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6. 17. | 세바시 2104회 | 데이비드 밀리밴드 (국제구조위원회 IRC 총재)
아인슈타인이 1930년대에 세운 국제구조위원회(IRC)의 총재 데이비드 밀리밴드가 서울 무대에 섰습니다. 그는 레바논과 시리아, 수단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세계의 무질서'를 데이터와 현장의 이야기로 증언합니다. 그리고 1953년 폐허에서 세계 13위 경제대국으로 일어선 한국에게 묻습니다. 이제 도움을 받던 나라가 남을 구하는 나라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 이 강연의 순서
1. 무너진 질서, 그리고 알리아의 비극
2. 숫자로 보는 무질서: 20개국에 집중된 고통
3. 기후위기와 원조 붕괴가 만든 악순환
4. 해결책은 있다: 1달러 백신과 AI 진단
5. 폐허의 한국이 세계를 구하는 나라로

무너진 질서, 그리고 알리아의 비극
제 이름은 데이비드 밀리밴드이고, 국제구조위원회(International Rescue Committee, IRC)의 총재입니다.
IRC는 1930년대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세운 국제 인도주의 단체로, 분쟁과 재난으로 삶이 무너진 사람들이 살아남고, 회복하고, 자신의 미래를 되찾도록 돕는다는 단순한 명제에 헌신해 왔습니다.
우리는 태국과 미얀마에서 시리아와 가자, 수단과 니제르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의 분쟁 현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저는 레바논에서 IRC 동료들을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한 전직 동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동을 돕는 교육 전문가였던 알리아는 남편, 두 아이와 함께 레바논 동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사일 공격이 알리아와 그의 남편, 그리고 세 살배기 아이의 목숨을 앗아갔고, 아홉 살 아이만 고아로 남았습니다.
레바논에서는 인구의 네 명 중 한 명이 분쟁으로 집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전쟁의 얼굴입니다.
민간인이 최전선에 서고, 기술은 법을 앞지르며, 인도적 필요가 인도적 노력을 압도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같은 여정에서 저는 이웃한 시리아도 찾았습니다.
내전으로 들끓는 그 나라는 인구의 4분의 1이 삶의 터전을 잃었고, 보건소를 포함한 사회 기반시설의 절반이 파괴되었으며, 경제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새로운 세계의 무질서(new world disorder)'를 목격하고 또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숫자로 보는 무질서: 20개국에 집중된 고통
오늘의 무질서는 그 규모가 압도적이고 위압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제 위기는 더 이상 예외가 아닙니다.
전 세계에 60개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유엔에 따르면 2억 4천만 명이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중 1억 2천만 명이 폭력과 재난으로 집에서 쫓겨나 난민이 되거나 자국 안에서 떠돌고 있으며, 8억 명이 하루 3달러 미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막막한 숫자를 조금 더 실질적으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IRC는 데이터를 신뢰합니다.
우리는 75개의 지표를 활용해 인도적 필요가 가장 큰 20개국의 연례 감시목록(Watchlist)을 만듭니다.
이 20개국은 세계 인구의 12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인도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90퍼센트가 바로 이 나라들에 몰려 있습니다.
이 20개국에서 변화를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세계 인도주의 전체의 흐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 목록의 맨 위에는 북동아프리카의 수단이 있습니다.
수단은 현대 전쟁의 상징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2019년 40년의 독재를 끝내고 민주혁명으로 민간정부가 들어섰지만, 2021년 군부가 권력을 잡았고, 2023년에는 군부끼리 서로 싸우기 시작하면서 나라 전체가 전쟁에 삼켜졌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3천만 명이 인도적 지원을 필요로 합니다.

기후위기와 원조 붕괴가 만든 악순환
한국인들이 크게 관심을 갖는 기후위기는 이런 분쟁과 결코 별개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후위기가 분쟁을 부추기고, 분쟁의 비용을 키우고 있습니다.
IRC 감시목록의 20개국 가운데 15개국이 기후변화에 가장 취약한 범주에 속합니다.
소말리아와 아프가니스탄은 극심한 가뭄을 점점 더 자주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들은 기후변화에 극도로 취약함에도 정작 농업과 경제, 사회를 기후에 적응시킬 자금은 가장 적게 받습니다.
게다가 기후 적응과 인도적 필요에 투자하기는커녕, 전통적 공여국들로부터 유례없는 원조 붕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 같은 나라는 프로그램의 80퍼센트를 삭감했고, 제가 속한 단체도 지난해 4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인도적 필요와 인도적 공급 사이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 2월 28일 시작된 이란 전쟁은 이 조건들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연료 가격이 모두에게 올랐지만 그 타격은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크게 돌아갔습니다.
게다가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야 하는 것은 연료만이 아닙니다.
전 세계 비료 무역의 30퍼센트가 이 해협을 지나는데, 그 흐름이 막히면서 농부들은 비료를 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외교협회는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를 '느린 기근 기계'라고 부릅니다.
코로나, 우크라이나 전쟁, 호르무즈 해협 봉쇄, 엘니뇨의 위험까지, 각각의 충격은 간신히 버티던 수백만 명을 벼랑 너머로 밀어냅니다.


해결책은 있다: 1달러 백신과 AI 진단
IRC는 '해결책을 만드는 단체'입니다.
우리는 임팩트와 혁신, 그리고 비용 효율에 집중합니다.
인간이 만든 위기에는 반드시 해결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방접종은 5세 미만 아동에게 평생 이어지는 혜택을 줍니다.
그러나 전 세계 어린이의 15퍼센트는 단 한 번의 예방접종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국제백신연합으로부터 분쟁에 갇힌 그 15퍼센트에게 어떻게 닿을 수 있는지 보여 달라는 과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반군과 무장세력과 접근권을 협상해, 보건 인력이 아예 없던 최전선에 보건 요원을 세웠습니다.
또한 혁신을 통해 보건 요원의 배낭에 나흘간 유지되는 냉장 기능을 넣어 백신의 냉장 유통망을 지켰습니다.
의사 대신 지역 보건 요원을 활용해 비용도 낮췄습니다.
그 결과 전쟁 중인 6개국에서 3,400만 회분의 백신을 전달했고, 규모의 경제 덕분에 1회분 비용은 2023년 3달러에서 2024년 2달러, 2025년에는 1달러로 떨어졌습니다.
단돈 1달러로 한 아이에게 미래의 질병을 막아 주는 평생의 혜택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혁신은 경계를 모릅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AI를 활용해 희귀 아프리카 질병인 엠폭스를 진단하고 있습니다.
AI로 진단을 도울 수 있는 희귀 질환이 200가지에 달합니다.
이 기술은 오프라인에서, 낡은 장비에서도 작동하며, 원래라면 몇 주가 걸릴 진단을 몇 초 만에 해냅니다.
우리가 수행한 500건의 비용 효율 연구는 한결같이 같은 결론을 가리킵니다.
규모도 중요하지만 전문성도 중요하며, 지역 단위의 임팩트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폐허의 한국이 세계를 구하는 나라로
이 모든 이야기가 오늘의 한국과는 멀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행히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자신의 역사를 알고, 역사의 메아리를 압니다.
1953년의 한국은 슬프게도 제가 앞서 말한 시리아와 비슷했습니다.
기반시설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흩어졌으며 경제는 무너져, 1인당 국민소득이 겨우 50~60달러에 불과했습니다.
그때 에티오피아부터 멕시코까지 40개국이 '우리는 상관없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함께하겠다'며 유엔한국재건단을 지원했습니다.
미국은 1946년부터 1976년까지 30년간 120억 달러를 지원했고, 세계은행은 한국 국유철도 같은 핵심 사업을 도왔습니다.
그 지원과 무엇보다 한국인 스스로의 재능과 투지 덕분에, 한국은 이제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한때 세계은행의 수혜국이던 나라가 이제는 공여국이 된 것입니다.
저는 수단과 시리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사람들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들은 여러분과 똑같은 열망, 똑같은 투지와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똑같은 지원만 주어진다면 그들도 똑같은 결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의 무질서는 운명이 아닙니다.
무질서를 만든 힘이 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그 해결책 또한 인간이 만들 수 있습니다.
밖에서의 도움과 스스로의 재능으로 구조받았던 나라가, 이제 자신의 재능과 지원으로 멀리 있는 이들을 구하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몇 달 사이 이란 전쟁에는 수십억 달러가 동원되었습니다.
원조가 역사적으로 줄어드는 이 시점에, 우리는 그 전쟁에 쓰인 비용의 일부만이라도 '선한 일'을 위해 동원해야 합니다.
세계의 인도주의와 난민 위기는 우리 정책이 아니라 우리 가치와 인간성을 시험하는 문제이며, 한국은 그 시험을 어떻게 통과하는지 아는 나라입니다.
저는 행동이 희망을 낳는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오늘 행동에 나서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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