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이날 저도 큰맘 먹고 놀이공원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간이식을 진행해야 한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 기증자가 있는 병원으로 서둘러 달려갔는데, 그 병원의 코디네이터가 장기구득 수술을 자정을 넘겨서 시작해 달라고 하더군요. 분위기가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들었던 코디네이터의 답변은 지금까지 잊히지가 않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간이식을 하고 있는 홍근이라고 합니다.
최근 종영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잘 보셨나요?
조정석 씨의 역할인 이익진 교수를 제가 자문했는데요.
제가 바로 현실 속에 이익준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춤을 잘 추거나 밴드를 결성한 건 아닙니다.
드라마를 보셨다면 다들 어린이날 에피소드를 기억하실 텐데요.
드라마에서 이익준 교수는 어린이날 불의의 사고를 당해 기증하게 된 환자의 어린아이를 배려하면서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 에피소드가 제 경험을 바탕으로 했던 이야기고 사실 제 자신을 변화시킨 중요한 경험이기도 합니다.
당시에 저는 정신없이 환자를 보고, 수술하고, 뇌사자가 생기면 다른 병원에 장기 구득하러 다니던 펠로우 시절이었는데요.
바쁘게 지내던 어느 어린이날, 저도 큰마음 먹고 제 쌍둥이 딸들과 함께 놀이공원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희 환자가 마침 뇌사자로부터 장기 기증을 받게 돼서 간이식을 진행해야 한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결국 저는 아이들과 더 놀아주지도 못하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병원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저희 구독팀은 기증자가 있는 병원으로 서둘러 달려갔는데 이상하게 장기 적출 시간이 자꾸 늦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의 코디네이터가 장기 구득 수술을 자정을 넘겨서 시작해 달라고 하더군요.
솔직히 모처럼의 어린이날을 이렇게 보낸 것도 짜증 났고, 수술방에 있는 의료진 대부분이 저와 같은 입장이었으니까 분위기가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저희 병원은 제가 빨리 구득해서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고요.
그런데 당시 들었던 코디네이터의 답변은 지금까지 잊히지가 않습니다.
이 환자에게는 어린 아이들이 있는데 만약 어린이날인 오늘 수술을 하면 매년 어린이날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그 아이들이 떠올리게 될 거라고
그래서 어머니가 자정을 넘겨 수술해 달라고 특별히 부탁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 순간 수술방 전체가 숙연해졌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초심을 잃고 정신없이 수술만 해왔던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힘드니까 기증자를 빨리 수술해야만 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했는데,
이들 기증자들에게도 각자 사연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날 밤 간구득 수술을 마치고 수술방을 나오는데, 그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수술장 밖에서 오열하고 있는 가족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얘기를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작가가 처음 찾아왔던 날 했었고요.
작가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 얘기를 들었고, 이것이 드라마 <슬의생>에서 장기 이식이 메인 테마로 정해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어린이날 이후 저는 환자의 입장을 좀 더 이해하려고 했고, 보호자와 더 많이 얘기하려고 했고요.
그들의 사정을 최대한 배려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죽음을 앞둔 환자들은 정말로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점차 환자들과 가까워질수록 그들이 이식 후 잘 회복되면 같이 기뻐했고,
이식을 받지 못해 돌아가시거나, 이식을 받고도 합병증으로 고생할 때에는 같이 마음 아파했습니다.
이 사진은 저희 병원 간이식 환자들과 간이식에 연관된 여러 직종의 의료진들이 같이 청계산과 남산을 올라갔을 때 찍었던 사진입니다.
장기 이식을 통해서 이렇게 환자들은 일반인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건강한 이전의 삶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결과를 볼 때보다는 안타까울 때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슬의생>을 잠시 떠올려 볼까요?
심장이식을 기다리던 한 아이가 있었고 후회에 또 다른 아이도 심장이식을 기다리게 됩니다.
사진에서 보이듯 나중에 등록한 아이 엄마에게 오늘 뇌사자로부터 기증을 받게 돼서 심장이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울먹입니다.
같이 밥을 먹고 있던 다른 아이의 엄마는 같이 기뻐하지만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가는 그 뒷모습만 하염없이 보게 됩니다.
정말 안타까운 상황이었죠.
하지만 마음씨 좋은 작가는 결국 두 번째 아이도 심장 이식을 받게 해 주면서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최근에 저희 병원에도 2명의 간이식 대기자가 있었습니다.
간이 망가지면 다른 장기도 같이 망가지는 그런 다장기 부전 상태로 가기 때문에 예우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때때로 저는 보호자들에게 지금 이식을 받지 못하면 이틀 정도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얘기를 가끔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뇌사자를 기다리는 것은 보호자에게는 정말 피가 마르는 일입니다.
드라마에서는 두 아이 모두 심장을 받게 되는 해피 엔딩이었죠?
하지만 현실 속 재해 환자들은 당시에 뇌사자 기증이 없어서 결국 두 분 모두 사망하셨습니다.
이는 뇌사 기증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망자의 2% 정도가 뇌사자가 되는데요.
의학적으로 기증 가능한 경우이면서 가족의 동의를 통해 기증까지 이루어지는 경우는 극소수로 연간 400여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기증자 1명당 3.3개의 장기를 기증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한 해에 3만 6천 명이나 장기 기증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정말 기증자가 부족한 상황입니다.
현실은 해피엔딩이 되기 어렵겠죠.
이것이 우리가 장기 이식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고요.
우리가 장기 이식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장기 이식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변에는 장기를 이식받은 분이나 기증을 하신 분이 있으신가요?
몇 년 전 반갑게 연락이 닿았던 의대 후배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간암으로 진단받고 치료 중에 결국 남동생이 아버지에게 간을 기증했고 지금은 잘 지내신다고요.
그 후배는 자기 가족이 그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하더군요.
제 제자 중 한 명은 가까운 친척이 간이식을 받았고 저희 병원 직원의 아버지도 간이식을 받았습니다.
어떤 직원은 본인이 신장 이식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장기 이식을 받은 환자는 대략 5만 명 정도입니다.
기증을 기다리는 환자가 연간 3만 6천 명 정도니까 장기 이식과 관련된 분은 매우 많아서 여러분 주변에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고령화 사회에서 만성 질환에 걸릴 확률은 급격히 상승하기 때문에
여러분도 환자가 될 수도 있고, 여러분 가족이나 친척, 친구, 이웃이 간절히 장기기증을 기다리는 환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생체 이식 수술도 잘한다던데 기증자가 부족하면 가족이나 지인이 기증하면 되는 거지 뭐 걱정할 일인가?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죠.
실제로 우리의 정서는 죽어가는 가족을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결국 목숨을 걸고 직접 장기를 기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간이식의 경우에는 작년에 1,600명 정도가 간이식을 받았고요.
그중에 75%인 1,200명 정도가 생체 기증자의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생체 기증을 하기 어려운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또 심장과 같은 장기는 아예 생체 기증이 불가능합니다.
또 뇌사는 의학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이고 며칠 내로 심장까지 멈추게 돼서 예외 없이 사망하게 됩니다.
결국 건강한 생체 기증자의 희생을 바라는 건 한계가 있어서 400여 명밖에 안 되는 뇌사 기증자의 수를 늘리는 것이 장기이식에서 해피엔딩을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를 위해서 국가와 이식학회, 그리고 코다 등의 기관에서 여러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외국의 경우는 어떨까요?
뇌사자 장기기증을 많이 하는 나라는 스페인이 대표적인데 스페인은 옵트아웃이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옵트아웃 제도는 기증을 사전에 거부하지 않는 한 모든 국민이 장기 기증을 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장기기증의 최적화된 제도로 보여지고 결과도 그렇습니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미국과 같은 옵트인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는데요.
이는 기증을 희망하는 사람이 희망 등록을 해야 하는 제도입니다.
희망 등록이 적은 우리와 달리 미국은 기증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고 뇌사자가 된 가족에 대해서 기꺼이 동의하는 문화가 잘 자리 잡고 있어서 기증이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무려 미국인의 58%가 장기기증 희망등록자이고요.
작년에는 내사 기증자가 1,2600명 정도나 기증을 해서 희망 등록을 불과 3% 정도만 하고 있는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데요. 이것은 매우 부러운 일입니다.
우리나라도 적절한 시스템을 찾으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데,
미국의 경우를 고려하면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일반 국민의 장기 기증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하게도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이러한 인식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물론 저희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장기 이식의 현실을 가감 없이 감동적으로 잘 보여준 제작진과 배우들 덕분에 일반 국민들이 장기 이식에 대해 간접 경험을 하게 되었고요.
무엇보다 기증받은 환자가 얼마나 건강해지는지, 그리고 환자와 가족이 기증자에게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드라마가 매회 끝날 때마다 700여 명씩 장기기증 희망서약을 해주셨다고 코다의 선생님이 상기된 목소리로 감사의 전화를 주셨을 때 무척 기뻤고 자문을 한 보람을 느꼈습니다.
여러분도 심폐소생술을 잘 알고 계시죠?
심정지 환자분들이 이 심폐소생술 덕분에 살아나시지만 상당수가 회생하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되는데요.
외국의 경우에는 이처럼 심장이 멈춰서 혈액순환이 멈춘 환자의 장기 기증까지도 보편적으로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을 순환정지 후 장기기증이라고 하는데요.
이미 유럽의 국가 중에는 이러한 순환정지 이후 장기기증을 50% 가까이 시행하는 나라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뇌사자 기증에 더해서 순환정지 후 기증까지 할 수 있도록 논의 중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그렇다면 장기 기증을 위해 내가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쉬운 것은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처럼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인터넷을 통해 장기기증 희망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기증에 참여할 때 자연스럽게 모두가 장기 기증의 혜택을 누릴 수 있고,
그 결과 내가 내 가족이 말기 환자가 되더라도 새 생명을 얻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법과 제도는 자연스레 자리 잡을 수 있겠죠.
이제 제 환자 얘기로 오늘의 얘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어릴 적 선천성 담도폐쇄증으로 큰 수술을 받았던 환자가 잘 지내다가 성인이 돼서 결국 간이 망가졌고 저에게 간이식을 받았습니다. 이 젊은 여자 환자는 어느 날 결혼을 하고 예쁜 아이까지 낳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간이식 후에 결혼도 흔하지는 않지만 간이식 후 출산까지 한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인데요.
죽음을 앞둔 환자가 이식을 받고 새 생명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가정을 꾸리고 출산을 하고 또 사회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것으로 저와 제 동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 여러분과 그 감동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이처럼 이전에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환자가 여러분의 인식 변화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이 중요한 일에 같이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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