 깨닫게 된 행복의 진짜 의미

 

 

안녕하세요.

저는 "산풍 생존자입니다"라는 책을 쓴 작가 산만 언니입니다.

저는 1995년 여름 부실시공으로 20초 만에 무너져버린 백화점에서 가까스로 살아 나온 생존자입니다.

 

1995년 6월 29일 삼품백화점 참사


당시에 저는 20살의 나이로 지하 1층에서 물품 보관소 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사고를 당했는데요.

건물이 무너진 찰나에 저쪽에서 누가 불러서 걸어가는데 등 뒤로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건물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참사 현장에 살아났는데요. 

꽤 오래도록 그 일 때문에 정신과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고요. 지금도 불안장애로 약을 먹고 있습니다. 

 

그때 저는 불과 1~2초 사이에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었어요.

근데 그 후로 세계관이 완벽하게 바뀌었습니다. 

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고민이라고 해봐야 되게 사소했거든요.

사고를 겪고 나니까 죽음 앞에서 생의 모든 일이 사소해 보이는 거예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이런 일을 왜 할까? 저축은 왜 하지? 대학은 왜 가지?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결혼이라니, 아이라니, 미친 거 아니야? 이런 생각들을 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고는 사람을 가려서 오지 않더라고요.

 

사고는 사람을 가려 오지 않더라고요

 

당시 저하고 같은 공간에 있던 사람들 중에 착한 사람 공부 잘하는 사람, 성공한 사람 교회 다니는 사람 다 있었거든요.

그런데 다들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죽었단 말이에요.

그걸 알게 된 후로는 말 그대로 사는 재미를 완벽하게 잃어버렸습니다.

근데 제가 어디 가서 이런 말 하잖아요. 

그러면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니까 감사하지 않냐? 이런 말하는데,

아니요. 전 달라요. 

저 그전에는 오락실에 가서 막 테트리스 같은 거 해도 재밌고 친구들하고 떡볶이 먹어도 막 신났거든요.

근데 그 후로는 사는 일이 너무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치 추리 소설의 마지막 장을 보고 다시 앞부터 처음부터 읽는 것 같은 느낌,

그러니까 항상 뭘 해도 마음이 공허했어요.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결국 우리 다 죽을 텐데, 이런 생각만 했어요.

그래서 20대를 전부 저는 매일 저 자신을 괴롭히면서 살았던 것 같아요.

친구들하고 신나게 놀고 집에 와서 누워도, 내가 내일 눈을 뜰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매일 했어요.

그리고 사고 이후에는 나 하나 살아가는 게 너무 소중하니까 굉장히 이기적으로 사람 변하더라고요.

 

그렇게 또 근데 나이가 나이다 보니까 이렇게 타인한테 관심이 줄어드는 게 그냥 어른이 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또 그렇게 사는 게 맞다고도 생각했고요.

착하게 산다고 안 죽는 거 아니잖아요.

그러다 끝내 나이 서른에는 상태가 완전히 나빠졌어요.

이런 증상을 전문가들이 롱 텀 PTSD라고 하더라고요.
그 사고 이후 트라우마가 잠복기를 거쳤다가 찾아오는 거죠.

제 경우엔 한 10년 정도가 걸린 것 같아요.



이때 저는 다시 사고를 칩니다. 

매일같이 죽음을 기다리지 말고, 내가 스스로 죽음에게 다가가자 하는 잘못된 생각을 하죠.

지금 여러분께서 보시는 것처럼 실패했습니다. 

다행이죠.

근데 희한하잖아요?

다시 한 번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또 감사하지 않아요. 너무 짜증이 나는 거예요. 

누가 나 살려달랬냐고 왜 나는 나 죽는 거 하나도 못하냐고 막 이렇게 막 소리 질렀어요.

그리고 또 그때 가족들이 이렇게 내 앞에서 막 우는데,

'이게 그렇게까지 슬픈 일인가? 왜 저렇게 울지?'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진짜 마음이 아팠던 거죠. 

그제야 저는 그 자리에서 정신과 환자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진단받고, 저 자신도 인정하게 됐습니다.

당시 상황이 굉장히 심각했어요. 

오랫동안 치료하지 않은 마음 때문에 여러 성격장애 스펙트럼의 복합적인 형성까지 보였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그때부터 치료에 열심히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근데 이 병도 다른 질병하고 다르지 않아요.

약만 잘 먹어서 해결되지 않고요. 건강한 일상생활의 습관을 쌓아나가야 돼요.

 

 

그렇게 저는 새롭게 일상을 하나하나 다시 재조정해 나갔어요.

이렇게 하기까지 물론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무너뜨린 만큼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여전히 회복 중이고요.

 

 

 

근데 이제 그러다 보니까 행복이 너무 궁금한 거예요.

내가 불행은 겪어봐서 아는데, 행복, 도대체 뭐지? 그래서 알아보기로 했어요.

근데 그 무렵 안 해본 게 없습니다. 

해외여행도 가고요. 명품백도 사고 운동도 열심히 해보고 근데 재밌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았어요.

잠깐 기쁘기는 하죠. 근데 지속 가능한 행복감 이런 거는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행복이 뭐지 오래 고민했어요. 

남들은 언제 대체 어떻게 행복하다고 느낄까?

 

 

그러던 때였는데 그 당시에 다니던 회사에서 단체로 근처에 있는 보육원에 자원봉사를 갔어요.

그때 태어나 처음으로 저는 아기를 돌보게 된 거예요.

사실 이전에 저는 굉장히 애들을 안 좋아했어요. 

애들은 시끄럽고, 귀찮고, 불편하고, 더러운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런 제가 덜컥 애기하고 분유를 받아 든 거예요.

난감하죠. 

어떻게 먹여야 될지 모르는 거 봐요. 

타인한테 관심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래서 애기를 이렇게 바닥에 놓고 그 갓난 애를 바닥에 놓고 자 분유 먹어 이렇게 한 거예요.

애가 안 먹죠. 난리가 난 거 울 구불고

그랬더니 이제 옆에 계셨던 어떤 봉사자 한 분이

보다 보다 못해서 얘기를 획책하더니 이렇게 안아가지고 분유를 주더라고요.

그러니까 애가 너무 우유를 잘 먹어요. 

그걸 보고 저 그날 진짜 놀랐어요.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냐면

'아 나 진짜 사람 모르는구나.'

인간에 대해서 이렇게 모르는 사람이 인간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지를 알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구나.

 

그래서 그때부터 거의 매일 시간 날 때마다 보육원으로 뛰어갔어요.

나중엔 제법 능숙하게 이제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됐죠.

여기 아이 키워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멋대로인 아이들 말로 설득하는 거 되게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본능적이니까 애들은 막 몸으로 놀아줘야 된단 말이에요.

그래갖고 애들하고 막 그렇게 이제 놀아줬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상하죠?

내 안에 있던 뾰족뾰족한 마음들하고 세상으로 나 있던 차가운 장벽들이 이렇게 하나둘 좀 허물어지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왜?

아이들 경계 없잖아요.

막 뛰어들어와서, 내 마음에 막 뛰어들어와 가지고 뛰어노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모나고 막 이랬던 마음들이 어느새 좀 말랑말랑 해지더라고요.

제가 아끼는 블라우스에 실크 블라우스에 애들이 막 침을 흘리면서 자도 너무 괜찮고요. 그다음부터는 

흰 바지에다 막 볼펜으로 낙서를 해도 좋은 거예요.

'그래, 야 내가 이런 데 오면서 이렇게 차려입고 온 내가 잘못한 거지 니들이 뭘 알겠어'

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가 조금씩 변화하게 된 거죠.

 

 

 

이때 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요. 

갓난애 때부터 계속 제가 주로 봐왔던 아이예요.

근데 이제 당시 26개월이었는데 '아니야. 싫어. 이거. 저거.' 이렇게 간단하게 단어로 말을 할 수 있었어요.

아이가 그래서 이제 걔 낮잠 잘 때 언제나처럼 제가 노래를 불러줬어요.

그 노래 아시죠? 

'엄마가 섬그늘에... '

근데 애가 갑자기 저한테 노래 부르지 마 이러는 거예요.

그래갖고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했는데 대견하면서 너무 미안한 거예요.

이렇게 노래 싫어하는 애한테 내가 26개월 동안 노래를 불러줬다니.

근데 저 몰랐는데 애들 그때까지 되게 맺혔던 말을 한다면서요.

"밥 국에 말지 마"

이런 말 한대요.

그러니까 얘는 졸려 죽겠는데 제가 노래 불러갖고 짜증 났던 거예요.

그다음부터 노래 안 불러주니까 잘 자더라고요. 

 

 

같은 해 겨울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들 놀이방에 이제 보일러가 안 틀어져 있었는데 애기 하나가 이렇게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어요.

그래서 가서 말했죠. 

"아가 이모가 젤리 줄게 올라가자"

그랬더니

"아니야 젤리 아니야"

애기가 그래요.

"이모가 뭐 줄까 뭐 주면 올라갈래?"

그랬더니 애기가 이렇게 눈을 들었는데 눈물이 이렇게 맺혀 있어요.

그러더니 "안아줘" 이러는 거예요.

저 그때 그 아이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할 수만 있으면 진짜 계속 안아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때 깨달았어요.

나 여태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고 믿었던 게 전부 젤리의 다른 이름들이었구나.

그리고 그런 젤리들은 결코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구나.

그러고 보니까 행복이 뭔지 알겠는 거예요.

행복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니에요.

저 한동안 행복에 대해서 되게 오해하고 살았거든요.

불행이 너무 선명하니까 서슬 퍼렇게 분명하니까 

행복도 어느 날 막 유리창 깨고 안방으로 밀어닥치는 줄 알았어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행복은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죽거나 다치지 않은 상태 아프지 않은 상태예요.

오늘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간 가족들이 전부 무사히 돌아오는 그날 저녁, 

그리고 그렇게 잠드는 밤, 그런 날들, 하루하루, 매일매일,

 

그런 상태가 행복한 날들인 거예요.

바꿔서 말하면 슬프지 않았던 날들 모두가 행복한 날들이었던 거예요.

 

 

저 아이들 만나기 전에 사랑 사랑 되게 우습게 생각했어요.

아니... 사랑하는 사람 대신 감기 하나 알아줄 수 없는 그런 무능함 그딴 거 얻다 써? 이랬어요.

그런데요. 

지금은 아니에요. 

제가 그동안 열심히 남들 미워하고 미움받고 사느라고, 사랑받은 기억도 사랑하는 방법도 잊고 살았던 거예요.

애들보다 보니까요. 

자연스럽게 그간 잊고 있었던 제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데요.

맞아... 나도 이 친구들처럼 세상에 사랑받았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가족은 물론이고요. 

골목 안에 있던 이웃들, 친척들, 학교 선생님들 예뻐해 줬어요.

그리고 제가 어려서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차를 타면요. 그렇게 뒤로 가서 따라온 차를 향해 손을 막 이렇게 흔들었어요.

그럼 다들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열에 아홉은요. 되게 부끄러워하시다가, 이렇게 손 흔들어주세요.

 

그런 기억들이 막 다시 생각이 나는 거예요. 

이런 얘기, 제가 어디 가서 하면 다들 대단하다. 대단한 일 한다. 하시는데요.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우리 남들 도울 때 뭔가 큰일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꼭 무슨 시설에 가서, 정기적인 시간에 봉사를 한다거나, 아니면 큰 기부금을 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예를 들어서 도로 위에 폐지를 가득 싣고 가는 리워커가 있으면, 그 뒤를 재촉하지 않고 속도를 줄이고 조용히 따라가 주는 거 그것도 봉사예요.

그리고 이보다 더 간단한 방법은요. 

뉴스 기사에 악플 안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작은 마음으로도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도와주며 살 수 있어요.

 

그러고 보면 사람들 진짜 모르는 거죠. 

저는 그때 아이들 제가 도와준다고 굳게 믿고 있었거든요.

아니에요. 

아이들이 저를 구원했어요. 

왜냐하면 그 친구들 때문에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됐어요.

그러니까 만약 그때 제가 보육원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았으면 저 어떻게 살았을까요?

아마 평생 저는 나만 아는 이기적인 노인네로 쓸쓸하게 늙어갔을 거예요.

그래서요. 

요즘은 살아있으니까 좋구나. 애들 크는 것도 다 보고 좋네. 이런 생각까지 해요.

 

 

 

얼마 전에 책도 나오고 했으니까 보육원에 이제 수녀님 뵈러 갔거든요.

코로나 때문에 애들 한참 못 봤어요. 

근데 그날 우연히 길에서 그 젤리 아니야 이랬던 친구를 만난 거예요.

그래갖고 너무 반가웠고 얘기를 막 덥석 알아들었어요.

초등학교 1학년인 거예요. 

그래서 저 그때는 막 기저귀 차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우리 누구 언제 이렇게 컸어 이제 형아네 형아."

내가 막 그랬더니 아기가

"이모 나 26kg다"

이래요.

하나도 안 무거워요. 솜처럼 가벼워요.

이걸 어떻게 현상을 말로 할 수 있겠어요?

사랑으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어요. 

 

 

 

저는요. 

누가 저한테 그 사고를 겪고, 보상금 받고 지금 이 나이까지 살래,

아니면 사고 전날 19의 나이로 죽을래?

그러면, 주저하지 않고 열아홉의 나이에 죽는 생을 선택할 거예요.

그만큼 이 일은 쉬운 얘기가 아니에요. 

 

 

 

사람들이 요즘에 물어요. 저한테

"그 고통스러운 산풍 사고의 기억을 떠올리면서까지 왜 책을 썼냐?"

그럼 말해요.

"이런 식의 사회적 참사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고 제발 사람 목숨 앞에서 돈 얘기하지 말라고,

돈보다 언제 어느 순간에도 사람 생명이 먼저라고 그 말하고 싶었었다"고요.

마지막으로 제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부탁 말씀 하나 드릴게요.

이런 식의 사회적 참사를 저희가 사전에 완벽하게 예방할 수 없어요.

하지만 사고가 난 후에는 참사를 겪은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을 시민사회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참사 유가족과 희생자들을 저희가 그들이 조금 오랜 시간 애도를 한다고 해도 여유 있는 시선으로 바라봐줬으면 좋겠어요.
저 26년째 아프거든요. 

그러니까 이들을 혐오하거나 조롱하지 말아 주세요.

이들과 기꺼이 연대해 주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저희 이 좁은 나라에서 함께 모여 사는 이웃이에요. 그렇죠?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더는 같은 고통을 겪는 이가 생기지 않도록, 온몸으로 써내려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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