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바시 1416회 | 일어설 힘조차 없을 때 집중해야 할 일 | 최성희 종로1973 사장 | ‪@baemin_official‬ ‪@baeminsquare‬

일어설 힘조차 없을 때 집중해야 하는 일

 

 

  • 하~도 손님이 없어서요. 식당 앞에 앉아 한숨을 쉬고 있는데, 두 분이 식당 앞을 오시면서 그러더라고요.
  • "여기서 한잔 더 할까?" 말이 끝나자마자 한 분이 "오빠! 여기 더럽게 맛없어 맛없어 맛없어 맛없어 맛없어"라는 거예요.
  • 어찌나 크게 말하던지 그 조용한 골목에 메아리가 ...
  • 10년 동안 보증금 천만 원짜리 월세집에 살았는데요. 최근에 아내에게 차도 사주고 저희 집도 장만했습니다.
  • 저는 때마다 제가 울리는 한순간이 있습니다. 
  • 사람들이 저한테 물어요. "그렇게 힘들었는데 어떻게 버텼니?" 그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요.

 

 

일어설 힘조차 없을 때 집중해야 하는 일

 

 

 

 


반갑습니다. 

춘천에서 종로 1973과 배달 전문점 찜찜집을 운영하고 있는 최성희라고 합니다.

 

 

저와 제 아내는 신용불량자였습니다. 

그래서 쫓겨나고 도망치듯 서울에서 춘천으로 이사를 했어요.

말이 통하는 것 빼고는 이민 간 것과 마찬가지로 낯선 곳이었습니다.

친가 외가 처가 친구들 아무도 없는 곳이었어요. 그곳에서 5년 만에 저희 첫 식당을 개업했습니다.

당시에 학교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던 아내의 월급을 담보로 대출받았어요.

저희 첫 식당은 바로 빈대떡집이었습니다. 

 

종로 빈대떡

 

네 많은 분들이 아시는 프랜차이즈입니다.

저는 음식을 할 줄도 배운 적도 없었거든요. 

뜬금없이 종로빈대떡이라니요? 전통도 있고 그 매장들이 다 잘 되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제 착각이었죠.

참고로 말씀드리면 전국에서 가장 장사하기가 힘든 두 곳 중 한 곳이 춘천이라고 하더라고요.

거의 프랜차이즈 무덤입니다. 

춘천은 사실 낭만의 도시라고 하지만 사실 볼 것도 딱히 없고 거의 공무원, 교육, 군인들 그들의 도시예요.

인구에 비해 식당은 엄청 많아요.

 

춘천 하면 닭갈비잖아요? 여러분들은 춘천 가시면 뭐 드실 건가요?

아마 거의 모든 분들이 닭갈비라고 하실 거예요. 하지만 춘천에 다른 맛있는 먹거리도 많아요.

한 끼는 닭갈비 드시고요. 한 끼는 다른 거 드시길 추천드립니다.

 

어느 날인가 하도 손님이 없어서요. 

식당 앞에 앉아 두 분이 식당 앞을 오시면서 그러더라고요.

"여기서 한 잔 더 할까?" 하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한 분이

"오빠 여기 드럽게 맛없어"라는 거예요.
어찌나 크게 말하던지 그 조용한 골목에 메아리가 더 

"더럽게 맛없어 맛없어 맛없어 맛없어 맛없어..."

그때 그 수치심과 절망감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결국 월세도 못 내고 건물주가 소송하겠다고 하는 상황이었어요.

더 빌릴 돈은 없었고요. 

이러다가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때 생각하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지내다 현수막을 거는 줄로 목을 멜 올가미를 만들고 있더라고요.

 

 

지금 코로나 때문에 모두가 난리입니다. 특히 우리 외식업이 많이 힘드시죠?

저도 꽤 가파른 성장세에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주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울 때일수록 한 발 더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 와중에도 식당을 하나 더 오픈했고요. 

요즘 유행인 간편식 제품도 곧 출시하게 됩니다.

 

박수 한번 주세요. 고래도 춤춘다고 하는데 

 

 

고맙습니다.

참 말하기 힘든 얘기인데요.

신용불량자였어요. 

 

그런데 저 같은 사람도 여기까지 올 수 있더라고요.

딱 한 발짝만 더 떼보자. 한 발 더 떼서 앞으로 가면 한 발 더 떼어보자고 그렇게 한 발 떼기만 열심히 했습니다.

어느 날 아기처럼 걷게 되더라고요. 

물론 아직 느린 걸음이지만 언젠가 100미터 전력 질주를 할 수 있겠죠?

 


 

춘천에 왔을 때 정말 인생이 바닥 같더라고요. 아니 사실은 이제 바닥이겠거니 했는데 지하 1층도 있더라고요. 뭐지?

하는 순간 지하 2층, 3층, 4층 초고속으로 다이빙을 하는데, 아마 인생에 진짜 100m까지는 내려가 봤던 것 같아요.

 

 

이 친구들이 제 아이들이에요. 4남매 

어려운 살림에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아이는 어느새 많이 또 낳았죠?

나라에서 저출산율이라고 해서 낳은 건 아니에요.

정말 사랑해서 낳았기 때문이죠. 

 

 

정말 잘 키웠어요.

어쩔 땐 저보다 어른 같아요.

63세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요즘 너무 보고 싶어요.

이제 이제라도 말씀드리고 싶어요. 고맙다고 아들로 태어나게 해 주셔서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나 신용카드 한 장 딱 한 장 만들기까지 거의 10년이 걸렸어요.

그러기 위해 정말 별거 다 했습니다. 

아침에는 보험설계사로 점심에는 이기를 따러 강원도 험산을 뒤지고 그 인삼에 깔려 있는 녹색 이끼 아시죠?

그거 국내산이고요. 자연산이에요. 제가 밥도 굶어가면서 딴 거예요.

그거 따러 갔다가 정말 죽을 뻔한 적도 있었어요. 

그다음 오후 5시부터 새벽 5시까지 대리운전을 했습니다.

쉬는 날도 없이 명절도 없이 365일 18시간씩 일했어요.

그렇게 일해 피땀 눈물로 만든 돈과 아내의 월급을 담보로 잡힌 돈으로 춘천에서 종로 빈대떡을...

손님한테 많이 혼났어요. 춘천 빈대떡이라고 이름 안 지었다고 미리 말씀드려서 아시죠?

요즘 젊은 친구들 말대로 정말 영끌했는데 다 하늘로 날아간 거죠.

지금은 여유롭게 말씀드리지만 정말 힘들었습니다.

정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첫 식당이 망했다고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간판만 바꿨어요. 상호는 종로 1973.

 

종로 1973

 

이곳은 뭘 파는 곳일까요? 이름만 들어서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뭐 파는 곳인지 

 

 

질문 하나 드릴게요.

여러분은 가장 축복받은 날이 언제인가요?

사람들이 온전히 당신을 사랑해 주고 행복하기만 바라며 축복해 주던 그때요.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누구의 아버지", "가장"

그 많은 날 미친 듯이 살아왔는데 그 많은 날 중에 저는 없더라고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죠.

그때가 제가 태어난 날이더라고요.

 

정작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였지만 사람들이 존재 그 하나만으로 예뻐해 주고 인정해 주던 그날 

저는 여러분들이 자기 자신을 많이 사랑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제가 태어난 해였던 1973년을 붙여서 종로 1973이라고 상호를 바꿨어요.

제 자신을 다시 찾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춘천에서 여전히 종로 1973 더 이상한 이름이 됐다는 걸 알아요.

아마 검색해 보시면 대한민국의 종로 1973은 저희 집 한 군데밖에 없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날은 어머니가 제게 엄청난 유산을 남겨준 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음식에 대한 센스입니다.

 

 

모든 음식을 제가 다 만들었어요. 

메인 음식과 밑반찬 하나까지.

근데 오락 이게 다 맛있는 거예요. 

빈대떡집 시절하고는 완전히 달라진 거죠.

음식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어요. 

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무척이나 좋았거든요.

그 손맛을 물려받은 것 같아요. 

모든 걸 다 바꾸니 매출이 서서히 올라가더라고요.

그래도 저희 여섯 가족이 살기에는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어요.

 

그 힘든 상황에서 잘 되기 시작한 건 공부를 하면서부터입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무엇을 할 것 같나요?

가장 쉽지만 안 하던 일을 하더라고요. 네 저는 책을 펴게 됐습니다.

가장 힘들 때 책을 보고 장사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배민 아카데미 장사 수업도 많이 보고요. 장사에 관련된 강의도 미친 듯이 찾아다녔습니다.

배달 시장이 포화 상태다 레드오션이다라고 말을 하지만, 그것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전 배달만 하는 찜찜찜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는데요.

 


모토가 배달과 포장으로 호사를 누리게 해 드리겠습니다입니다.

코다리찜, 가오리찜, 해물찜의 맛도 차별화하고요.

양도 푸짐하게 남다른 서비스도 드리면서 두 달 만에 점유율 25%를 확보했고요.

찜수 700개, 리뷰만 500개 만들었습니다.

 

찜 찜 찜

 

그리고 지금도 안정적인 매출로 순항 중에 있습니다.

두 가게를 필두로 확장하려고 하고 있고요. 

 


 

너무 가난하고 어려워서 아내랑 싸움도 많이 했어요.

4명의 아이들을 10년 동안 보증금 천만 원짜리 월세집에 살았는데요.

최근에 아내에게 차도 사주고 저희 집도 장만했습니다.

저 장하지 않나요? 

 

 

저도 제가 대견합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지금 장사도 나아지고 형편도 나아지니까 자신감도 생기고 용기도 나지만,

제게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무거움 여기 가슴속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있어요.

 

저희 너무도 착한 4명의 아이들인데요. 

특히 영상 쪽에 공부하고 있는 둘째 아들이 제일 마음 아픕니다.

언제부터인지 잘 먹지도 못해요. 숨 쉬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사회생활을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수많은 병원을 다녀봤지만 병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 아마도 그동안 아빠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못나서 무능력해서 마음에 큰 병을 얻은 게 아닌가...

그래서 진짜 둘째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살려고 해요.

 

 

 

마지막으로 지금 정말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계시는 외식업 사장님들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저도 그 힘든 마음 너무나 잘 알아요. 

지금이 바닥의 끝자락이라고 해도 딱 한 발짝만 더 떼어보세요.

그렇게 한 걸음씩 떼어내어 보시면 언젠가 앞으로 나아갈 자신들을 만나게 되실 거예요.

제 영상을 보고 계실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요즘 안 좋은 뉴스가 많이 나오는데요. 그럴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파요.

한 걸음 더 떼어주세요. 

 

 

 

저는 어려울 때마다 제가 떠올리는 한 순간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한테 물어요. "아 그렇게 힘들었는데 어떻게 버텼니?"

그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요. 

자식 하나 바라보시면서 평생을 궂은 식당 일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가 제게 해준 말인데요.

질풍노도의 어린 시절을 꾸중하고 혼내시면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었어요.

제 눈을 똑바로 보면서 이렇게 말하시더라고요.

"성희야 너는 웃는 게 제일 이뻐."

여러분은 제 웃는 모습이 어떤가요? 

 

 

여기 PD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데 이쁜가요?

감사합니다. 

 

 

 

 

저는 강사가 꿈 중에 하나였어요. 

책도 쓰고 싶어서 나름대로 글 연습도 하고요.

2년 전인가 언제부턴가 강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부터 꿈을 꾸고 계속 두드렸습니다. 

결국 여기 이 자리 세바시까지 왔네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결국 원하고 노력하면 분명히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에 다다를 거예요.

저처럼요. 

힘내시고요. 

포기하지 마세요. 

제발요.

 

기억하세요. 

여러분도 웃는 게 참 예쁘다는 사실을 

그 웃는 모습을 보며 가족들은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