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하면 뭐 하고 싶어?" 시속 110km로 달리던 차 두 대에 연달아 치여 팔꿈치 관절이 몇십 조각으로 분쇄 골절된 시인 오은은, 1년을 누워 있던 어느 날 친구의 질문에 자기도 모르게 답했다. "그냥 뭘 좀 쓰고 싶네." 그 한 줄로 자기가 평생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19분 30초짜리 강연. 깃드는 삶이라는 단어 하나로 묶이는 그 시간이 잔잔하게 깊다.
📌 한 줄 요약
서울대 사회학과 → KAIST 문화기술 석사 → 시인 오은이 풀어내는 깃드는 삶 19분 — 어머니에게 배운 관점, 아버지에게 받은 두 가지 선물, 그리고 시속 110km 교통사고가 그에게 가르쳐 준 한 줄.
⭐ 추천 점수
★★★★★ 5/5 — 자기 인생을 시 한 편처럼 단정하게 풀어내는 19분. 시인의 강연이 어떤 결인지 한 번 듣고 싶었다면 가장 좋은 입문.
👥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매일 누군가와 비교하고 이기고 지는 일에 지친 분
시집을 멀리한 지 오래된 분 — 시인의 한 편을 직접 듣고 싶은 분
늘 1등을 좇느라 자기 자리를 놓치고 있다고 느끼는 분
📑 목차
2. 어머니가 가르쳐 준 관점 — 초등 2학년 100점 시험지
6. 아버지의 산책 — 칠엽수와 돌짬, 그리고 헌옷 수거함
승부에서 벗어나 깃드는 사람 — 시인 오은의 19분 자기 고백
1.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사람 — 시 〈그것〉
"안녕하세요.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사람 오은입니다." 그는 자신을 늘 그렇게 소개해 왔다. 쓰기 이전에 읽기가, 말하기 이전에 듣기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


살면서 먹고 자는 것 말고 꾸준히 해 온 일이 뭘까 생각해 봤더니 그 중심에 읽기와 쓰기가 있었다. 왜 읽었을까, 왜 썼지? 같은 물음이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이 과정의 맨 처음에는 마주침이 있었다. 사람이든 장면이든 맛있는 음식이든, 그 마주침을 만남으로 길어 올렸기에 그의 인생은 마침내 깃드는 삶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쓴 시 한 편을 들려준다. 제목은 〈그것〉. "온다 간다 말 없이 와서 / 오도 가도 못하게 발목을 붙드는 / 손을 뻗으니 온데간데 없는." 청중에게 묻는다. "이 '그것'의 정체를 한번 밝혀 볼까요?"

"월급"이라는 청중의 답이 나오자 그는 웃는다. "월급이 들어올 때 '나 들어간다' 하고 들어오지 않잖아요. 또 손을 뻗으니 온데간데 없다는 건 월급 들어오는 날 카드값 나가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다른 답으로 '오늘'도 가능하다.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는데 자정이 지나고 또 다른 오늘이 찾아오니까. "정답이 있는 게 아닙니다. 각자의 답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깃드는 삶을 좋아하는 이유는 깃드는 삶에는 이렇게 승부가 없기 때문입니다. 깃드는 삶은 내 앞에 있는 상대를 궁금해 하는 삶, 내가 몸 담은 현장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삶, 그리하여 진짜 나한테 한 발 한 발 가깝게 다가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2. 어머니가 가르쳐 준 관점 — 초등 2학년 100점 시험지
본래부터 그가 경쟁심이 없던 건 아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시험지를 상장처럼 흔들며 집에 돌아왔다. "엄마, 나 100점 맞았어." 어머니께서 칭찬하고 꽉 안아 주셨다. 그런데 그는 한마디 더 했다. "엄마, 근데 다른 친구는 90점 맞았는데 게임기를 선물로 받았대. 나도 갖고 싶어."
어머니께서 그를 빤히 쳐다보시고는 질문을 하셨다. "누가 100점 맞았어? 그럼 누가 제일 기뻐?" 생각해 보니 100점이라는 성취는 자기가 이룬 것이었다. 좋은 성적에 대한 보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노력을 통해서 좋은 결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자기가 한껏 기뻤다는 사실. 마치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질문했던 것처럼, 어머니만의 질문법이자 대화법이었다.
"그 덕분에 관점에 대해 배웠습니다. 보는 방향과 생각하는 자세를 달리 하면 같은 풍경도 다르게 보인다는 걸 깨달았지요."
3. KAIST 문화기술 — 마이너스의 손이 배운 것
성취욕 때문인지 공부를 꽤 잘했다. 그러나 그리기·달리기·만들기·악기 연주는 아무리 연습해도 잘 안 됐다. 대학에서는 사회학을, 대학원에서는 KAIST 문화기술을 전공했다. 문과에서 이과로 간 것, 그것도 공대 대학원으로. 겁도 없었다.

공대 대학원에 지원한 이유는 홈페이지에서 본 한 문장 — "한국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육성하겠다" — 때문이었다. 입학식 날부터 고생길이 훤히 보였다. 학생들을 한 방에 모아 놓고 앞으로 2년 동안 사용할 각자의 컴퓨터를 조립하라는 것. "숨이 턱 막혔죠.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고, 컴퓨터를 조립할 수 있다는 상상도 해 본 적 없었거든요. 게다가 제 별명은 마이너스의 손이 아니라 마이너스의 손이었어요."
프로그래밍 수업에서는 "나는 C 언어는 잘 다루는데 C 언어는 형편없구나" 깨달았고, 디자인 수업에서는 머릿속에 떠올린 것을 실제로 구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했다. "어쩌면 대학원에서 제가 배운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구나 하는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는 깃들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게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첫 직장이 된 빅데이터 회사에서 사회학과 문화기술 전공이 큰 도움이 됐다.
4. 첫 시집의 황금기, 그리고 시속 110km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첫 시집이 나왔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시를 쓴다고, 알고 보니 스무 살에 등단했다고" 그의 독특한 이력 덕에 신문과 잡지 인터뷰가 매일매일 이어졌다. "뭐라도 된 것처럼 우쭐거리면서 그 시기를 보낸 것 같아요."
"벌써 황금기가 찾아왔나 하는 순간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시속 110km로 달리는 차 두 대에 연달아 치였습니다." 팔꿈치 관절이 몇십 조각으로 분쇄 골절되어 1년 동안 재활 치료와 입원이 필요했다. 어머니께서도 보호자 침대에서 1년을 함께 지내셨다. 하루에 두 차례 마약성 진통제를 맞고 굳은 팔을 굽혔다 폈다 하는 재활. 끝나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중환자실에 그를 찾아온 많은 분들 앞에서, 아버지께서 우는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 아들이 참 잘 살아온 것 같아." 어머니는 펑펑 우시며 답하셨다. "제가 한 사람 한 사람한테 어떻게 했겠어. 나는 그 애쓰는 모습이 떠올라서 정말 슬프네." 그는 회상한다. "역시 어머니의 관점은 남달랐습니다."
"떠올려 보면 병원에서의 일상이야말로 승부와 거리가 있었습니다. 누가 더 아프냐에 이기고 지는 게 있을 리 만무하잖아요."
5. "그냥 뭘 좀 쓰고 싶네" — 친구의 한 마디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왔다. "은아, 퇴원하면 뭐 하고 싶어?" 의례적인 질문이었을 텐데, 그도 모르게 튀어 나간 대답이 있었다. "그냥 뭘 좀 쓰고 싶네."
"그 대답을 하면서 알았습니다. 나는 쓰는 사람이구나. 쓸 때 가장 나답다고 느끼는구나. 쓰면서 질문하고, 쓰면서 깨닫는 사람이구나. 쓰는 일이야말로 가장 적극적으로 깃드는 일이겠구나. 그때까지는 저를 위해 글을 쓴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저를 향해서 글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런 삶을 살게 된 데는 아버지의 영향도 큽니다. 어머니로부터 관점을 배웠다면 아버지로부터는 태도를 배웠습니다."
6. 아버지의 산책 — 칠엽수와 돌짬, 그리고 헌옷 수거함
아버지께서 항암 치료를 받으실 때, 매일 동네 산책을 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일과였다. 몇 걸음 걷다 벤치에 앉아 오랫동안 쉬는 일이 잦았다. 아버지께서는 벤치에 앉아 이 꽃의 이름은 무엇인지, 저 나무는 언제 꽃을 피우는지 들려주셨다. 칠엽수·회화나무·비비추 같은 이름을 그때 배웠다.
"이름을 찾아 주는 것이 깃드는 일의 시작점임을 깨달았지요. 강아지에서 반려견이 되고, 그 반려견에게 콩이·뽀삐·후추 같은 이름을 붙여 주는 게 더 깊숙이 깃드는 일이잖아요." 아버지 곁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과 풍경을 보며 상상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그의 소일거리가 됐다.
"보도블록 사이에 어떻게 꽃이 피었을까. 사실 굉장히 기적적으로 느껴집니다. 날개 달린 친구들이 씨앗을 물고 떨어뜨리고, 그때 비가 오고, 땅에 심기고, 싹을 틔우고 자라날 동안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지 않은 거잖아요." 사전을 좋아하는 그가 찾아보니 돌과 돌 사이의 틈을 가리키는 단어가 '돌짬'이었다. 시간적 여유에 쓰는 짬이 공간적 여유에도 쓰인다는 것.
"제 산책은 작은 모험입니다. 뭔가를 발견하고 돌아와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여러분, 혹시 동네에 있는 헌옷 수거함의 색깔을 아세요?" 보통은 초록색. 그런데 지역에 따라 색깔과 이름이 다른 경우도 있다. 서울 영등포구의 헌옷 수거함은 '영희정'(영등포 → 입는 옷을 도와주는 정자라는 삼행시), 용산구는 '행복 옷장', 마포구는 '옷이 옷이네요'(마포 → 옷이 옷이네요), 서초구는 '옷채통'(편지를 부치는 우체통의 옷 버전).
"발신인과 수신인이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옷채통'이라는 이름을 특히 좋아합니다." 우편물은 도착하지 않으면 사고지만, 헌옷 수거함은 받은 사람도 보낸 사람의 정체를 모르고, 보낸 사람도 옷이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게 그 속성이기 때문이다. 수원에서 발견한 '이리 웃나라'라는 헌옷 수거함 앞에서 그는 한참을 웃었다. "어떻게 헌옷 수거함에 이런 이름을 붙여 줄 수 있을까. 그 마음은 어쩌면 깃들겠다는 마음입니다."
"눈높이를 내 주변 풍경에 맞추는 일, 이것은 깃드는 일입니다. 아버지 덕분에 저는 기꺼이 주변에 깃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7. 이름 '은' — 2등만 해도 만족하는 삶
강연 끝자락에 그는 한 가지 더 꺼낸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께서 주신 두 번째 큰 선물에 관한 이야기를 안 했네요. 사실 시간상으로는 첫 번째 선물입니다. 바로 제 이름인데요." 그의 이름 오은은 본명이다. 금·은·동 할 때의 '은'을 쓴다.

형을 비롯한 사촌들은 다 진짜 돌림인데, 자기 이름만 불쑥 튀어나온 것 같아 어릴 때는 속상해서 많이 울기도 했다. 어느 날 아버지께 여쭤봤더니 이렇게 답하셨다. "오금은 절이고, 오동은 나무니까." 어린아이가 듣기에는 알쏭달쏭한 답이었다.
아버지께서 항암 치료를 받으실 적 산책길에서 그는 이름의 진짜 비밀을 알게 됐다. 아버지께서 나직하게 말씀하셨다. "2등만 해도 만족하는 삶을 살라는 마음이었어. 1등은 쫓기니까. 여유가 없으니까. 자리보다 중요한 것을 지켜야 하니까."
"아버지, 저 말씀은 여전히 제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승부에서 벗어나 깃들며 살아가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만드는 한 줄. 그는 강연 마지막에 청중을 향해 짧게 응원한다.
"이 강연을 보시는 모든 분들이 오늘도 내일도 자기 자신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주변 풍경에게 선선히 깃드는 삶을 살아가시길 응원하겠습니다."
✍️ 내가 밑줄 친 세 문장
"깃드는 삶에는 승부가 없습니다. 깃드는 삶은 내 앞에 있는 상대를 궁금해 하는 삶, 내가 몸 담은 현장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삶, 그리하여 진짜 나한테 한 발 한 발 가깝게 다가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름을 찾아 주는 것이 깃드는 일의 시작점임을 깨달았지요. 강아지에서 반려견이 되고, 그 반려견에게 콩이·뽀삐·후추 같은 이름을 붙여 주는 게 더 깊숙이 깃드는 일이잖아요."
"2등만 해도 만족하는 삶을 살라는 마음이었어. 1등은 쫓기니까, 여유가 없으니까, 자리보다 중요한 것을 지켜야 하니까."

📝 블로거 한 줄 후기
시인의 강연은 자기 인생 자체를 한 편의 시처럼 단정하게 풀어 놓는다는 느낌이 든다.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시속 110km 교통사고 직후 친구의 질문 — "퇴원하면 뭐 하고 싶어?" — 에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그냥 뭘 좀 쓰고 싶네" 한 줄이었다. 자기가 평생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장 무거운 시간 끝에 가장 가벼운 한 줄로 깨닫는 그 자리가 단단하다. 인생의 정체성은 종종 무대 위가 아니라 침대 옆에서 가장 정확히 드러난다는 것을, 이 한 줄이 정확히 보여 준다.
개인적으로 가장 오래 남는 건 이름 '은'에 담긴 아버지의 한 마디였다. "2등만 해도 만족하는 삶을 살라는 마음이었어. 1등은 쫓기니까. 여유가 없으니까. 자리보다 중요한 것을 지켜야 하니까." 1등을 향해 달리는 삶이 너무 당연시되는 시대에, 자식의 이름에 그런 마음을 새겨 둔 아버지의 한 줄이 19분 강연 전체의 가장 단단한 기둥이 된다. 헌옷 수거함의 이름들 — 영희정·옷채통·이리 웃나라 — 까지 가는 길에 깃든다는 단어가 어떻게 일상의 가장 작은 자리에서 작동하는지를 보여 주는 마디들도 오래 남는다. 강연이 끝나면 어쩐지 동네를 한 바퀴 걸어 보고 싶어진다. 이름 모를 꽃과 헌옷 수거함의 이름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된다.
💡 오늘, 단 한 가지만 해본다면
동네를 짧게 한 바퀴 걸어 본다. 길에서 마주치는 한 가지 — 모르는 꽃 한 송이, 헌옷 수거함의 이름, 보도블록 사이의 작은 풀 — 의 이름을 한 번 검색해 본다. 오은 시인이 말하는 깃드는 일은 거기서 시작된다.
📚 더 보면 좋을 자료
오은 시인의 시집 —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왼손은 마음이 아파〉, 〈마음의 일〉, 〈없음의 대명사〉 등.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와 팟캐스트도 강연의 결과 그대로 이어진다. 강연에 등장한 '돌짬'이라는 단어는 국립국어원 사전에서 직접 찾아보면 더 즐겁다.
♥ 승부에서 한 걸음 벗어나, 오늘 한 가지에 가만히 깃들어 보세요. 그 시작은 이름을 한 번 불러 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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