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대표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투자자들이 갖고 있는 주식을 넘기고 물러나라고 한다는 겁니다.
"저 어떡해요? 저쪽에서는 제가 물러나지 않으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신용불량자로 만들어 버리겠대요"
이러면서 대표는 엉엉 울었습니다.
울컥한 나머지 저절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더라고요.
안녕하세요. 정호석입니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성공한 스타트업에 대한 얘기 많이 들어보셨을 것 같아요.
회사를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매출이 수백억 수천억이 됐다거나 창업자가 지분을 매각해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 그런 이야기요.
저도 스타트업 업계에서 일하기 전까지는 이런 소식을 들으면
'와 부럽다. 그럼 1년에 도대체 얼마를 번 거야? 대박이네.
나도 그 아이템 예전에 생각했었는데 그때 내가 했어야 되는데 아 아쉽다.'
저도 여러분처럼 그랬습니다.
너무 부러웠고 너무 부러운 만큼 그 성공에 운이 많이 작용했을 거라는 억지스러운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제 생각을 바꾸게 된 건 스타트업들과 몇 년을 일하면서 대표들을 옆에 가까이 지켜보고 난 뒤부터였습니다.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감을 잡은 분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스타트업들과 IT회사들을 자문하는 변호사입니다.
벌써 11년째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회사가 중요한 계약을 체결하거나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때, 그리고 투자를 받거나 사업을 매각할 때 경영을 하면서 다툼을 할 때 이 모든 게 법률에 근거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저는 많은 회사들과 일할 기회가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 볼게요.
몇 년 전에 제가 번아웃이 심하게 와서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모든 걸 접고 휴가를 갔던 적이 있습니다.
이 시간 동안에는 절대로 이메일을 보지도 않고 전화도 받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습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쉬는 것도 어렵더라고요.
그렇지만 며칠을 노력해서 조금 쉴만할 때, 아는 대표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투자자들이 대주주이자 대표인 자신한테 갖고 있는 주식을 넘기고 물러나라고 한다는 겁니다.
"저 어떡해요? 저쪽에서는 제가 물러나지 않으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신용불량자로 만들어 버리겠대요."
이러면서 대표는 엉엉 울었습니다.
저도 무척 놀랐습니다.
제가 아는 대표는 너무 순하고 그런 상황을 만들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더욱더 대표가 처한 상황이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경영상 판단을 잘못해서 매출이 조금 나오지 않았을 뿐 투자 계약을 위반한 것도 없었고요.
투자자들은 오해 때문에 지나치고 근거도 없는 요구를 했는 걸로 보였습니다.
대표가 계속 우는 모습을 보니까 제가 평소 무뚝뚝한 편인데 울컥한 나머지 저절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더라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투자자들의 요구 근거 없어요.
제가 법 전문 가니까 제 말이 정확합니다. 저를 믿으세요. 제가 대표님을 지켜드릴게요."
부랴부랴 귀국해서 바로 미팅을 하고 바로 법적인 대응에 들어갔습니다.
몇 달에 걸쳐 투자자들 그리고 이러한 사태를 만든 이사와 때로는 다투고, 또 때로는 대화를 하면서 상황을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대표님은 건재하고요. 회사 역시 잘 되고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해피엔딩이죠.
이번에는 다른 에피소드 하나 더 말씀드릴게요.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해서 높은 가격에 그 회사를 매각한 다음 한국에 들어온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실리콘밸리에서 봤던 선배 창업자들이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고 후배들은 이를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그런 문화가 너무너무 부러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후배들이 창업하면 돈도 투자해 주고 노하우를 전달해 주기 위해 투자 회사를 만들고 싶다고 했습니다.
뜻깊은 일에 함께하게 돼서 정말 기뻤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회사도 설립했고 투자 계약서를 만드는 것까지 법률적인 사항들을 완전히 맡아서 진행을 했습니다.
제가 당시에 한국에서 많이 통용되는 형태로 투자 계약서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그 계약서를 쭉 읽더니
"왜 이렇게 창업자에게 불리하게 만들었어요?"
저는 이런 이상한 한국 문화를 바꾸고 싶어요.
투자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 빼고 창업자에게 불리한 건 모두 빼주세요.
투자자들과 투자 계약서를 만드는 일을 정말 많이 해봤는데, 투자자가 자신이 아니라 창업자들을 위해서 계약서를 쓰자고 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습니다.
전 정말 감동했고요.
그 대표님이 정말 훌륭하게 생각이 됐습니다.
변호사인 저한테는 착한 척을 못 합니다.
그러면 저는 진짜 계약서를 착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그런데 어느 날 그분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정부 보조금을 편취하고 후배 창업자들을 착취했다는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되었다는 거예요.
계약서를 포함한 모든 문서를 만들고 검토한 저는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표님에게 물어봤습니다.
"혹시 제가 모르는 계약서가 있어요? 아니면 저한테 이야기 안 한 상황이 있나요?"
대표님은 당연히 없다고 했습니다.
검찰 조사를 받는 분위기는 달랐습니다.
스타트업 창업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저희가 제시하는 객관적인 증거들은 보지도 않고 저희 쪽 이야기는 제대로 들을 생각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서 말도 안 되는 프레임을 씌워서 결국은 대표님을 구속하고 기소까지 했습니다.
정말 화가 나더라고요.
대표님은 1심부터 3심까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다행히도 억울함을 풀 수 있었죠.
물론 매일매일 저에게 이런 일들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계약서를 검토하는 것 같이 일상적이고 기분 좋은 업무를 하는 날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수십억, 수백억의 투자를 받는다거나, 자기가 평생 피땀 흘려 일궈온 회사를 매각한다거나,
경영권 분쟁으로 회사에서 내쫓길 상황에 처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은 평생 한 번도 겪을까 말까 한 일들을 저는 매우 자주 겪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신적으로 힘든 날도 많습니다.
그들의 부담감이 완전히 저한테 전달이 되거든요.
하지만 누군가의 인생에 정말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할 수 있고, 누군가의 인생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느낄 때,
제가 느끼는 보람과 성취감은 이런 피곤함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이런 자리가 마련되면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창업가들은 밖에서 보는 것만큼 순탄한 과정을 거쳐서 화려한 결과를 얻는 게 아닙니다.
마치 운동 선수가 메달을 따는 모습 뒤에 수많은 시간을 들여 연습을 했던 것처럼요.
힘든 과정들을 오롯이 견뎌내고 여러분들이 쓰고 있는 수많은 좋은 제품들과 좋은 서비스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결국 이들이 어려운 환경을 좀 더 잘 견뎌낼 수 있고, 힘을 낼 수 있도록 해줘야지
우리 모두의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경험을 해보면 우리는 창업가와 스타트업의 실패에 대해서 너무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패를 했을 때 그 실패에 대해 원인을 찾고, 누군가에게는 법적 책임을 추궁하려고 하는 그런 문화가 있습니다.
한국은 창업 선진국과는 계약서 작성 방향에서부터 차이가 있습니다.
창업 선진국의 계약서는 잘될 때 어떻게 이익을 명확하게 나눠줄 수 있는지 거기에 중점을 둡니다.
투자 계약서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선진국에서는 투자를 했을 때 회사가 잘 되면 어떻게 나중에 그 이익을 나눌지 절차나 방법에 대해서 상세히 다룹니다.
한국 계약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잘 되지 않으면 누구에게 책임을 추궁해야 되고 어떤 책임을 추궁해야 될지 바로 거기에 중점을 두고 다룹니다.
실제로 지금 스타트업들이 많이 사용하는 투자 계약서에서는
회사가 잘 안 됐을 때 투자자가 회사뿐 아니라 창업자에게 투자금에 이자까지 덧붙여서 청구할 수 있는 여러 개의 장치들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업자들은 투자를 받을 때마다 혹시 내가 최선을 다해 업무를 했지만 신용불량자가 되는 거 아니야? 걱정을 하면서 계약서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저는 더 많은 사람이 성공할 수 있도록 하고, 성공으로 인한 혜택이 사회에 골고루 퍼져 나갈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야지 실패를 줄여서 손실을 막는 데 목적을 두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창업가들의 성공은 사회의 공이자 풍요로움으로 돌아올 거니까요.
그걸 악용하는 사람들한테는 법적으로 추궁을 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평판 하락을 통해서 다시는 그 업계에 발을 못 붙이게 하는 것처럼 사회의 자율적인 시스템을 통해서 충분히 억제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계약서에 여러 책임을 명시하지 않아도 사기횡령, 그리고 배임과 같이 억제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드라마나 뉴스에서 비춰지는 변호사는 부도덕하고 돈만 좇는 그런 사람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스타트업들이 어떻게 하면 더 잘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안전하게 사업을 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지,
그들의 성공과 무관하게 그들의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이익만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자금이 풍부하지 않은 스타트업들이 저에게 주는 보수가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받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주기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 창업가 그리고 그들 곁에 있는 스타트업 생태계 구성원들에게 조금만 더 따뜻하고 너그러운 시선을 부탁드립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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