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품만 완성해 보자. 그 이후의 삶은 그 후에 고민하자." 25살의 정유미는 그 마음으로 〈먼지아이〉라는 10분짜리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그 작품이 한국 애니메이션으로는 처음으로 칸 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됐고, 전 세계 80개국에서 상영됐다. 그런데 그 화려한 결과의 끝에서 그는 이상하게 더 자유롭지 않았다. 7년의 침체기를 거쳐 16년 뒤 그가 도착한 자리는, 마음속에서 가장 미워했던 자기 모습을 처음으로 안아 주는 한 컷이었다.
📌 한 줄 요약
정유미 애니메이션 감독이 풀어내는 16년 — 〈먼지아이〉의 칸 영화제 초청과 〈안경〉의 16년 뒤 같은 자리 사이에서, 자기 내면의 비판자와 어떻게 화해했는가에 대한 정직한 고백.
⭐ 추천 점수
★★★★★ 5/5 — 창작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만나는 내면의 비판자를 이렇게 단단하게 다룬 강연은 흔치 않다. 결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흔한 신화에 정확히 반대편에 서는 17분.
👥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창작·작업·연구를 하면서 자기 작품을 가혹하게 평가하는 내면의 비판자 때문에 멈춰 본 경험이 있는 분
"성공하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라는 약속이 사실은 어디로 흐르는지 궁금한 분
정유미 감독의 〈먼지아이〉, 〈존재의 집〉, 〈안경〉 같은 작품의 뒷이야기가 궁금한 분
📑 목차
4.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먼지아이〉, 그리고 칸
먼지아이부터 안경까지 16년 — 정유미 감독이 자기 내면을 안아 주기까지
1. 부산 해운대 작업실의 작은 풍경
"안녕하세요. 저는 짧은 애니메이션과 그림책을 만들고 있는 정유미라고 합니다." 강연은 그가 만든 작품 한 편의 짧은 영상으로 시작한다. 부산 해운대 바다를 배경으로 만든 작품이다. 고층 건물 사이로 작게 보이던 바닷가에 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연극처럼 등장해 파도의 반복 속에서 잠깐 머무르다 떠나는 모습을 담았다.


"보통 이런 10분짜리 애니메이션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서 저는 1년에서 2년 가까운 시간을 들여 작업합니다. 대부분은 혼자 책상 앞에 앉아 긴 시간을 보냅니다." 이 작업 환경은 평소 사람들과 소통이 서툴렀던 그가 이 직업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고 그는 말한다.

"평소에 감독이나 작가는 작품으로 표현하면 되지, 굳이 본인을 드러낼 필요가 있나 라고 생각하면서 작품 뒤에 숨는 게 저는 좀 더 익숙했습니다." 좋아하는 감독들 중에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분들도 꽤 있어서, 그런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2. 내 안의 사우론의 눈 — 끝나지 않는 비판자
"하지만 더 솔직한 제 마음을 들여다 보니, 저의 서툴고 어색한 모습을 제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게 더 정확한 이유였습니다." 그의 안에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가혹한 시선이 있다. 그는 그 존재를 〈반지의 제왕〉 속 사우론의 눈에 비유한다.

"이 존재는 저를 계속 감시하면서 말합니다. 과연 사람들이 너의 이야기가 궁금할까? 내 얘기를 하기엔 조금 부끄럽지 않니? 지금의 너는 부족하니까 더 밝고 능력 있고 자신감 있는 사람이 되어야 인정도 받고 사랑받을 수 있을 거야." 그는 청중을 향해 한 번 더 묻는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이런 목소리가 종종 들리시지는 않으신가요?"

"아마 내용과 정도만 다를 뿐 누구나 자신만의 냉혹한 비판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유미 감독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속 목소리처럼 자신을 평가할까 두려워서 최대한 방어적이고 조심스럽게 몸을 사리며 살아온 것 같다고 고백한다.
3. 마음의 풍경에 생명을 불어넣다
어느 날 문득 자기 모습을 돌아보니, 움직일 수 있는 폭이 굉장히 좁아져 있었다. "이런 아픔을 느끼지 않으려다 보니 그 대가로 저는 자유를 점점 잃어 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는 자신을 보호하겠다고 만들어 온 그 벽을 어떻게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다.

애니메이션이라는 단어의 어원에서 그는 답을 찾는다. 라틴어 'anima'는 생명·영혼을 뜻한다. 영어 동사 animate는 "생명을 불어넣다, 활기를 주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정지된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 바로 애니메이션입니다." 그가 작업을 시작하게 된 건 아마도 자기가 그린 마음의 풍경에 생명을 넣어 보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감정·고민·질문들을 그림에 형상화하고, 그것을 움직임에 넣고, 그렇게 이야기로 만들어서 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열망과 별개로 창작을 하며 사는 삶은 현실적으로 막막했고, 무엇보다 그 가혹한 비판자와 함께 작품을 만들어 가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4.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먼지아이〉, 그리고 칸
한 가지 분명한 건, 어려움을 견디는 것보다 해결되지 못한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지 않고 살아가는 게 더 힘들 거라는 직감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당시 자기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을 했다. "딱 한 작품만 완성해 보자. 그 이후의 삶은 그 후에 고민하자."

그렇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만든 작품이 〈먼지아이〉다. 방을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고 방치하던 유진이라는 인물이 늦은 밤 깨어나 집 안 구석구석에 숨은 먼지 아이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이야기. "평소 마음 속에 불편하고 아픈 감정들이 느껴지면 일단 외면하고 밀어내려 하는 저의 모습을, 영화 속 주인공 유진이 먼지를 가차 없이 닦아 내고 쓸어 내서 없애 버리는 모습으로 은유해서 표현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10분짜리 작품은 한국 애니메이션으로는 처음으로 칸 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됐다. 칸 첫 상영 후 전 세계 80개가 넘는 나라에서 상영되며 여러 상을 받았다. 〈수학 시험〉과 〈연애놀이〉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연속 초청됐고, 〈연애놀이〉는 자그래브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그랑프리를 받았다.

〈먼지아이〉와 〈나의 작은 인형 상자〉는 그림책으로도 출간됐고,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볼로냐 라가치 상을 2년 연속 받았다. "한 작품만 만들어 보면 좋겠다고 시작했던 저로서는 이 모든 성과들이 사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로서의 삶을 진짜로 살아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5. 성공 뒤에 더 무겁게 돌아온 비판자
"그런데 정작 그 이후의 삶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일을 하고, 인정도 받고 상도 받으면, 내면의 가혹한 비판자도 누그러져 자기를 받아들여 줄 거라고 기대했다. 연약하고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나 더 편안하고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제 마음은 오히려 처음 작업을 시작했을 때보다 점점 더 어렵고 자유롭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기존에 있던 열등감, 수치심은 사라지기는커녕 또 다른 모습으로 돌아와 더 높은 기준을 들이밀면서, 작품의 결과와 얽혀 더 무섭고 무겁게 저에게 돌아왔습니다."
잠시 만족스러운 순간들도 있었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처음 도망쳤던 바로 그 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마치 닦아내어도 계속 쌓이는 먼지처럼요." 막다른 벽에 부딪힐 쯤 그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부산으로 돌아왔다.
6. 부산 7년, 그리고 〈존재의 집〉
처음에는 팍팍한 서울 생활에서 벗어나 따뜻하고 여유로운 부산이 좋았다. 작품 심사와 타인의 평가에서도 벗어날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깨달았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만드는 일 말고는 딱히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요."

그렇게 7년이 흘렀다. "그 7년 동안 저는 돈 버는 일도, 살림도, 마음도 편하지 않은 사람으로 긴 시간을 보냈고, 결국 그 7년의 시간 끝에 저는 제 내면의 비판자가 그토록 두려워하고 미워했던 무능력하고 무기력하고 초라한 저의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모습을 만나고 나니 알게 됐다. "진짜 고통은 그 모습 자체가 아니라 그 모습을 외면하려고 도망다닌 시간이었다는 걸요." 그는 다시 연필을 들었다.


7년 만에 만든 작품이 〈존재의 집〉이다. 단단해 보이는 한 채의 집이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담았다. 벽이 무너지면서 공간을 채우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노출되고 사라져 가고, 끝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한 사람이 남는다. "이 사람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도,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은 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이 무너져 가는 집은 그동안 그가 붙잡고 있던, 자기를 이루고 있다고 믿었던 가치들의 상징이었다. 〈존재의 집〉을 시작으로 올해 5월 완성한 〈안경〉까지 4년간 5편의 애니메이션을 부지런히 만들었다. "여전히 작업 과정 자체는 굳됐지만 마음은 편안하고 홀가분했습니다."
7. 〈안경〉 — 16년 만의 한 번의 포옹
"여전히 마음 속에는 나를 검열하고 비난하는 비판자가 존재하지만, 대신 이전엔 제 곁에 없었던 — 아픈 제 감정을 안아주는 따뜻한 내면의 존재가 생겼다는 점입니다."
가장 최근작 〈안경〉으로 올해 프랑스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에서 첫 상영을 가졌다. 16년 전 〈먼지아이〉로 처음 칸 영화제에 갔던 그 자리에 다시 섰다. 〈안경〉은 주인공이 깨진 안경을 새로 맞추기 위해 안경점을 찾아가면서 시작한다. 시력 검사 때 그 검안기 속에서 보이던 빨간 지붕 집을 기억하시는지. 주인공 유진이 그 들판을 가로질러 집 안으로 들어가고, 세 개의 공간에서 자기 그림자들을 하나씩 만나는 이야기다.
"이 작품 속 그림자 캐릭터들은 저의 예전 작업 〈먼지아이〉와 동일한 존재입니다. 받아들이기 힘들고 미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은유하는 존재들입니다." 〈안경〉과 〈먼지아이〉는 결국 같은 주제지만 결말이 조금 다르다. "〈먼지아이〉에서는 주인공이 먼지 아이와 함께 밥을 먹는 데 그쳤다면, 〈안경〉에서는 그 존재를 꼭 껴안아 줍니다."
"이 작은 포옹 하나가 저에게는 16년이 걸렸습니다. 누군가에겐 아무 일 아닐 이 작은 포옹이 저에게는 참으로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요즘 불안하고 아픈 감정이 올라올 때 그 느낌 곁에 머무르려고 노력합니다. 도망치기보다는 마음 옆에 앉아서 감정을 좀 바라봅니다. 그렇게 느끼다 보면 마음 속 아픈 느낌은 조금씩 누그러지더군요." 평생의 습관이 있어 쉽지 않을 때도 있지만, 순간 도망갔다가도 너무 오래 걸리지 않고 다시 마음 곁으로 돌아온다. "이게 마치 집으로 돌아온 듯 저를 안도하게 합니다."
발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쯤이면 그는 다시 불편한 감정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아, 말을 버벅거렸어. 사람들이 나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때 그는 마음에게 이렇게 말하려고 한다. "그래, 너는 이상하고 부족했을 수도 있어. 그래도 나는 그런 너의 곁에 있을게."
"저는 먼지처럼 작고 연약한 우리의 아픈 감정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을 우리 마음 안에 만들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세상은 조금 덜 두렵고 조금 덜 외로울지도 모르겠습니다."
✍️ 내가 밑줄 친 세 문장
"기존에 있던 열등감, 수치심은 사라지기는커녕 또 다른 모습으로 돌아와 더 높은 기준을 들이밀면서, 작품의 결과와 얽혀 더 무섭고 무겁게 저에게 돌아왔습니다."
"진짜 고통은 그 모습 자체가 아니라, 그 모습을 외면하려고 도망다닌 시간이었다는 걸요."
"그래, 너는 이상하고 부족했을 수도 있어. 그래도 나는 그런 너의 곁에 있을게."

📝 블로거 한 줄 후기
17분 동안 단 한 번도 음악적인 클라이맥스 없이 차분히 흘러간 강연인데, 끝나고 나면 가장 무겁게 남는 한 컷이 있다. 〈먼지아이〉의 주인공이 먼지 아이와 함께 밥을 먹는 데 그쳤다면, 〈안경〉의 주인공은 그 존재를 꼭 껴안아 준다는 그 대조. 16년이 한 번의 포옹 사이에 흘러갔다는 정유미 감독의 한 줄이, 창작자라면 누구든 한 번쯤 멈춰 서게 만든다. "성공하면 마음의 비판자가 누그러질 거야"라는 흔한 신화 — 그게 사실은 작품의 결과와 얽혀 더 무섭게 돌아온다는 그의 고백은, 결과주의의 가장 정직한 반례다.
가장 오래 남는 건 "진짜 고통은 그 모습 자체가 아니라 도망다닌 시간이었다"는 한 줄이었다. 우리는 흔히 부족한 자기 모습을 만나는 일이 가장 무섭다고 믿지만, 정유미 감독은 그 반대편에 답을 놓는다. 부족한 자기를 외면하느라 7년을 도망다닌 시간이 결국 더 긴 고통이었다는 발견. 그 도망의 끝에 다시 연필을 들었고, 그 자리에서 〈존재의 집〉이 시작됐다는 흐름이 단단하다. 강연 마지막에 그가 청중에게 건넨 "그래, 너는 이상하고 부족했을 수도 있어. 그래도 나는 그런 너의 곁에 있을게"라는 한 마디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장 자주 해주지 못한 말일지도 모른다.
💡 오늘, 단 한 가지만 해본다면
오늘 마음에서 가장 미워하고 있는 자기 모습 한 가지를 떠올려 본다. 그 모습을 더 닦아 내려 하지 말고, 정유미 감독이 〈안경〉의 마지막 컷에서 그러했듯 단 한 번 가만히 안아 준다. 그 한 번의 포옹이 우리에게도 어쩌면 16년의 어떤 시간을 압축해 줄지 모른다.
📚 더 보면 좋을 자료
정유미 감독의 〈먼지아이〉(2009), 〈수학 시험〉, 〈연애놀이〉, 〈존재의 집〉, 〈안경〉(2025). 그림책 〈먼지아이〉와 〈나의 작은 인형 상자〉. 칸 영화제 감독 주간·비평가 주간, 베를린 영화제, 자그래브 애니메이션 영화제, 볼로냐 라가치 상의 한국 수상작 리스트도 함께 보면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 우리 마음 안에 먼지가 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두세요. 오늘 부족한 나를 한 번 가만히 안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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