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4. | 세바시 2082회 | 우창윤 (내과 전문의)
살은 의지로 빼는 것이라는 말, 우리는 너무 쉽게 합니다. 그러나 내과 전문의 우창윤은 비만이 인격이나 의지의 결함이 아니라 뇌와 호르몬의 균형이 만든 명백한 만성 질환이라고 말합니다. 진료실에서 만난 세 환자의 이야기를 통해, 비만 치료의 가장 큰 적이 몸에 붙은 지방이 아니라 마음속 죄책감과 자기 혐오임을 짚어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함께 지켜야 할 세 가지 약속을 제안합니다.
📖 이 강연의 순서
1. 가방도, 여행 경비도 잃어버린 나 — 알고 보니 ADHD였다
2. 비만은 의지의 문제일까 — 식탐은 호르몬이 만든 교란 상태
3. 진료실에서 만난 세 환자가 알려준 것
4. 비만은 명백한 만성 질환이다 — 네이처 메디신의 선언
5. 비만 낙인이 사회에 청구하는 비용
6. 지전, 세 가지 약속 — 지적하지 않기, 전문의 찾아가기, 곁들임

가방도, 여행 경비도 잃어버린 나 — 알고 보니 ADHD였다
저는 내과 전문의 우창윤입니다.
오늘은 조금 부끄러운 제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하려 합니다.
초등학교 때 오락실을 처음 접했는데, 게임을 하면서 오락기 위에 올려둔 가방을 번번이 두고 집에 갔습니다.
그렇게 가방을 잃어버린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주관식 답을 시험지에만 적고 답안지에 옮기지 않거나, 객관식 마지막 페이지를 아예 풀지 않고 낸 적도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어 난생처음 미국에 갔을 때는 돈을 잃어버릴까 봐 모든 여행 경비를 현금으로 바꿔 캐리어 깊숙이 숨겨두었습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캐리어 손잡이가 부러졌고, 숙소를 떠나는 날 주인이 고장 난 캐리어를 플리마켓에 기부하지 않겠느냐고 묻자 뿌듯한 마음으로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며칠 뒤, 제 모든 여행 경비가 그 기부한 캐리어 안에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순식간에 무일푼이 된 것입니다.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주변에서는 정신 좀 차리라고, 제대로 하려는 의지가 있느냐고 저를 다그쳤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 의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 뇌가 가진 고유한 특성인 ADHD 때문이었다는 것을요.
ADHD는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만들고 필요할 때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입니다.
전두엽의 브레이크가 느슨해 멈춰야 할 때 멈추지 못하고, 과몰입할 때마다 다른 기억들이 지워지는 것입니다.
비만은 의지의 문제일까 — 식탐은 호르몬이 만든 교란 상태
내과 의사가 된 저는 진료 현장에서 매일 저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분들을 마주칩니다.
바로 비만이신 분들입니다.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비만은 정말 의지의 문제일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식탐은 인격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식욕을 조절하는 뇌의 시스템이 강력한 호르몬에 의해 일시적으로 마비되고 교란된 상태입니다.
식욕은 생존과 직결된 감각이기에, 왜곡된 호르몬이 만든 허기와 피로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강렬합니다.
진료실에서 만난 세 환자가 알려준 것
작년에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분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누가 봐도 능력자였지만, 그분은 떨리는 목소리로 밤마다 음식 앞에서 무너지는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럽다고 고백했습니다.
낮에는 완벽한 전문가였지만 밤이 되면 충동을 이기지 못해 냉장고를 뒤지며 폭식했고, 그런 자신을 구제불능이라 자책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께 대화를 통해 이해를 처방했습니다.
특정 음식은 실제로 뇌에 마약성 진통제처럼 작용하며, 불안과 스트레스라는 고통을 이기기 위해 음식을 진통제로 쓰는 감정적 섭식 상태에 빠져 있을 뿐이라고요.
비만이 인격의 결함이 아니라 뇌와 호르몬의 균형이 만든 상태임을 이해하기 시작하자 자기 혐오가 옅어졌고, 치료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그분은 살이 빠지기 전에 먼저 자기 혐오가 빠졌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환자는 호르몬제를 복용한 뒤 체중이 30kg 가까이 늘어난 분이었습니다.
병은 나았지만 그 이후 더 무서운 병, 사회적 낙인을 앓게 되었습니다.
살이 찌자 주변의 시선이 달라졌고, 관리 좀 하라는 말들이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스스로를 집 안에 가두고 외로움에 지치면 배달 음식으로 그 고통을 잠시 잊으려 했습니다.
오랜 대화 끝에 그분을 옭아맨 것이 타인의 차별적 시선을 내면화한 자기 낙인임을 함께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바로잡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 가족, 친구들과 어울리며 웃을 수 있었고, 외로움과 폭식이 함께 좋아졌습니다.
반면 세 번째 환자는 유학 생활 중 살이 찐 분이었는데, 태도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건강이 걱정되니 도움을 받고 싶다고 아주 중립적으로 물었고, 죄책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비만을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 변화로 생긴 해결해야 할 건강 문제로 정확히 인식했기에, 스스로를 미워하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았습니다.
회복 속도는 놀랍도록 빨랐습니다.
세 사람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비만 치료의 가장 큰 적은 몸에 붙은 지방이 아니라, 마음속에 파고드는 죄책감과 자기 혐오입니다.






비만은 명백한 만성 질환이다 — 네이처 메디신의 선언
그렇다면 무엇이 이분들을 그토록 스스로 미워하게 만들었을까요?
의지가 약해서도,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잘못된 시선, 비만 낙인 때문입니다.
2020년, 세계 최고 권위의 과학 저널 네이처 메디신에 전 세계 과학자와 의사들이 모여 역사적인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비만은 개인의 의지나 선택의 실패가 아니라 유전적, 환경적,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명백한 만성 질환이며, 불필요하고 오히려 해를 끼치는 사회적 낙인은 종식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비만은 첫 번째 도미노와 같습니다.
이것이 쓰러지면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이 연달아 쓰러지고, 그 뒤로 암, 뇌졸중, 실명, 그리고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치매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중년기의 복부 비만은 전신의 만성 염증을 유발해 치매 위험을 두세 배까지 높입니다.
비만은 단순한 외모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질환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비만 낙인이 사회에 청구하는 비용
잘못된 낙인은 개인의 불행을 넘어 사회 전체에 엄청난 비용을 청구합니다.
무심코 던진 편견의 말 한마디가 사람을 고립시키고, 그 스트레스가 다시 폭식을 유발해 비만을 악화시킵니다.
이 악순환의 끝에는 당뇨병 치료, 뇌졸중 재활, 암 수술과 항암, 치매 장기 요양까지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비용이 기다리고 있으며, 결국 우리의 건강보험과 세금이 그것을 메우게 됩니다.
비용은 의료비만이 아닙니다.
비만인은 같은 능력과 자격을 갖추고도 면접과 취업에서 차별받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는 개인의 불운을 넘어 우리 사회가 인적 자원을, 누군가의 꿈과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낭비하는 일입니다.
사회적 차별은 수치심을 낳고, 수치심은 우울과 불안으로, 다시 감정적 섭식으로 이어집니다.
편견이 비만을 심화시키고 비만이 다시 고립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 그 시작에는 우리의 편견이 있습니다.
지전, 세 가지 약속 — 지적하지 않기, 전문의 찾아가기, 곁들임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세 가지 약속을 제안합니다.
앞 글자를 따 지전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지적하지 않기입니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살 좀 빼라고 지적하지 말아 주세요.
그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압니다.
그 말은 상대를 숨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주어 오히려 살을 더 찌게 만듭니다.
두 번째는 전문의 찾아가기입니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우울하거나 화나거나 외로운 감정을 달래려 음식을 먹고, 고치고 싶은데도 끊어낼 수 없다면 전문가를 찾아가세요.
주변에 그런 친구가 있다면 지적하는 대신 전문가를 찾아가라고 권해 주세요.
저는 그것이 사회적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곁들임이라는 인식 갖기입니다.
레스토랑 메뉴판의 스테이크 위 가니시처럼, 우리 자신이 메인이고 비만은 잠시 곁들여진 소스일 뿐입니다.
비만을 정체성으로 단정 짓지 마세요.
나는 나이고, 지금 잠시 지방을 곁들이고 있는 과정을 지나고 있을 뿐입니다.
곁들임은 언제든 걷어낼 수 있습니다.
지적하지 않기, 전문의 찾아가기, 비만은 곁들임이라는 인식 갖기.
이 지전을 함께 지킬 때 우리는 개인의 건강뿐 아니라 우리 사회와 미래도 지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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