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세 60만 원에 옥탑방에 살고 있었거든요.
- 월급이 200만원 남짓 했으니까 계산기를 막 두드려 보니까 학자금 갚으려면 한 3년에서 5년은 걸리겠더라고요.
- 그래도 갚을까 말까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조금은 도피처 같이 춘천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춘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카페, 감자밭을 운영하고 있는 이미소라고 합니다.
이제 초록창이라고 검색을 하시면 닭갈비뿐 아니라 감자빵이라는 키워드도 같이 볼 수 있는데요.
이런 인기에 힘입어서 얼마 전에는 춘천을 넘어서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 상품으로 선정돼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지금의 감자 맛이 있을 수 있었던 저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에 살 때 저의 모습인데요. 엄청 화려하지 않나요?
패션을 전공했고 서울을 너무 사랑했던 저는 어느 날 치킨 배달도 안 되는 농촌에 와서 살게 됩니다.
바로 감자 농사를 지으셨던 저희 아버지 때문이었는데요.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던 제게 감자를 팔러 오라니 아주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그때 월세 60만 원에 옥탑방에 살고 있었거든요.
월급이 200만 원 남짓했으니까 혼자 사는데 생활비도 들고, 계산기를 막 두드려 보니까 학자금 갚으려면 한 3년에서 5년은 걸리겠더라고요. 그래도 갚을까 말까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별로면 다시 서울 오면 되지 그렇게 먼 것도 아니고, 큰 생각 없이 어떻게 보면 좀 조금은 도피처 같이 춘천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1년이 될 줄 알았는데, 2년이 됐고요. 지금은 6년째 살면서 남편까지 만나서 정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별생각 없이 오게 된 춘천이었는데 아버지를 통해서 마주한 농촌의 현실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엄청 더 심각했어요.
여러분 혹시 20년 전 감자 가격을 알고 계시나요?
강원도에서는 감자로 버스비 내냐고 물어보는 친구들이 있을 정도로 감자는 강원도의 주작목인데요.
저희 동네 할아버지께서는 지나가는 말씀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아이고 어떻게 20년 전 감자 가격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나?
저는 이걸 처음 듣고는 거짓말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니 옛날에 500원인 과자도 2천 원은 줘야 하는데, 그 말을 믿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한국농수산식품유통센터에 제가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검색을 해봤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정말이더라고요.
이 말을 들으면 누군가는 예전보다 지금 훨씬 비싸게 사드시는 분들도 계신다고 반문하실 텐데요.
그 값은 유통사를 거쳐서 부동산비, 물류비, 인건비와 같은 비용이 포함된 금액이고, 농민들이 최초로 넘기는 도매상을 기준으로 했을 때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주 큰 차이가 나지는 않더라고요.
물론 계절이나 시기에 따른 변동폭은 있겠지만, 물가 상승률을 대비했을 때 농산물 가격이 제자리인 것은 확실했습니다.
사실 저희 아버지께서도 감자 농사를 지으셨는데 6년 전쯤 한창 감자 가격이 엄청 폭락했을 때가 있었거든요.
간혹 뉴스에서 보셨을 거예요. 막 감자밭을 갈아엎고, 막 대파밭을 갈아엎는 그런 일들이요.
그런 일들이 저도 뉴스에서는 본 적이 있었는데, 저희의 일이 될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고, 아버지께서는 애지중지 기른 감자들을 다시 밭에 묻으면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면 저도 가슴이 막 갑갑했고 가족들의 속도 타들어갔습니다.
그때 이제 제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고민이 되기 시작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이와 같은 문제를 많이 지적하면서 직거래를 도입한다거나 유통 구조를 개선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저는 닥쳤을 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인터넷 쇼핑몰에서 감자를 구매한다고 대형 마트에 가서 또 구매를 할까?
대형마트에서 감자 사 먹는다고 또 오일장에 갔을 때 감자를 사 먹을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자는 사 먹는 양은 그대로 정해져 있겠다. 수요를 창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감자를 소비할 수 있는 다양한 시도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감자와의 전쟁이 시작됐어요.
감자로 분말을 만들어보기도 했고요. 즙을 내려보기도 했고,
고구마 감자를 넣은 빵에 마늘 소스를 묻혀서 줄여서 고감마 빵을 개발해보기도 했고,
춘천이니까 닭갈비를 넣어서 감자 닭갈비 파이를 만들어보기도 했습니다.
저의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아버지께서 보시더니 지나가는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미소야 감자를 꽉 채워가지고 감자 모양으로 감자빵을 만들어보면 어때?
왜 지나가면 이렇게 봉지에 3% 넣고 10% 넣고 무슨 빵입니다.
이렇게 하는 거 말고, 정말 감자를 가득 넣어가지고'
그러게? 감자 모양으로 감자 본연에 집중하고 감자 함량을 최대한으로 올려서 감자빵을 만들면 어떨까 왜 쪼갰을 때 밀가루가 발효돼서 공기가 들어가 있는 거 말고 정말 감자만 잔뜩 들어간 농산물 빵 새로운 카테고리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 졌어요.
그때 인연이 된 홍상기 셰프님과 레시피 개발을 통해서 지금의 감자빵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감자빵을 드시기 위해서 지금은 전국에서 많은 분들이 저희 감자밭으로 찾아오시고요.
감자밭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잊혀간 노래들이 중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감자빵의 인기가 늘어나면서 감자의 수요가 같이 늘어나니 농가의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할 수 있게 되었고요.
작년에는 작지만 100톤, 올해는 500톤 이상의 새로운 소비를 창출하게 되었어요.
새로운 소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저희가 농산물을 저렴한 가격이 아니고 적절한 가격으로 구매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계약 재배를 하는 농가는 오랜 기간 동안 대기업 한 곳과 거래를 했었는데 저희가 거래에 참여하게 되면서 경쟁이 되어서 작게는 10%, 많게는 30% 이상도 더 감자값을 받게 되었고요.
이렇게 감자만 바라보면서 감자와 동고동락하면서 정말 다양한 감자들을 만날 수가 있었어요.
빨갛고 노랗고 파랗고 컬러 감자부터
고구마처럼 생기고 생강처럼 생긴 정말 다양한 품종의 감자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해외에서는 이런 다양한 품종의 감자들을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흰 감자 말고는 찾기 어렵다는 게 좀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알고 봤더니 IMF 때 국내 대형 종자 회사들이 해외에 많이 매각이 되어서 흔히 우리네 식탁에 오르는 버섯이나 키위 이런 많은 농작물들이 종자를 사용하면서 사용료를 지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가지 품종으로 획일화되어 있으면 병이나 재해로 인해서 멸종될 수도 있다고 과학자들이 경고할 정도로 품종의 다양성은 측량 주권의 중요한 척도이기도 한데요.
획일화된 종자밖에 없는 시대에서 먹거리가 보장받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가 두려워하는 유전자 변형 작물을 생산해야 될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감자빵에도 다양한 품종을 사용하는데요.
로즈 홍감자, 두백,
청강, 고구마 감자 등 여러 가지 품종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종자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감자밭은 감자빵뿐 아니라 꽃밭도 참 인기가 많아요.
대부분의 꽃밭에는 꺾지 마세요 들어가지 마세요라고 적혀 있지만 저희 꽃밭에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꽃 따로 오는 밭 줄여서 꽃따밭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이렇게 체험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거든요.
저희 꽃밭에는 평소에 주변에서 보기 힘든 다양한 품종의 꽃을 심어두었어요.
일반적으로 알고 계시는 속 안이 검은색이고 잎이 노란 해바라기뿐 아니라 고우가 사랑했던 노란 해바라기, 테디베어 해바라기라든지 레몬, 더스트 해바라기 등 다양한 품종이 심겨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다양한 품종의 씨앗을 공수하려면 돈도 많이 좀 들고 품도 많이 드는 일인데, 그럼에도 다양한 품종의 꽃을 심는 이유는 품종의 다양성을 중요성을 많은 분들에게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품종을 지켜야 합니다.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예쁜 꽃은 처음 보는데 해바라기라니 되게 신기하다."
아니면
"빵은 이렇게 맛있는데 왜 내가 알고 있는 감자에는 이런 맛이 나지 않지?"
이런 스스로 질문하는 것에서 통하는 배움, 그리고 새로운 경험으로 더 자연스럽고 가깝게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농촌은 위기인데요.
사람들이 더 이상 농촌에 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제가 여기서 발견한 마지막 문제는 농촌의 낙후된 이미지와 선입견이 만연하다는 점이었습니다.
흔히들 농업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낡음, 불편함, 투박함, 할머니 할아버지 등을 떠올립니다.
5천만 인구 중에 절반 이상이 서울 경기에 몰려 산다고 해요.
동물들도 면적당 동물 개체 밀도를 높이니까 자연적으로 번식 활동을 중단하는 아주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과학자들은 추측하더라고요.
저는 저출산 실업률, 지방 소멸, 노인 자살률 증가라든지 부동산 투기 문제가 어떻게 보면 서울에 몰려 살고 싶어 하는 이런 귀한 현상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혈압이나 당뇨, 고지혈증, 뇌졸중 등 사실은 이런 다양한 병들이 비만이라는 한 가지 원인에서 기인하듯
전국 절반 이상이 서울에서의 삶만을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지금의 사회 현상이 다른 여타 문제의 시발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농촌에 터를 잡고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경험과 기회를 제공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농촌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것이 인식을 전환하는 것이 어쩌면 이 고리를 끊는 첫 번째 단계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도시와 농촌을 연결하는 것, 작게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연결이자 작지만 큰 발걸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음료를 개발할 때 제품에 농부님들의 이름을 넣는데요.
오창원 농부의 블랙커런트 에이드, 곽정토 농부의 청귤에이드, 여기 농부의 자두에이드 등을 매장에 오시면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작물과 농부에 관련된 이야기도 만날 수 있고요.
찾아오신 분들은 점점 농부 한 분 한 분의 이야기에 그리고 저희의 이야기에 관심과 응원을 보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농촌의 아름다움을 보여드리고자 파격적인 시도를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바로 제 결혼식 날이에요. 누군가 저한테 가장 행복했던 날이 언제냐고 물는다면 저는 늘 결혼식 날이라고 대답할 만큼 저에겐 정말 아름다운 날이었는데요.
제 남편은 양구에서 이름 좀 날리는 유기농 사과 농사를 짓는 농부입니다.
감자밭을 시작하게 되면서 사과 농사를 잠깐 미뤄두고 감자 농사를 도와주기 시작했어요.
감자밭에서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커다란 샹들리에와 화려한 버진로드 대신에 자연의 소재들로 공간을 채워나갔습니다.
외국산 웨딩카 대신 국산 트랙터를 직접 흰색으로 도색을 해서 탔고요.
하객들을 위한 음료와 술은 얼음과 함께 수레에 비치해 두었습니다.
저희 결혼식을 보고 감자밭에서 결혼하고 싶다는 커플들이 꽤나 많았는데요.
농촌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보여드렸다는 의미 같아서 정말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1억이 넘는 감자 수십 톤을 어쩔 수 없이 폐기해야 될 때도 있었고,
하루 매출이 8만 원밖에 나오지 않아서 좌절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를 돌아보면,
제가 발견한 농촌 문제가 외면하기에는 너무나도 명확했고, 누군가는 기필코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경험도 없이 처음 장사라는 것을 시작하면서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운영을 하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같은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이 장사라는 것이 외식업이라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구나.
그럼에도 제가 감히 이렇게 많은 경험이 많으신 분들, 사장님 사이에서 운이 참 좋게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각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남편과 둘이서 시작했던 매장에서는 이제는 이렇게나 많은 친구들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한국농수산대학교를 졸업해서 곶감 농사, 쌀농사를 짓다가 이제는 함께 일하게 된 농부 친구들도 있고요.
저와 같이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함께 춘천에 정착하게 된 친구들도 있습니다.
모두 농촌 문제에 대해서 누구보다 공감하고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본 친구들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헤쳐온 모든 일들은 저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하는 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지금도 저처럼 부모님이 농사를 짓거나 도시에서 지방으로 내려와서 외식업에 도전하는 청년분들이 참 많은데요.
제 경험이 절대 답이 될 수 없고 조언을 해드리기에도 참 제 경험이 풍족하지는 않지만
대단한 메시지가 아니라 힘내라는 할 수 있다는 응원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