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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1859회 | 지뢰를 밟자마자 그가 내뱉은 말은? | 이주은 청년부상제대군인 상담센터 실장

이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왼발을 딛는 순간 지뢰를 밟았습니다.
  • 왼발을 확인해 보니 발이 터져 있더라고요. 
  • 차량으로 호송되는 과정 중에 차량이 잠깐 또랑에 빠진 적이 있어요. 그때 이렇게 말했어요. 그래도...

 

"지뢰 밟고 왼발이 터졌습니다" 그 뒤에 일어난 일

 

 

네 안녕하세요. 

서울시에서 청년 부상재대군인 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이주은 실장이라고 합니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2019)>

 

혹시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드라마를 보신 분 계세요? 되게 유명한 드라마였죠. 

여자 주인공인 '윤세리'와 남자 주인공인 '리정혁'의 첫 만남에서 리정혁이 윤세리를 쫓다가 지뢰를 밟고 놓치는 장면이 나와요. 이 밖에도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지뢰를 밟고 못 움직이는 그런 장면을 재미있게 표현한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혹시 저 지뢰를 내가 밟는다면 어떨까?'라고 생각해 보신 분 혹시 계실까요?

 

저는 정말로 지뢰를 밟은 분을 통해, 내가 만약 지뢰를 밟는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2016년 여름에 제가 ROTC 후보생으로 훈련을 받던 중에 이종명 전 국회의원이 강연을 오신 적이 있어요.

이분은 2천년도에 지뢰를 밟고 양쪽 다리가 절단이 됩니다.

다리가 절단된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이분은 부하들의 목숨을 먼저 챙겼고, "들어오지 마 내가 나갈게"라고 말씀하시고 직접 포복해서 나오신 적이 있어요.저는 이분의 얘기를 들으면서 되게 많이 울었어요.

그리고 내가 만약 지뢰를 밟으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나보다 내 부하들을 먼저 챙길 수 있을까? 라고 스스로에게 많이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제 군 생활의 목표는 제 부하들을 다치지 않은 상태로 무사히 전역시키는 것이 됐고요.

그렇게 2018년도 3월에 저는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게 됩니다.

 

 

제가 근무했던 곳은 해병 2사단 김포지역인데요.

이곳은 임진강이 북에서 흐르고 한강이 남에서 흘러서 만나서 서해로 흐르는 곳이에요.

 

해병대 제2사단이 위치한 김포 지역

 

제가 근무했던 시기는 녹음기였어요. 군대 다녀온 분들은 아시겠지만 군에서는 풀이 정말 많이 자랍니다.

수제선 일대에 갈대가 사람 키보다 더 높게 자랐고요.

이러한 갈대가 경계 작전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이 갈대를 제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갈대를 제거하는 모습

 

근데 우리 소초는 인원도 부족하고 24시간 상황실도 운영해야 되고, CCTV 감시병도 돌아야 되고, 또 야간에는 초소 근무자도 나가야 했기 때문에 인원들이 없었어요.

 

그래서 비번 시간에 "내가 나가서 고생을 하면 내 부하들 좀 덜 고생시키겠구나"라는 마음으로 매일 새벽 예초기를 메고 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작업을 해 나갔고 약 100미터 정도가 남은 날이었어요.

전방에 가니까 갈대밭에 물이 반 정도 차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돌아갈까라고도 생각을 했는데, 내가 밤을 세운 게 아까워서, 내 노력이 아까워서,

일단은 팔이 닿는 곳까지 작업을 하고, 나머지 50미터는 내일 대원들 넣어가지고 마무리를 해야겠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1시간 정도 작업을 하는데, 옆에 부소초장이 아침 시설물 점검을 마치고 돌아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이제 작업을 슬슬 마쳐야겠다라고 생각을 하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왼발을 딛는 순간 지뢰를 밟았습니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는 망치로 세게 맞은 느낌이었고요.

시야는 블랙아웃 되고 귀에서는 "삐~" 소리와 함께 이명 소리가 들렸어요.

 

 

왼발을 확인해보니 발이 터져 있더라고요.폭발 소리를 듣고 같이 들어갔던 제 대원이 저를 구출하러 오려고 했는데요.

주변에 더 무슨 지레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대원한테 "저기 부소초장 가고 있었으니까 가서 보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밟아왔던 길은 촘촘히 밟아왔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길로 다시 돌아나갔어요.

한 10m 정도 이동을 하고 중대장님께 유선으로 지뢰 밟았다고 보고를 했고요.

그리고 부소초장이 대원들과 같이 구출하러 들어오려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때 제가 들었던 생각은 이 터진 발을 내 대원들이 보면 뭔가 트라우마에 빠질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대원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거리는 부소초장의 도움을 받아 구출되었고요.

이어서 중대장님이 오시고 차량으로 후방으로 빠지게 됐습니다.

 

그렇게 저는 헬기를 타고 분당에 있는 국군수도병원까지 이송을 하게 됐어요.

이송하게 되는 그 한 3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아픔보다는 공포가 더 컸던 것 같아요. 

차라리 기절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기절은 안 되더라고요.

그렇게 수도병원으로 가고 응급실에서 간단한 조치를 하고 수술실에 들어가서 마스크를 썼어요.

이제 마스크를 쓰는 순간 "드디어 쉴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수술을 받고 다음 날 생각보다 빨리 깼어요.

그리고 간호과장이 와서 "밖에 엄마 오셨어요." 이러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호흡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고 간호과장 손에 "엄마 괜찮아요?" 라고 글씨를 썼어요.

그랬더니 간호과장이 "엄마 괜찮으세요" 라고 거짓말을 하더라고요.

당연히 엄마가 안 괜찮으실 거 알고 있었는데, 제가 아직 제 사고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시점이기 때문에

그 거짓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면회를 오셨는데 정말 한 10년은 늙으신 상태로 들어오셨고요.

나중에 들으니까 제가 마취에서 깨기 전 어머니가 저를 보시고 쇼크로 기절까지 했다고 들었어요.

 

중환자실에서 제일 힘들었던 게 뭐냐면요. 바로 면회 시간인데요.

제가 왜 힘들었냐면, 이 순간만큼은 제 감정을 숨겨야 하는 시간이었거든요.

우리 엄마가 들어올 때 제가 거기서 울고 있으면 안 되니까 괜찮은 척 했어야 됐고요.

가족들이 들어왔을 때 괜찮은 척했어야 했어요.

근데 저는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중환자실에서 두 번 정도 오열한 적이 있는데,

첫 번째는 예상치 못하게 제 동기들이 들어왔던 때고요.

두 번째는 제 지휘관이신 중대장님과 대대장님이 오셨을 때였어요.

 

중대장님과 대대장님께는 저는 너무 죄송했어요. 왜냐하면

우리 부대는 지금 현행 경계작전 부대인데, 경계작전에만 집중해도 너무너무 바쁜 부대인데,

제 사고로 인해 조사를 받을 것이고, 그것이 작전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너무 죄송했어요.

그래서 두 분이 오셨을 때 제가 "부대에 누를 끼쳐 죄송합니다"라고 말씀을 드리고 엄청 울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중대장님이 면회를 마치시면서 저에게 편지를 주고 가셨어요.

 

 

제 대원들이 저에게 써준 편지인데요. 

그 편지에는 사고 당일 새벽에 화장실에서 인사 못 했다고 죄송하다고 써준 대원도 있었고요.

어떤 대원은 제가 원래 저녁하면 가려고 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전히 갈 수 있다고 믿는다고 응원하는 대원도 있었어요.

그 편지를 보면서 정말 하루 종일 많이 울고 또 많이 웃었어요.

그리고 마음이 괜찮아지더라고요. 

 

그리고 약 일주일 정도의 중환자실 생활을 마치고 일반 병실에 내려와서는

오랜만에 핸드폰을 받아서 밀린 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기들에겐 괜찮다라고 연락을 했고, 민간에 있는 고등학교 친구들은 제가 다친 지 몰라서 통화를 했어요.

그랬더니, "아 주은아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됐어?" 이랬더니 그때는 이미 제 마음이 좀 괜찮아진 상태여서 

나 지뢰를 밟고 발이 좀 잘려서 연락을 못 했어라고 얘기했더니 그걸 어떻게 믿겠어요?

그래서 계속 "진짜야? 진짜야?"라고 했더니 얘가 나중에는 울먹울먹하면서 전화를 끊는 거예요.

그리고 직접 찾아봤더니 지뢰 기사가 있었고, 다시 전화가 와서 울면서 괜찮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저희 친구들이 있는 카톡방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보통 그 친구를 제외하고 공지를 하거든요.

근데 그 친구가 경황이 없었는지 제가 있는 톡방에 그대로 면회 갈 수 있냐고 묻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뭐 한 3~4명 정도 오겠거니 했는데 저희 톡방에 총 15명이 있는데 그 친구들이 모두 면회를 와줬어요.

 

 

그리고 나중에 들었는데 얘네들이 중간에 화장실을 갔더라고요.

근데 그 화장실 간 게 제 앞에서 울 수 없으니까, 울러 화장실 갔다고 친구들에게 들었습니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내가 죽었을 때 내 무덤에서 울어주는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근데 저는 죽은 것도 아니고 그냥 발 좀 짤린 건데, 나를 위해 이렇게 울어주는 친구들이 있구나 이게 굉장히 큰 위로가 됐어요.

 

 

 

이렇게 저를 생각해주는 대원들, 그리고 제 친구들 그리고 많은 분들의 응원과 격려로 저는 약 6개월 동안 재활을 마치고 무사히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대대로 복귀한 후에 소대원들을 다시 만났고, 그리고 지뢰를 밟았을 때 제 대원들을 먼저 살폈던 것을 인정받아서,

국방부에서 가장 영예로운 상인 위국헌신상도 수상을 했습니다.

 

위국헌신상

 

하지만 복귀하고 나니까 비로소 부족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부산 군인에 관한 법과 규정인데요. 저는 다치면 바로 국가유공자가 되는 줄 알았어요.

근데 현행법상 국가유공자는 전역한 사람만 신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을 하냐면요. 

 

지원 공백

 

전역하기 전에는 국방부의 지원을 받지만, 국가유공자를 신청하기 위해 전역을 하고,

최종적으로 국가유공자가 되기 전까지는 정부 부처 어느 곳으로부터도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간기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혹시 보훈부에서 요건을 인정받지 못하거나 등급 외 판정이 나오게 되면요.

그 기간은 수년 간으로 길어질 수 있어요. 

 

전숭보 병장

 

전숭보라는 친구가 있는데요.

18년 1월에 버스 전복으로 척수 장애를 얻게 되고 휠체어 생활을 하게 됐어요.

21년 1월에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기 위해 전역을 했고요.

최종적으로 22년 1월에 국가보훈 대상자로 등록이 됩니다.

 

약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 친구는 재활과 치료를 정부 부처 어느 곳으로부터도 지원받지 못하고 혼자 했어야 했어요.

 


 

 

그리고 이분은 군복무 중에 동상으로 발가락 2개를 절단을 했는데요.

놀랍게도 발가락 2개 절단에 대한 보상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면, 현행법상 발가락 3개 절단부터 최소 등급이 나오고 보상을 받을 수 있거든요.

 

 

저도 임관 전에는 제가 다칠 것이라고 생각을 못했고요. 저처럼 다친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어요.

근데 지뢰를 밟고 나니까 이렇게 다친 친구들이 보이기 시작했고요.
매년 1천 명에 가까운 인원들이 군 복무 중에 저처럼 중증으로 다치고 전역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뢰를 밟고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에서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저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었고 전역을 해서 이들을 지원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삶이겠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전역을 하게 됐고, 22년 3월에 전국에서 최초로 군 복무 중에 다친 부상 군인들을 지원하는 서울시 청년 부상 제대군인 상담센터를 만들었습니다.

 

 

네 저희 센터는 크게 네 가지 사업을 하고 있어요. 

첫 번째로는 군 복무 중에 다친 보상에 대한 법률 지원이고요.

두 번째로는 트라우마 회복을 위한 심리지원 

그리고 세 번째는 사회 복귀를 위한 취업 지원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보훈 선양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센터를 개소하고 지금까지 300명이 넘는 분들이 저희 센터를 찾아주셨고, 1천 건이 넘는 상담을 실시했어요.

 

그분들을 만나면서 그분들에게 필요한 게 크게 두 가지더라고요.

첫 번째로는 군 복무 중에 다친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고요.

두 번째는 나라를 지키다 다쳤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 그들의 명예를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보상은 법령이 바뀌면 생각보다 빠르게 해결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들의 명예를 되찾는 것은 바로 여러분들 국민들이 인정해주고 감사함을 표현해야 바로 그분들의 명예를 되찾는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년 4월에 제가 대통령 방미 일정에 보훈 인사로 같이 미국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많은 영웅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한 시간이었는데요.

일정 중에 만찬이 있었고 만찬 중에 제가 다치고 그리고 저처럼 다친 군인들을 돕는다는 것을 얘기한 스피치를 간단하게 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스피치가 끝나고 한 교포분이 와서 저에게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해 주시면서 포옹을 해주시더라고요.

 

 

제가 다친 지 4년 가까이 되는 시점이었지만 제가 스스로 "나라를 지키다 다쳤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한테 "어떡하니 너 불쌍해서 어떡해 괜찮니?"라고 걱정해 주신 분들은 있지만,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얘기한 분은 그분이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부상 군인들의 명예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그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으로 느낀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고요. 미국에 가서 가장 크게 배우고 온 부분 중에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지뢰를 밟고 차량으로 후송되는 과정 중에 차량이 잠깐 또랑에 빠진 적이 있어요.

그때 제 부서 초장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그래도 내가 밟아서 다행이라고,

 

내가 밟아서 다행이다

 

다친 지 5년이 다 돼가는 시점이지만, 내가 밟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은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어요.

만약에 그날 운 나쁘게 제가 지뢰를 피해 갔더라면 다음 날 제 부하 중에 한 명은 그 지뢰를 무조건 밟았을 거고요.

그렇게 됐다면 제 발은 멀쩡했겠지만, 마음에 평생에 장애가 남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다침으로써 제 군 생활의 목표인 제 소대원들 안 다치고 무사히 전역시키는 제 군 생활의 목표를 이룰 수 있어서 지금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때 수많은 군인들이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군인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 있어요.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 그리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은 70년 전에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 계신 군인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지금도 이 나라를 지키고 계신 군인분들을 보면 한번 이렇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요. 

지금까지 이주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