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가해자의 뻔뻔한 거짓말도, 동료인 줄 알았던 검사들의 새빨간 거짓말과 조직적 음해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절망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서지현 검사입니다.
미투 후 벌써 약 4년이 흘렀는데요.
제 근황이 궁금하다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는 몇 달 전 법무부 디지털 성범죄 등 대응 TF팀의 팀장을 맡았습니다.
저 역시 성범죄 피해자이기에 이 일을 더 잘할 수 있겠다는 기대도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한 TV 프로에서 제 인터뷰가 포함된 디지털 성범죄에 관한 방송을 했었는데요.
같이 보던 남편이 "똘똘하게 말 잘했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TV 인터뷰에서는 마치 전문가처럼 마치 디지털 성범죄를 전부 근절할 수 있을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떠들고 있는 제 모습이 여전히 절망적인 현실 앞에 너무나 부끄럽고 속상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나라의 디지털 성범죄는 근절되지 않을까요?
흔히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하죠?
우리나라의 사법체계는 다른 나라에 비해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들에게 지나치게 너그럽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웰컴 투 비디오라는 사건입니다.
다크 웹에 개설된 웰컴투비디오라는 웹사이트에서 32개국 약 128만 명의 회원이 아동 성착취 영상물을 거래한 사건입니다. 32개국의 공조 수사로 범죄자들을 검거하고 사이트를 폐쇄했는데요.
운영자가 놀랍게도 한국인이었고, 가입자의 72%가 한국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사건에서 텍사스주 리드 그래 코프스 키는 1회 다운로드, 1회 접속 시청으로 징역 70개월, 보호관찰 10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아동 포르노 소지로 마이클 암스롱, 자이로 프로렌스 등은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요.
아동 성착취물 2천여 개를 다운로드한 모 미국인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주범인 손정우는 과연 어떤 판결을 받았을까요?
약 3년간 그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3천 개가 넘는 아동 성착취물을 올리게 하고, 다운로드가 36만 건이 넘었지만 손정우는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가 2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유독 우리나라는 왜 그동안 디지털 성범죄를 이렇게까지 가볍게 처벌해 왔을까요?
바로 디지털 성범죄의 특수성 때문입니다.
실제 범죄가 아니라 마치 가상세계에서 일어난 실체가 없는 범죄인 것처럼 생각해서 그 죄질을 매우 낮게 판단해 온 거죠.
그런데 세상이 변했습니다.
이제 많은 분들이 아실 거예요.
사이버상의 범죄가 훨씬 더 잔혹하고 대담하고 전파성이 강하고 대규모의 피해자를 양산합니다.
무엇보다도 영구적으로 흔적이 남는 강력범죄입니다.
실제 피해자는 죽을 때까지 아이 죽은 후까지도 자신의 영상이 인터넷상에 떠도는 영원히 회복되지 않는 고통을 받게 되었죠.
그런데도 가해자들은 재범을 일삼고 특히 가해자들은 죄책감이 거의 없습니다.
N 번 방 사건은 주범만 아시는데요. 가담자가 26만 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잠실 야구장에 관중이 꽉 찼을 때가 3만 명이라고 하니 26만 명이라고 하면 그 8배, 9배의 인원이 모여서 환호하고 응원하면서 입에 담기도 어려운 잔혹한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N 번 방 이후 우리 사회의 디지털 성범죄는 사라지고 있을까요?
가해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범죄 행위를 멈추었을까요?
가담자들은 모두 사라졌을까요?
얼마 전 저희 TF팀에서 분석을 한 결과 너무나 슬프게도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디지털 성범죄는 더욱 음성화되고 다양화되고 증가하였습니다.
어쩌면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성범죄에 관해서 가해자를 매우 가볍게 선처하고 피해자를 오히려 비난해 왔던 역사가 너무나 길었기 때문입니다.
성범죄자들을 선처해주는 사유를 한번 살펴볼까요?
고도비만 등 외모 콤플렉스로 인하여 주로 인터넷상에서 타인과 교류하던 중에 경솔한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나이가 어리고 범행을 시인하며 반성하고 있다.
혼인신고서를 접수해 부양할 가족이 생겼다
하물며 전도유망한 청년이므로라는 사유도 있어왔습니다.
이와 같은 사유로 성범죄자들을 선처해 주는 것이 과연 이해가 가시나요?
인터넷 댓글들을 보면 판사들을 욕하는데요.
저는 이것은 판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법률 자체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판사들이 양형 참작을 할 때 마구잡이로 감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에 정해진 기준에 따라 하는 것인데요.
형법 제51조에는 보시는 것처럼 양형의 조건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판사의 양형 사유에는 피해자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피해자가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그 고통은 과연 회복이 가능한 것인지, 피해자의 앞날이 전도 유망했는지 이런 내용이 있나요?
이것은 국가의 직무유기입니다.
국민을 범죄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 기관은 바로 국가입니다. 또한 피해자들은 보호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이 국가가 나를 보호해 주고 있다고, 국가가 나의 피해를 잘 구제해 주고 있다고 과연 생각하고 있을까요?
우리나라 헌법에는 피해자의 재판 절차에서의 진술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과연 현실은 어떠할까요?
형사소송법 등에는 피해자의 진술권이 제대로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결과 판사들이 법정에서 피해자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거의 없습니다.
가해자들만을 만나서 그 진술을 듣고 그 사정의 호소를 듣습니다.
판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서류 속에만 존재하는 피해자보다는 내 눈앞에 있는 가해자의 사정을 좀 더 고려해 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이처럼 피해자로서 TF 팀장으로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우리나라의 사법 체계가 철저히 가해자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저 역시 국가로부터 받은 피해자 지원은 지금까지 전혀 없었습니다.
2차 가해자들에 대한 사건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지출한 변호사 비용만 수천만 원인데요.
저는 그래도 대출이라도 받아서 소송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피해자들은 과연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그냥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억울함을 가슴속에 묻은 채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죽어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 사실 너무나 절박하고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습니다.
TF팀을 맡은 지 약 세 달이 흘렀습니다.
저희 팀과 소속 위원회에서 내놓는 권고안에는 전혀 강제력이 없습니다.
저희는 겨우 팀원 3명의 매우 작은 조직일 뿐입니다.
매일매일 순간순간 무력감이 압도됩니다.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제 자신에게 묻고 또 묻습니다.
그럼에도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법과 실무를 잘 알고 피해자 입장에서 이렇게까지 절박한 사람이 결국 나니까 뭐라도 해보자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해보자.
어떻게든 해보자. 매일 되뇌고 또 되뇝니다.
미투를 하고 거의 4년이 되어가는데요.
제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가해자의 뻔뻔한 거짓말도 동료인 줄 알았던 검사들의 새빨간 거짓말과 조직적 음해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절망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입을 열고 이야기해서 세상이 조금...
제가 입을 열고 이야기해서 세상이 조금 더 나아졌을까요?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디지털 성범죄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아질 가능성은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에도 그저 절망하는 편을 선택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앞으로 더욱더 과학기술은 발달할 것이고, 더 많은 플랫폼과 더 잔혹하고 교묘한 범행 방법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미 우리 손안에 지옥이 열려 있고, 그 지옥의 전망은 너무나도 밝아 보입니다.
이 지옥문을 과연 닫을 수 있을까?
두렵고 걱정되고 무력감이 압도되지만 지금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세상이 쉽게 변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TF팀을 맡은 제 자신도 믿지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제가 미투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함께할 때 우리는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피해자는 영원한 피해자가 아니며 더 큰 싸움을 할 수 있는 강한 존재라는 것은 말이죠.
N 번 방 사건이 터졌을 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그 누구도 이 끔찍한 범죄행위를 제지하지도 신고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제작 유포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공범이 아닌 것일까요?
더 이상 디지털 성범죄 방관자로 머무르지 말아 주세요.
지금 이 순간에도 인터넷에는 불법 동영상이 올라가고 그 영상의 피해자는 안타깝게도 죽음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가장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피해자는 화면 속에 나온다고 해서 가상의 인물인 것이 아닙니다.
생명과 감정과 인격이 있는, 살아 숨 쉬고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제대로 수사하고, 국제적 공조 수사 절차를 확고히 하고, 가해자들을 엄벌하고, 피해자들을 제대로 보호하는 법과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이미 손안에 열려 있는 지옥문을 지금 모두가 함께 조금이라도 닫아야만 합니다.
당장 일상에서 할 수 있는 무엇이든 당장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오늘 그 자리에서 여러분들이 여러분들만의 방식으로 함께해 주세요.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함께라면 다릅니다.
불가능해 보였던 것들이 가능해집니다. 이제껏 역사가 증명해 왔듯이 말이죠.
여러분이 저희 디지털 성범죄 등 대응 TF팀과 한 팀이 되어 주셔야 하는 이유입니다.
저 역시 쉽게 절망하지 않겠습니다.
지금까지 서지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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