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힘을 키우는 세 가지 스텝 | 김나윤 @yoonnus 크리에이터, 피트니스 선수 | #극복 #성장 #동기부여 | 세바시 1535회
저는 사고로 한 팔을 잃게 되었어요.
교통사고가 났어요.
친구가 저를 발견하고 "나연아 너 팔이 없다"라고 하면서 울부짖는 거예요.
'아 내가 이전처럼 살 수 있어?' 참 우울감과 좌절감이 극심했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어 근데 제가 생각의 전환을 한 후에 피트니스 대회에 4관왕까지 했습니다.
내면의 힘을 키울 수 있었던 첫 번째 스텝은
네 안녕하세요. 윤더스 김나윤입니다. 반갑습니다.
오늘은 제가 저의 이야기를 하려고 여러분들 앞에 서게 되었는데요.
어 제가 방금 윤너스라고 소개를 했는데, 혹시 윤너스의 의미 알고 계신가요?
모르는 눈동자세요? 어? 어머 알고 계시네.
그래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사고로 한파를 잃게 되었어요.
거울로 저의 한 팔이 없는 그 모습을 첫 대면했을 때의 충격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이상하고 기괴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어? 밀로의 비너스상 같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저의 이름 김나윤과 밀로의 비너스상을 합쳐서 윤너스라고 짓게 되었습니다.
잘 어울리나요? 네 감사합니다.
2018년 7월 15일 저는 하루 휴무를 떠났어요.
그런데 그날 일요일이라서 차가 너무 많이 막힐 것 같아서 제가 오토바이를 선택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데 제가 그때 교통사고가 났어요.
그런데 그날은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던 날이거든요.
그래서 왜 아스팔트에 너무 뜨거운 날이면 이렇게 아지랑이 올라오는 거 보신 적 있으실 거예요.
그렇게 너무 무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토바이에서 떨어져서 일어나려고 했어요.
저는 의식을 잃지 않아서 기억이 다 나거든요.
근데 일어나지지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온몸에 힘이 너무 다 없어서 그래서 그냥 아스팔트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고 한참을 누워 있는데 친구가 저를 발견하고 오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나 좀 일으켜줘" 라고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친구가 저를 보고 오더니 "나연아 너 팔이 없다"라고 하면서 울부짖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비현실적인 말을 들어서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그리고 이때 그 뜨거운 아스팔트 열기가 느껴지면서,
아 정말로 내 팔이 떨어졌으면 내 팔이 썩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친구에게 팔을 좀 찾아와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친구가 한참 있다가 정말로 제 팔을 찾아왔어요.
그렇게 저는 인근 병원으로 이송이 됐지만 그날이 일요일이라 접합할 수 있는 의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헬기를 타고 다시 이제 서울로 오게 되었는데요.
저는 이 사고로 인해서 장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어 그리고 저는 이렇게 네 약간 울컥하네요.
제가 이렇게 사고로 인해서 장애를 얻게 되었는데 제가 사고 이전에 근무했었을 사진을 제가 갖고 와 봤습니다.
보여드릴게요.
저의 모습이 좀 즐거워 보이나요?
저는 저의 직업은 고객님의 헤어 스타일을 책임지는 헤어 디자이너였습니다.
저는 미용업에 12년을 근무를 했는데요.
어 저는 중학생 때부터 미용사에 대한 꿈을 꿨어요.
그래서 미용과 가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하지만 미용 고등학교를 갔더니 제가 원하는 미용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일주일 만에 자퇴를 하고 바로 미용실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때 나이가 17살이었어요.
이렇게 한참 시간이 흘러서 저는 10년 차의 헤어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저의 직업이 너무나 재미있었고,
그리고 내가 디자이너로서 끝이 아니라 내가 리더가 돼서 경영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다양한 관리자 교육들을 받으면서 이렇게 미래를 그리는 시기였어요.
그런데 제가 이때 사고가 나게 된 거예요.
그래서 더 이상은 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시 이렇게 서울로 제가 헬기를 타고 병원을 왔잖아요?
저는 이때부터 굉장히 좀 이렇게 좌절감과 우울감이 굉장히 많은 하루하루를 보내게 됐어요.
제가 팔 접합 수술도 하고 그리고 경추부터 흉추까지 19군데 골절이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수술들을 하면서 정말 두 달 가까이는 꼼짝없이 병원 침대에서 누워서 생활을 했어야 됐습니다.
제가 이렇게 일상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앉는 연습도 했어야 됐고, 그리고 서는 연습 걷는 연습도 했어야 됐어요.
제가 하루는 걷기 연습을 하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하필 제 나이 또래 친구들이 많은 핫플레이스 거리를 걷게 된 거예요.
그런데 그때 저의 옷차림이 어땠냐면 병원복을 입고 있었고,
그리고 목 깁스와 그 제가 허리 수술한 지가 얼마 안 돼서 이제 그 허리 보호대를 착용하고 이렇게 거북이처럼 이렇게 천천히 걷고 있었어요.
그리고 친구들은 제가 혹시 잘 못 걸을까 봐 뒤에서 휠체어를 끌고 오고 있었고요.
제가 그렇게 핫 플레이스에서 본 그 풍경은 어 이렇게 핫한 카페에서 이제 동성 친구들이랑 예쁘게 꾸미고 커피 한 잔 하면서 사진 찍고 그리고 이성 친구랑 하하 호호 웃으면서 데이트하는 모습들을 보게 됐어요.
27살이었던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내가 저 친구들처럼 민소매 티 입을 수 있을까?'
'내가 저 친구들처럼 남자 친구랑 데이트할 수 있을까?'
저는 그 길거리를 걸으면서 참 많이 울었어요.
그리고 저희 직업적으로는
'아 내가 남을 꾸며주는 게 내 직업이었는데, 나나 제대로 꾸밀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참 우울감과 그 좌절감이 참 극심했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첫 번째 병원에 퇴원을 했고, 두 번째 병원으로 전원을 하게 됐어요.
이 병원은 국립교통재활병원이라는 곳인데요. 정말 말 그대로 교통사고 환자들이 모이는 곳이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척수 손상 환자분들이 굉장히 많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 그 첫 번째 병원에서 이렇게 좀 힘들었던 이유가 내가 이 병원 토털 제일 심각한 환자라고 생각을 해서 우울감도 높고 좌절감도 높았던 건데, 이 두 번째 병원에 와 보니까 저보다 심각하신 분들이 너무나 많은 거예요.
전신마비이신 분들도 계셨고, 그리고 뇌병변 환자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 내 장애로 좌절할 만한 것은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 병원은 스케줄이 또 타이트했습니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작업 치료를 갔어야 했고 그리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또 운동 치료를 갔어야 했어요.
근데 저는 아직 우울감이 해소가 안 됐을 때여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나는 팔하나가 없는데, 무슨 재활 운동이야.
저 사람들은 마비지만 팔이 있잖아 그리고 외관적으로 괜찮잖아'
라고 생각하면서 저는 그 운동 시간을 안 가고 자기도 하고 그냥 TV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제가 어느 우연히 복도를 이렇게 지나가는데 어 그 환자분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운동 그러면 덤배 들고, 이렇게 무거운 중량 들고, 이런 운동을 생각하는데
제가 그때 봤던 그런 운동들은 어 이렇게 정말 기계를 이용해서 서서 버티는 운동
그리고 팔 하나 드는 운동, 다리 하나 드는 운동을 정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하시는 거예요.
제가 그 상황을 보고 아 내가 내 장애로 좌절하려고 했었다는 게 굉장히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뛰는 것까지 다 가능했었거든요.
저는 이렇게 이 두 번째 병원에서 생각의 전환을 한 후에 퇴원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이렇게 제 사고로 그리고 저의 이런 장애를 얻게 되면서 내면의 힘을 키울 수 있었던 첫 번째 스텝은 감사함 찾기였습니다. 사실 좌절의 당시에는 감사라는 단어가 나오질 않아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저도 저 역시 과거로 자꾸 돌아가서
'아 내가 그때 오토바이 타지 않았더라면
내가 차를 탔더라도 그런 사고가 났었을까?'
자꾸 이전에 대한 질문만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답이 안 나오고 계속 블랙홀로 빠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아 그래 과거는 멈추고 현재에 한번 집중을 해보자'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그 우울감과 좌절감이 높았던 그 첫 번째 병원에서 저희 미용실 대표님께서 정말 매일같이 찾아와 주셨어요.
대표님께서 뭐라고 하셨냐면,
"퇴원하고 복직해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내가 네가 불쌍해서 이렇게 복직을 권유하는 게 아니라 네가 디자이너 때 열심히 했고,
그리고 성과도 보여줬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이렇게 다른 직무를 맡기더라도 열심히 할 나윤의 모습을 그리면서 이렇게 제안을 하는 거다"
라고 이야기해 주셨어요.
저 너무 감사했습니다.
사람에게 굉장히 다양한 영역들이 있잖아요?
가족, 친구 뭐 돈 애인 이렇게 정말 많은 영역들 가운데 저는 일이 1순위였던 사람이었어요.
근데 제가 일을 그 당시에 보장을 받지 못했더라면 아 내가 이전처럼 살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저에게 먼저 손 내밀어줬던 대표님이 참 감사하더라고요.
그리고 사람에 대한 감사는 대표님 뿐만 아니라 제 주변에 넘쳤습니다.
제 친구들은 어 그냥 장애인이 된 친구로서 맞춰주는 게 아니라,
그냥 예전부터 웃고 떠들던 나윤이로 대해 주어서 저의 버팀목이 돼 주었고요.
그리고 가족들은 말해 뭐예요. 그렇죠? 저의 손발이 되어 줬습니다.
제가 두 달 동안 병원 침대에서 이렇게 누워서만 지냈다고 했잖아요.
제가 그때 대소변을 어떻게 가렸을까요? 정말 갓난아이처럼 기저귀를 차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엄마가 다 해주셨어요.
근데 사실 다 컸는데 창피하잖아요.
근데 지나고 보니까 참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제 주위 환자분들은 물론 가족분들이 케어를 해 주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간병인 분들이 케어를 해 주시는 분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아 이렇게 내가 가족한테 세세하게 케어를 받고 있다는 게 너무 감사했어요.
그리고 일상에서의 감사함은 훨씬 더 넘쳤습니다.
1년 만에 퇴원해서 집에 들어와서 내 방 침대에 누워 보고
그리고 화장실에서 나 혼자 씻을 수 있고
그리고 거실에 나와서 저 혼자 한 손으로 리모컨 조작도 해요.
예전에는 정말 당연했던 이런 일상들이 장애를 가지니까 너무나 감사한 일상들로 바뀌더라고요.
그리고 사고 때로 돌아가면 저는 오른손잡이예요. 근데 차라리 왼쪽 팔이라 감사했고,
경추부터 흉추까지 골절들이 많았지만 척수 신경 하나 누르지 않아서 이렇게 잘 걸을 수 있음에도 감사를 했고,
그리고 사실 제가 그때 사고 당시에 팔이 아니라 목이었더라면 저는 그때 즉사했을 거예요.
근데 차라리 팔이어서 감사했습니다.
어 저는 이렇게 장애를 가졌지만
어 가족이나 일이나 친구 어느 하나 변하거나 떠난 것 없는 이 현실이 너무나 감사했어요.
그리고 제가 내면의 힘을 키울 수 있었던 두 번째 스텝은 이야기하기였습니다.
감사함에서 그치지 않고 내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 뭐가 좋을까? 유튜브를 선택했어요.
제가 생각의 전환을 했던 그 두 번째 병원에서 상지 절단 그다음에 절단 장애인 이렇게 유튜브에 검색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정보를 얻으려고, 그런데 그 당시 한국에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되게 외로웠어요.
저는 그때 나와 같은 장애인이 살아 있다는 것만 보더라도, 심적으로 정말 위안이 많이 됐을 텐데, 나오질 않으니까
이 세상에 나만 이 장애를 갖고 있는 듯한 그런 외로움을 느꼈어요.
그래 내가 그럼 사회로 돌아가서 내가 내 채널을 좀 열어서 내 이야기를 한번 해봐야겠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와 같은 장애인이 내 채널을 볼 때는 어 한 팔로 이런 것도 있었지? 이렇게 하면서 팁들을 얻기를
그리고 비장애인 분들이 보시더라도 '아 쟤도 열심히 사는데 아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가지시기를 희망하면서 저는 유튜브에 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굉장히 많은 분들이 저에게 '나현 씨 덕분에 힘 난다'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데,
사실 가장 큰 수혜자는 저라고 생각을 합니다.
많은 분들이 주시는 피드백들이 저에게는 삶을 잘 살아갈 원동력이 되니까요.
그리고 내면의 힘을 키울 수 있었던 마지막 세 번째 스텝은 실행하기였습니다.
제가 일상생활로 이렇게 복귀하면서 더 많은 도전들을 했어요.
한쪽 팔이 없음으로 인해서 척추 측만이 점점 심각해지더라고요.
내가 앞으로 살 날이 더 많은데 아프면서 살긴 싫더라고요.
그래 그럼 재활 운동에 도전을 해보자라고 생각을 했고,
그때 운동을 저에게 처음 지도해 주셨던 박사님이 계신데,
그 박사님도 사고로 인해서 척수 손상이 있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에요.
근데 그 박사님이 저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바디 프로필 찍을 거면 대회에 출전을 해 봐'라고 제안을 해 주셨어요.
제가 원래 바디 프로필 찍을 계획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박사님의 그런 제안으로 제가 이렇게 비트니스 대회를 목표로 운동을 하게 됐습니다.
거의 대회 막바지쯤이었어요.
그날은 거의 막바지쯤이었는데 여러분들 대회 식단 하면요. 진짜 새 모이밖에 안 되거든요.
이렇게 100g 계량하서 이렇게 먹으니까 그래서 정말 힘도 없었고 근데 그날 또 하필 하체 운동이에요.
너무 이제 먹은 것도 없으니까 그날 진짜 마지막 4세트 하는데 진짜 죽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박사님을 앞에 보면서 '아 더 이상은 못 할 것 같아요'라고 이제 이야기를 하고 박사님을 쳐다보는데 박사님 다리가 보였어요.
'박사님은 얼마나 이 근육통 느끼고 싶어 할까?'
내가 이렇게 신경이 살아 있어서 이렇게 근육통 느끼고 다리를 이렇게 움직이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감사한 일인데 내가 이걸 포기하려고 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날 운동 아주 찢었습니다.
정말 이를 악 물고 열심히 했어요.
그렇게 저는 재활 운동에 도전을 했고 어 그리고 이제 피트니스 대회에도 도전을 하면서 저는 운 좋게 대회에서 4관왕까지 했습니다.
여기 박수 나올 타이밍인데 박수를 예 감사합니다.

네 물론 박사님께서 이렇게 제안을 해 주신 것도 있지만 대회에 출전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많은 장애인 분들이 사회로 좀 나왔으면 하는 바람, 그리고 두 번째는 장애 인식 개선을 위한 이유였어요.
많은 장애인 분들이 사회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은 물론 저처럼 피트니스 대회가 굳이 아니더라도 본인이 소속한 회사나 가정에서 내가 나의 장애를 이야기하고 그리고 다양한 생활에 좀 참여할 수 있기를 이렇게 희망을 했고,
장애 인식 개선은 공공기관이나 교육기관에서 받는 그런 교육들도 너무 좋지만,
저는 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러운 학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예를 들면 제 친구와 가족은 상지 절단 장애에서 굉장히 잘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 그냥 말 그대로 저와 함께 생활을 하고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제가 많은 그 장애에 대한 언급을 했기 때문이겠죠.
물론 지금은 제 주위에 캡파가 적지만 이렇게 장애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땐, 그 흐름이 점점 커져서 사회 전반적인 흐름을 바꿀 수 있겠다라고 제가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장애 인식 개선에 대해서 이야기도 하고, 실행을 하다 보니, 저는 장애인식 개선 홍보 대사를 맡게 되었고요.
어 그리고 나는 재활 운동 전문가가 되고 싶어라고 이야기하고 실행을 하다 보니 제가 체육 학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 이야기로 많은 분들이 힘냈으면 좋겠어라고 이야기하고 실행을 하다 보니까
어 정말 제가 이렇게 세바시에도 나와서 저의 이야기를 전달을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을 저는 장애를 가지면서 더 많은 꿈과 일들을 하면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말은 제가 제 인생을 살면서 좌절이 꼭 장애에만 있을까요?
일상생활들을 하면서 저는 수많은 좌절을 경험을 했습니다.
사실 일상생활에서의 좌절의 빈도수가 훨씬 더 많아요.
예를 들면 저희 고객님에게 어떠한 제안을 했는데 거절 이렇게 까이기도 하죠.
거절을 당하거나 그리고 내가 어떤 일을 계획했는데 이 일이 틀어지면서 무산이 되기도 하고요.
그리고 내가 자신감이 없어서 그 일을 회피하기도 하고요.
이렇게 저는 수많은 그런 좌절과 회복을 반복적으로 학습하면서,
저는 제 인생의 커다란 좌절인 장애가 찾아왔을 때 물론 힘들지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근데 그 힘은 여러분들에게도 있습니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 좌절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저는 제 이야기를 서로 좀 이렇게 파이팅 하면서 마무리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you can do it 이렇게 얘기 외치면, 여러분들이 i can do it 이렇게 힘차게 외쳐주시면 됩니다.
자 선창 할게요. 크게 해 주셔야 돼요. 네
you can do it
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윤나스 김나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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