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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릴 수 있었던 환자가 더 기억납니다 — 외상외과 의사 15년의 변곡점 | 세바시 1956회 정경원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의 모티브가 된 이국종 교수의 1호 제자, 정경원 박사가 세바시에서 15년의 기록을 풀었습니다. 그 사람이 도움이 필요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을 때의 먹먹함 — 외상외과 의사가 15년 동안 매일 마주한 감정이 거기 있습니다. 이번 강연은 "살린 환자보다, 살릴 수 있었는데 죽어간 환자가 더 기억에 남는다"는 단 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문장이 한국 외상센터의 예방가능사망률을 30%에서 9.1%까지 떨어뜨린 사람의 진심입니다.

📌 한 줄 요약

외상외과 의사 정경원 박사가 풀어내는 15년의 기록 — 책상에서 자던 1년, 두 살 민건이의 죽음, 그리고 미국 상위 1%까지 올라선 한국 외상센터의 변곡점. 시스템은 어떻게 사람을 살리는가에 관한 가장 솔직한 답변.

⭐ 추천 점수

★★★★★ 5/5 — 32분 동안 한 의사의 손과 가족, 환자와 통계, 좌절과 변화를 한 줄로 꿰는 흔치 않은 강연. 드라마 〈중증외상센터〉를 봤다면 반드시 함께 봐야 할 '현실 편'.

👥 이런 분께 추천해요

드라마 〈중증외상센터〉를 본 사람 —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는 현실의 무게가 여기 있습니다.

지금 일이 너무 힘든 사람 — 1년에 집에 4번 간 사람이 어떻게 견뎠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를 견디게 했는지.

시스템·정책·조직을 만드는 사람 — '왜 같은 사고에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는가'에 대한 통계와 지도, 그리고 시스템 설계의 본보기.

📑 목차

1. 살린 환자보다, 살릴 수 있었던 환자가 더 기억난다
2. 2010년 그 환자, 그리고 1년에 집에 4번 간 의사
3. 출혈, 그리고 5분 — 외상 환자가 왜 죽는가
4. 혼자서는 살릴 수 없다 — F1 정비팀처럼 짠 외상 시스템
5. 두 살 민건이 — 골든타임을 놓친 죽음, 지리의 운명
6. 샌디에이고에서 배운 것 — 데이터와 지도가 사람을 살린다
7. 9.1%, 미국 상위 1% — 그리고 "평생토록 간직하겠습니다"

 

세바시 1956회 —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하는 '죽지 않아도 될 죽음' (정경원 외상외과 의사)

 

왼쪽 검은 배경의 무대 위 강연자 정경원 박사 portrait + 오른쪽 흰 배경에 '월간 세바시 3월 / 나답게, 다시 시작 / 정경원 / 아주대학교병원 권역외상센터장, 경기도 외상체계지원단장 /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하는 죽지 않아도 될 죽음' 카드
정경원 ❘ 아주대학교병원 권역외상센터장, 경기도 외상체계지원단장 —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하는 "죽지 않아도 될 죽음"' (세바시 1956회 / 월간 세바시 3월 〈나답게, 다시 시작〉)

 

15년의 외상외과 의사가 본, '죽지 않아도 될 죽음'

1. 살린 환자보다, 살릴 수 있었던 환자가 더 기억난다

강연은 드라마 〈중증외상센터〉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백강혁처럼 천재 외과 의사가 모든 환자를 살려내는 장면 — 현실은 다릅니다. 정경원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15년 동안 이 외상외과 의사로서 일하면서 살려낸 환자보다 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죽어간 그 환자들이 기억에 더 많이 남습니다."

여러 언론이 외상센터를 방문해 "드라마처럼 드라마틱하게 살아난 사례"를 묻는다고 합니다. 그런 사례도 며칠 밤을 새서라도 말할 수 있지만, 의사가 진짜 짊어진 무게는 그게 아닙니다. "살릴 수 있었는데 못 살린" 죽음을 매일 떠올리는 일 — 그것이 외상외과 의사의 일상이라는 솔직한 고백으로 강연은 출발합니다.

2. 2010년 그 환자, 그리고 1년에 집에 4번 간 의사

 

무대 좌측 프로젝션 스크린에 KBS 9시 뉴스 화면, 이국종 아주대병원 외상외과 교수 인터뷰, 하단에 '같이 근무하는 정경원 선생이라고, 지난해 일 년에 집에 네 번 갔어요' 자막
이국종 교수의 KBS 9시 뉴스 인터뷰 — '정경원 교수가 1년에 집에 4번 갔어요'

 

2010년, 정경원 박사가 아주대병원 외상외과 의사 첫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 고속도로 사고로 유리를 뚫고 튕겨나간 40대 남성이 실려옵니다. 후배 출장에 동석했다가 사고가 났고, 그 당시 한국에는 헬기가 앉을 수 있는 병원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른 병원을 거쳐 결국 정 박사 손에 도착했을 때, 환자는 이미 식물인간 상태였습니다.

두 딸을 둔 그 환자의 가족이 응급중환자실 복도에서 교대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정 박사는 도저히 집에 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책상 위에 담요를 깔고 잠을 청한 적도, 창문도 없는 2평 남짓 방에서 1년 가까이 지낸 적도 있습니다. "일 년에 집에 네 번 갔어요. 한 번은 정경원 교수 락카 앞에 이게 붙어 있었어요. '아빠 빨리 오세요.'" — 이국종 교수가 9시 뉴스에서 한 인터뷰입니다.

이게 한 개인의 헌신 이야기로 끝나면 안 됩니다. 그 시절에는 전체 외상 사망의 30% 이상이 "살 수 있었는데 죽어간" 죽음이었고, 1년에 적어도 수천 명의 환자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한 사람이 책상 위에서 자는 걸로 막을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던 겁니다.

3. 출혈, 그리고 5분 — 외상 환자가 왜 죽는가

외상 환자의 가장 흔한 사망 원인을 정 박사는 이렇게 가르친다고 합니다. "1번 출혈, 2번 출혈, 3번 출혈." 우리 몸의 혈액량은 약 5리터(70kg 기준). 그중 30~40%가 빠져나가면 심장이 멈추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넙니다.

강연에서 보여준 수술 동영상에서 새끼손가락만 한 장골동맥의 바늘구멍 같은 작은 손상 — 그곳에서도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10cc씩 피가 솟구칩니다. 분당 100회면 5분 만에 4~5리터를 다 쏟습니다. 이런 환자를 살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의학 드라마의 천재 의사 한 명으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4. 혼자서는 살릴 수 없다 — F1 정비팀처럼 짠 외상 시스템

 

외상팀 구성을 설명하는 도식 슬라이드, 중앙 환자 주변에 12명의 의료진 위치(Dr. 1·2·3, RN. 1 Airway, RN. 2 Exposure, RN. 3 Circulation, Scribe Nurse, Nurse assist, Radiographer, Administration, Team Leader)가 표시됨
TRAUMA TEAM CONFIGURATION — 외상팀 구성 도식 (Dr.1·2·3 + RN.1 Airway·2 Exposure·3 Circulation + Team Leader + Scribe Nurse 등)

 

정 박사가 찾은 답은 "F1 경기에서 자동차 정비를 할 때처럼" — 여러 사람이 동시에 자기 자리에서 동시에 일하는 시스템입니다. 의사 2~3명, 간호사 3~4명, 영상의학기사까지 항상 대기하고 있다가, 환자가 도착하는 순간 각자 정해진 역할을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합니다.

2013년 7월 사업 대상 선정 → 2016년 6월 공식 개소한 아주대학교병원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는 이 시스템 위에 세워졌습니다. 거기에 더해 한 가지 더 — 전국 최초로 외상센터에 오형 혈액을 직접 비축했습니다. 혈액원에서 가져오는 데 걸리는 10~15분 사이에도 환자 심장은 멈출 수 있으니까요. "빈 심장을 짜지 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피 자체가 없으면 심폐소생술도 무의미합니다.

5. 두 살 민건이 — 골든타임을 놓친 죽음, 지리의 운명

 

객석에 앉은 여성 청중이 눈가가 촉촉해진 표정으로 강연을 듣는 모습
민건이 사례에서 객석의 감동 어린 표정 — 외상센터 시스템이 닿지 못한 곳의 죽음

 

2016년 9월 30일 금요일, 외상센터를 개소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입니다. 두 살 김민건. 견인 트럭이 후진하다 깔린 사고. 가까운 병원에서 처치가 되지 않았고, 받아주는 병원이 없었고, 사고 한참 뒤에야 정 박사에게 연락이 옵니다. 헬기를 띄우는 사이 아이는 심정지가 왔고, 사고 7시간 만에 도착했지만 — 결국 사망했습니다.

민건이 혼자 사고 난 게 아니었습니다. 할머니도 사망했고, 누나도 다쳤습니다. 그 누나는 며칠 뒤 상태가 안 좋아져 다시 갈 병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동생과 할머니가 죽은 병원에 가족이 다시 갈 수 있을까요. 그 사고가 이슈가 되자 인근 병원들도 받지 않으려 했습니다.

외상학 교과서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외상 환자 치료 결과는 사고가 발생한 지리적 위치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민건이가 미국 어느 곳에서 똑같은 사고를 당했다면, 살았을 거라는 말입니다.

6. 샌디에이고에서 배운 것 — 데이터와 지도가 사람을 살린다

 

무대 좌측 스크린에 미국 샌디에이고 카운티 지도 슬라이드, 5개 트라우마 센터(Palomar Health, Scripps Memorial, Rady Children's, Sharp Memorial, Scripps Mercy, UCSD)가 지역별로 색깔로 구분되어 표시됨
미국 샌디에이고 지역외상체계 — 인구 330만, 면적 11,720km²에 5개 성인 외상센터 + 1개 소아 외상센터

 

민건이 사건 직후 2017년, 정 박사는 미국 샌디에이고로 연수를 갑니다. 그곳의 예방가능사망률은 2.4% — 같은 기간 한국이 30%를 넘었던 것과 비교가 안 됩니다. 게다가 그 2.4%마저 2000년대 초반 사례였고, 2010년대 이후엔 거의 0에 가까웠습니다.

비결은 한 가지로 압축됩니다. "인구·면적·도로 데이터에 근거해 외상센터를 지역별로 배치하고, 30분 안에 90% 이상의 외상 환자가 외상센터에 도착하게 만든다." 샌디에이고는 5개 성인 외상센터 + 1개 소아 외상센터가 지역을 나눠 책임집니다. 서쪽은 도로가 잘 발달돼 구급차가 빠르고, 동쪽 사막 지역은 사고가 나면 즉시 헬기가 뜹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17개 권역외상센터가 시·도 단위로 나뉘어 있습니다. 인구가 아니라 정치 단위. 정 박사는 "정치가 의료를 망치고 있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외상 환자는 인구에 비례해 발생하기 때문에, 지도가 없으면 시스템도 없는 셈입니다.

7. 9.1%, 미국 상위 1% — 그리고 "평생토록 간직하겠습니다"

 

고속도로 CCTV 화면 위에 '[사고] 사고발생' 자막, 사고 현장에 구급차와 헬기가 출동한 모습, 우측에 강연자 정경원 박사
고속도로 사고 헬기 출동 CCTV — 헬기 2대 동시 출동, 24시간 이송 체계

 

연수 다녀온 후 정 박사는 헬기 이송 지침을 정비합니다. "30분 이상 걸릴 것 같으면 무조건 헬기." 급기야는 병원 뒷마당에 헬기를 대기시켰습니다. 그러자 5~10분이 단축되고, 많은 사람들이 살아났습니다. 4살 여자아이, 골반을 타고 트럭이 넘어간 20대 여성 — 모두 잘 걸어서 외래를 다닙니다.

 

아주대병원 경기남부 권역외상센터의 ACS TQIP 벤치마크 결과 그래프 슬라이드, 500여 개 미국 외상센터의 Odds Ratio 비교 차트에서 한국 외상센터가 상위 위치에 표시됨
ACS TQIP 벤치마크 결과보고서 — 미국 500여 개 외상센터 중 상위 1% 사망지수 0.52

 

한국 정부 목표는 2025년까지 예방가능사망률 10% 미만이었습니다. 경기도는 2021년 기준 9.1%로 5년 먼저 달성했습니다. 미국외과학회(ACS)의 외상센터 질 관리 프로그램 TQIP에 데이터를 보냈더니, 정 박사 외상센터의 사망지수가 미국 평균의 0.52배 — 상위 1%로 측정됐습니다. 두 배 이상 살리는 셈입니다.

물론 끝나지 않았습니다. 2.6%, 9.1% — 아직도 살 수 있는데 죽어가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정 박사는 "이 일은 혼자 할 수 없다. 어느 한 포인트의 문제로 환자가 사망하고, 어느 한 사람의 잘못으로 사망했다는 식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라고 못 박습니다.

 

흰 종이에 손글씨로 적힌 짧은 편지 — '존경하는 정경원 교수님, 우리 아들 살려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교수님에게 얻은 행복 평생토록 간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환자 보호자가 보낸 손편지 — '교수님에게 얻은 행복 평생토록 간직하겠습니다'

 

강연 마무리에 정 박사가 꺼낸 건 환자 보호자의 짧은 쪽지였습니다. 복부 관통상으로 실려왔던 20대 남자 환자의 아버지가 적었다는 글. "교수님에게 얻은 행복 평생토록 간직하겠습니다." 정 박사는 "저는 제 위치에서 그냥 제가 하는 일을 했었을 뿐인데, 이게 누군가에게 평생 행복이 됐다는 건 얼마나 보람차고 축복인지"라고 말합니다.

✍️ 내가 밑줄 친 세 문장

"저는 지금까지 15년 동안 이 외상외과 의사로서 일하면서, 살려낸 환자보다 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죽어간 그 환자들이 기억에 더 많이 남습니다." — 정경원

"외상 환자 치료 결과는 사고가 발생한 지리적 위치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똑같은 사고가 나도 외상 체계가 잘 되어 있는 곳에서 사고가 났으면 죽지 않아도 될 죽음이다." — 정경원 (외상학 교과서 인용)

"교수님에게 얻은 행복 평생토록 간직하겠습니다." — 환자 보호자 쪽지

📝 블로거 한 줄 후기

정 박사의 강연이 알려준 건 그 후회를 한 개인의 의지로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시스템이 없으면, 지도가 없으면, 옆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돌아가는 팀이 없으면 누구도 못 막습니다. 청각 접근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듣는 사람이 좀 더 노력하면 되겠지'가 아니라, 자막·통역·문자안내가 일상 인프라로 깔려야 비로소 한 개인이 일을 그만두지 않을 수 있어요. 한 사람이 책상 위에서 자지 않아도, 한 사람이 입 모양에만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결국 같은 원리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정 박사가 마지막에 꺼낸 그 쪽지 한 줄 — '교수님에게 얻은 행복 평생토록 간직하겠습니다' — 은 모든 보이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위로처럼 들렸습니다.

💡 오늘, 단 한 가지만 해본다면

지금 내가 속한 조직·관계·일에서 "어쩌면 살릴 수 있었는데"라는 후회가 반복되는 한 가지 지점을 종이에 적어보세요. 그리고 그게 정말 한 개인의 문제인지, 아니면 시스템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인지 한 줄로 적어보는 겁니다. 시스템 문제로 보이면, 그걸 누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한 줄 더. 정 박사가 15년 동안 한 일이 정확히 그것이었습니다.

📚 더 보면 좋을 자료

이국종 교수의 세바시 797회 〈세상은 만만하지 않습니다〉를 함께 보면 한국 외상 시스템의 시작과 현재가 한 줄로 이어집니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 그리고 정 박사의 모티브가 된 이국종 교수의 저서들도 같이 권해드립니다.

♥ 살릴 수 있었던 사람을 기억하는 모든 분께, 이 글이 작은 위로가 되기를. 좋아요와 댓글, 이웃 추가는 다음 회차 정리에 큰 힘이 됩니다.

 

 

강연자 정경원 박사 portrait (썸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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