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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891회 | 당신에게 장애인 친구가 없는 이유 | 장혜영 '어른이 되면' 프로젝트 기획자, 생각많은 둘째언니

 

강연소개 : 장애인은 왜 우리 주변에서 보이지 않을까요? 장애인은 자립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시설 등으로 격리 시켰기 때문입니다. 자립이 만약 혼자 모든 것을 다 해결하며 산다는 뜻이면 비장애인도 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도 같이 살기로 마음 먹는다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18년 동안 시설에 있던 동생과 같이 살기로 결정하면서 알게 된 자립의 진짜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게시일: 2018. 1. 22.

 

 

 

(박수)

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생각많은 둘째언니' 라고 하는

이름으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장혜영 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박수)

 

저는 오늘..

이.. 여러분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에

제 얘기를 한가지 상상을 여러분과

함께 하면서 시작을 해보고 싶어요.

어.. 이제 제가 어떤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은 이게 여러분의 일이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제 얘기를 따라와 보세요.

 

 

여러분은 이제 막 13살..이 되셨어요.

13살이 된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와서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너는 이제 니가 살던 집과 가족을 떠나서

니가 한번도 본 적없는 외딴 곳에서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과

평생을 살아야 돼.

그게 니 가족들의 생각이고,

너에게 거절할 권리는 없어."

그리고 그 사람은 당신을 데리고 갑니다. 그 곳으로.

어떠세요?

그런 상상을 해본다는 것..

만약에 저에게 누군가가 그렇게 얘기하고

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전 정말 끔찍한 기분이 들었을 것 같아요.

 

 

제가 방금 말씀 드린 것은

바로 저의 한 살 어린 여동생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제 동생은 13살때부터 중증 발달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자폐성 장애와 지적장애 둘 다를 심하게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가족들을 떠나서 무려 18년이라고 하는 시간을

시골에 외딴 산꼭대기에 있는 시설에서 살았어요.

 

어.. 되게 부끄러운 얘기지만

저는 굉장히 최근이 되도록

동생의 그런 삶을

동생 스스로가 선택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이건 굉장히 부당한 일이고

동생이 그렇게..

그렇게 비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는 한

나에게도 인간적인 삶이란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해서

고민 끝에 동생을 약 7개월 전에

다시 시설에서 사회로 데리고 와서

둘이 살아나가는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구요.

 

그런 날들을 이제 비디오로, 브이로그(Vlog)로 만들어서

저의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를 하고,

또 이제 그거를 좀 더 압축적으로 보실 수 있도록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있어요.

 

그게 바로 '어른이 되면' 이라고 하는 저의 프로젝트 입니다.

(박수)

제가 이렇게.. 동생처럼 시설에 살고 있다가

다시 사회로 나오는 것을 '탈시설'이라고 해요.

그래서 말하자면 '제 동생은 탈시설을 했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는데

제가 동생의 탈시설을 준비하고 있다..

라는 얘기를 주변에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한테 이렇게 되물었어요.

뭐라고 되물었냐면,

"비장애인도 이렇게 살아가기 어렵고 힘든 위험한 사회에

어떻게 네 동생같은 중증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이 나와서

자립할 수 있다고 생각해?

오히려 동생이 안전한 그 시설에 있는 것이 더 나은 삶 아니야?"

라고 저에게 물었어요.

그리고 탈시설을 한 지금도..!

이렇게 살고 있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이 질문을 저에게 하시고

사실 이 질문은 동생을 데리고 나오기 전에

제가 제 자신에게 가장 깊이 물어봤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정말 생각해보면,

'나도 이렇게 살기 힘들고, 위험하다고 느끼는 사회에 어떻게 동생이 살아갈 수 있지?

내가 언제까지나 지켜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는데.

그 다음에 동생이 어떻게 살아야 되지? 어떻게 동생이 자립할 수 있지?'

를 고민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나는 어떻게 살고있는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뭔가를 깨달았어요

 

저는 제 동생의 자립이라고 하는 것이 마치

로빈슨 크루소처럼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혼자 힘으로 다 해결하고, 모든 위협을 헤쳐나가고

이런 것이 자립이어야 된다고 어느순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근데 제 삶을 돌아보니까

저의 인생 전체는

늘 누군가에게 그때그때 가장 필요한 도움을 받으며

누군가에게 늘 의존하며..

나의 가족, 나의 부모, 친구, 선생님,

혹은 이름도 모르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의존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던 거였어요.

그런 내가 정작 동생에게는 전혀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었던 거죠.

그때 저는 또 깨달았죠.

제 동생에게 필요한 것은

장애가 있으니깐 보호라는 이름 하에 격리..

'보호라는 이름 하의 격리'가 아니라,

동생이 배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면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기회,

이 사회 속에 적응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는

더 많은 기회였다는 것을 전 알겠어요.

 

 

 

그래서, 아주 기쁜 마음으로 아주 확신에 찬 마음으로 

동생을 사회로 데리고 나와서 이제 살게 됐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얘기를 하세요. 

"좋은 시설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 

"좋은 시설도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은 시설을 잘 모르시는 분이라고

저는 감히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수많은 시설을, 동생이 살았던 시설 이외에도 돌아보았고 

그 수많은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너무나 일상적인 인권침해, 

그리고 눈 앞에 있는 그 사람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전제하고 

그 사람을 매일매일 대하는 사람들. 

그런 것의 연속이었어요. 

그리고 어떤 분들은 아마 뉴스로 지나간 어떤 학대에 관련된 사건들 

이런 것들을 기억하고 계신 분들도 아마 계실 거예요. 

그리고 설령 아무리 좋은 시설이.. 

뭐 호텔처럼 깨끗하고, 상냥한 사람들이 상주하고, 늘 맛있는 밥이 나오고, 

이런 시설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시설은요, 

나 자신으로 살아갈 자유를 박탈 당하는 삶... 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만날 지, 어디에서 살 지,

누구와 친구가 되고 싶고, 누구와 되고 싶지 않은 지,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 지를

능동적으로 결정해나갈 수 없는 삶을..

과연 우리가 인간적인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할 수 없고.. 

그리고, 같은 사회에 살아나가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삶 없이 

우리에게도 인간적인 삶이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낄 순 있는데 

그건 우리가 정말 뭔가를 잘해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인거니깐요. 

 

 

그래서 제가 원하는 사회는 

단 하나의 시설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 

단 한 명의 장애인도 시설에서 살지 않고 

격리 당해 살지 않고 

모두가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회 입니다. 

 

 

되게 이상적으로.. 들리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한테는 그랬거든요. 

맨 처음에 제가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 

 

 

근데, 이 지구 상의 어딘 가에는 그런 사회가 있어요. 

이미 그런 사회가 존재하고 있어요. 

어디냐, 바로 스웨덴 입니다. 

스웨덴은요, 1997년에 시설폐쇄법이라고 하는 게 제정이 됐고 

시설폐쇄법에 의해서 1999년 12월 31일을 기점으로 

모든 시설이 폐쇄 당했어요. 

강제로 폐쇄 당한 것도 있어요. 

근데 강제라는 게 막 들어가가지고 문을 닫아버린 게 아니라, 

국가가 굉장히 정책의지를 가지고 

그 시설을 사서 점차적으로 폐쇄를 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서서 

모든 장애인들을 다 지역사회로 돌려보냈습니다. 

"뭐, 스웨덴이니까 가능한 이야기 아닌가요? 그쪽은 인권의식이 높잖아요." 

이렇게 얘기를 하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스웨덴의 70년대는 지금의 한국과 똑같았습니다. 

오히려 정부는, 오히려 국가는 시설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고, 

그리고 시설에 가족들을 보낸 다른 가족들은 시설을 폐쇄하는 것에 대해서 

그게 무슨 소리냐, 라면서 무려 80%가 반대를 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근데 그런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고 이렇게 시설이 하나도 없는 나라를 만들 수 있었을까? 라고 한다면 

저는 한 사람을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네. 바로 '칼 그루네발트' 박사님이라고 하는, 

거의 100년을 사신 ㅎㅎ 분인데요. 

 

이 분은 스웨덴 보건복지부의 공무원이었다고 해요. 

근데 이 분은 시설에 실태조사를 나갔는데 

그 시설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권침해와 학대의 양상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두 눈으로 보고 

이제 탈시설 주의자가 되었고, 

이 분은 그때부터 그런 수많은 학대와 인권침해 사실들을 

스웨덴 사회에 폭로해나가기 시작합니다. 

 

열심히 여론전도 하고, 학부모들도 만나고, 보고서도 쓰고.. 

그렇게 해서 큰 반향을 일으켰죠. 

그래서 어떤 시설들은 폐쇄가 되고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은 지역사회로 나오게 됐습니다. 

 

근데 단지 거기에서 그친 게 아니라, 

이 분은 굉장히 몇십 년에 걸쳐서 

그렇게 다시 지역사회로 나온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 해 가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편견 

뭐.. 장애인이 많으면 그 동네 땅값이 낮아질거야. 라던가 

이런 것들이 얼마나 사실과 다른가에 대해서 

굉장히 열심히 연구하고 또 그것을 사회에 알려나가고, 사람들의 공감을 샀어요. 

그 결과, 스웨덴에서는 단 한명의 장애인도 

그 어떤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모두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었죠. 

 

 

 

그래서,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얘기를 하자면 

우리나라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도 그렇게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지금 2016년 현재 보건복지부 통계를 보면 

장애인 거주시설 혹은 수용시설이라고 하죠. 

그 시설에 살고 있는 장애인 수는 3만명이 조금 넘습니다. 

근데 제가 지금 드리는 이 얘기가 단지 

이 3만명을 다시 사회로 데려오자. 라고 하는 얘기 뿐만은 아니예요. 

물론 그 얘기가 저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왜 이 3만명을 데리고 오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이야기인가를

저는 조금 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똑같은 모양들이 작은 것들이 모여서 또 그것의 큰 형태를 이루는 걸 '프랙탈(Fractal)'이라고 하잖아요.

저는 우리 사회가 아주 촘촘한 격리의 프랙탈로 이루어져 있다,

라는 생각을 요새 정말 많이 해요.

 

'무슨 얘기지? 난.. 지역사회에서 살아왔는데.' 라고 하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 어렸을 때로 돌아가보자구요. 

그리고 생각을 해보자구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능력으로 사람을 서열화하고, 

서열화해서 사람들을 분리하고, 서로 다른 처우를 하고, 

이런 경험을 정말 수없이 자라면서 해왔잖아요. 

우열반.. 영어니, 수학이니 

뭐 혹은 장애가 있고 없고, 피부색이 다르고, 

수많은 다르다고 하는 이유들, 

그리고 상대적으로 열등하다는 이유들로 

서로를 배제하고 분리하고 격리하고 

내가 그렇게 격리당하고 혹은 남이 그렇게 격리당하는 걸 수없이 보고 자랐기 때문에 

삶이 어느순간 그냥 그런 거라고 

우리는 이 사회에서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납득하고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나가 보다보면 

어느순간, 마치 예전의 저처럼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이, 

더 많은 기회가 필요한 사람이 

오히려 모든 기회를 박탈당하고 

사회 밖으로 격리당하는 것을 봤을 때도 

뭐 그런 삶도 있는 거지 뭐.. 라고 고개를 끄덕여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격리로 가득한 사회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가 아니라, 

고통을 경감하는 사회가 아니라 고통을 그냥 보이지 않는 곳으로 

격리해버리고 추방해버릴 뿐이기 때문에 문제를 여전히 남아있고,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곪아터지기 마련인거죠. 

 

올해에는 특히 장애인복지에 관해서 이런저런 이슈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아마도 

강서구에 장애인 특수학교를 짓는 문제였던 것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근데 이제 특수학교를.. 한방병원을 지어야 하니까 못 짓게 한다, 라고 해서 

부모님들이 꿇어앉고, 그거에 대해서 국민적 공분이 있어서 

이제 다행히 그 학교는 지어지게 됐다고.. 하는데, 

사실 저는 특수학교도 '어떤 종류의 격리'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저는 통합교육, 어렸을 때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섞여서 살아가고, 

그렇게 섞여서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우리의 교육에 중요하다 라고 생각을 해요. 

 

이런 얘기를 하면 고개를 끄덕끄덕하시지만.. 

학부모님들은 반응이 약간 다르세요. 

초등학교? 그럴 수 있어요. 

중학교? 음.. 그럴 수 있어요. 

고등학교? 음.... 가 길어지고요. 

고3 교실에 발달장애인이 함께 있다면 어떨까요? 라고 물어보면 

"그건 좀 아니지 않을까" 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근데 재밌는 게, 

저의 채널의 구독자 중에 한 분이 고3인 분이 있는데 

제가 그런 얘기를 하니까 저한테 되돌려주는 얘기가 있었어요. 

"그거는 되게 교실을 모르는 얘기예요. 

우리 교실에서는 나는 고3이지만 

1,2등 하는 애들 외에는 아무도 사람취급을 하지 않아요. 

우리의 존재는 그곳에서 가치가 없어요." 라고 얘기를 하더군요. 

 

크고 작은 격리들이 이 사회에 만연하고,  

서로가 서로를 격리하는 이유는 이미 우리가 누군가를 격리하는 게 

너무 당연했기 때문이야. 라고 모두가 어떤 종류의 자기 자신을 이 사회 밖으로.. 

자신의 약함, 자신의 모자람, 자신의 다름 

이런 것들을 다 밀어내고 만들어진 사회가 지금 우리 사회죠. 

모든 기준을 충족한 사람만 잘 살 가능성, 기회, 권리가 주어진다고 생각하고 

내가 못 살고 있는 거, 내가 불행한 것은 다 내 탓이야. 

라고 생각하기를 강요당하는 게 지금의 사회죠. 

 

근데 하.. 

이거 너무 좀 이상하잖아요. 

왜냐면은 제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라면.. 아기로 태어나서 별일없이 죽는다면 

노인으로 죽는데.. 

결국은 연약하게 태어나서 연약하게 죽잖아요. 

누구도 단 한 순간도 연약하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약자를, 

약한 것을 자꾸 밀어내는 사회를 이대로 두고 있는가. 

왜 이 격리를 여전히 이 사회의 철학으로 가지고 있는가 

이것에 대해서 저는 의문을 제기해야된다. 라고 생각합니다. 

 

 

 

동생하고 같이 사는 날들이 이제 약 7개월정도가 되고 있는데

그 시간 속에서 저도 이제 좌충우돌하는 일들이 되게 많아요.

오랜만에 같이 사니까.

뭐.. 사실은 18년만에 같이 사는 거니까 거의 남이랑 사는건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과의 날들이 저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그 매일매일 속에서 제가 느끼는 것이

그래도 살려고 하면 살아지더라, 라고 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인 것 같아요.

 

단지 개인의 노력만이 이 모든 격리의 구조.. 

우리 사회에서 우리 모두의 고통을 밖으로 쫓아내고, 

숨겨버리고 있는 구조를 구축할 순 없다고 생각해요. 

 

국가적인 노력, 사회적인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한 분, 여기 앉아계신 한 분, 한 분의 마음 속에서 

'맞아. 이건 잘못됐어.' 

라고 생각하는 신념이 생겨나는 것이 

이 모든 것들을 변화시키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 이제 막 신년이 됐는데 ㅎㅎ

이런 말씀으로 오늘 여러분의 저녁을 마치게 되는 것에 대해서 

저는 굉장히 감사하고 영광스럽고 

그대로 우리 사회가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왔구나, 

라고 하는 점에서 굉장히 희망적인 그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하구요. 

'생각많은 둘째언니' 였습니다.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