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6. 10. | 세바시 2101회 | 송성환 (EBS 교육뉴스부 기자)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다섯 명을 떠올려 보면 대부분 안중근, 유관순, 김구, 윤봉길 정도에서 멈춥니다. 그중 여성은 유관순 한 사람뿐일 때가 많습니다. EBS 교육뉴스부 송성환 기자는 역사책에 분명히 있었지만 적히지 않은 이름들, 바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림과 흉상, AI로 그들의 얼굴을 되살리는 사람들을 취재하며 기자가 마주한 '역사의 빈칸'에 관한 강연입니다.
📖 이 강연의 순서
1. 역사책의 이상한 빈칸, 우리가 떠올리지 못한 이름들
2. 여자 안중근, 세 번이나 손가락을 자른 남자현
3. 그림과 흉상으로 되살아난 이름들
4. AI가 돌려준 밥 한 끼와 교복
5. 기록되지 않아 빈칸으로 남은 3.6%
6. 그 이름 하나를 기억하는 것이 빈칸을 채우는 일

역사책의 이상한 빈칸, 우리가 떠올리지 못한 이름들
우리나라 교육 문제를 취재하는 EBS 교육뉴스부 기자 송성환입니다.
여러분께 짧게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이름 다섯 분만 한번 떠올려 보시겠습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안중근, 유관순, 김구, 윤봉길 이 정도에서 멈추셨을 것입니다.
질문을 하나만 더 드려보겠습니다.
그중에서 여성은 몇 분이셨습니까?
아마 유관순 한 분 정도일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방금 떠올리지 못한 이름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역사책에는 이상한 빈칸이 있습니다.
분명 거기에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적혀 있지 않은 이름들, 오늘은 그 역사의 빈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자 안중근, 세 번이나 손가락을 자른 남자현
오래되지 않은 역사 속의 한 여성입니다.
이분은 주로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자신의 굳은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기도 했고 총도 잘 다루셨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안중근 선생이 떠오르실 텐데요.
실제로 이분의 별명도 '여자 안중근'이었습니다.
바로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무장 투쟁에 나섰던 남자현 선생입니다.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 씨가 연기한 안옥윤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실 것 같습니다.


남자현 선생은 손가락을 하나만 자른 게 아닙니다.
세 번이나 잘랐습니다.
당시 간도와 만주 일대에는 여러 독립운동 세력이 저마다 다른 노선과 투쟁 방식으로 활동했고,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두고 우리끼리 많이 다퉜다고 합니다.
일제에 맞서기도 벅찬 시기에 말이죠.
우리의 적은 일제라는 것, 우리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 우리가 바라는 것은 독립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며 세 번이나 손가락을 잘라 세력들에게 알린 겁니다.
그래서 남자현 선생은 '만주 독립군의 어머니'라고도 불렸습니다.

그림과 흉상으로 되살아난 이름들
저도 남자현 선생을 안 지 딱 1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작년 광복 80주년을 맞아 기획 아이템을 찾다가 그림 하나를 봤습니다.
하얀 옷에 손가락에는 붕대를 감고, 다른 손은 바위 같은 주먹을 쥔 강렬한 그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담담하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이 저를 한참이나 붙잡았습니다.


그 그림을 그린 화가는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난 올해 87세의 윤석남 화백이었습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100명을 그리겠다는 목표로 시작했는데, 제가 찾아뵀을 때 이미 114번째 작품을 그리고 계셨습니다.
왜 이 작업을 하시느냐는 질문에 '이건 내 이야기다, 내가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이분들을 알리려 찾아다녔습니다.
전국에 여성 독립운동가 기념관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충북에 전시실이 딱 하나 있을 뿐인데, 연고가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 열 분의 흉상이 배치된 공간입니다.
이 공간을 3년 넘게 만든 정춘일 작가는 사진이나 초상화가 거의 없는 분들을 입체 흉상으로 되살려야 했습니다.
사진을 모으고 부족하면 후손을 찾아 베이징까지 갔고, 처음엔 만나주지 않던 후손에게 사정사정해 사진 한 장을 얻어냈습니다.

신채호 선생의 부인이자 간호사, 산파로 독립운동에 나섰던 박자혜 선생.
평생 가난과 추위와 싸운 그의 흉상에 정춘일 작가는 따뜻한 누비옷을 입혀주었습니다.

AI가 돌려준 밥 한 끼와 교복
여성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는 분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따뜻한 마음이었습니다.
요즘 인공지능이 무섭게 발전하면서 AI가 가장 빠르게 대체할 직업으로 기자가 꼽히기도 하는데요.
취재 중에 저는 인공지능이 정말 좋은 방식으로 쓰이는 장면을 만났습니다.

유튜브 쇼츠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영상을 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이 분야를 거의 처음 개척한 분도 그냥 프롬프트만 넣어 뚝딱 만드는 게 아니라, 남아 있는 시각 자료와 사료를 최대한 찾아다니며 작업하시더군요.
실제 기록을 보면 아사했다는 내용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데, 그분은 얼굴만 살려내는 게 아니라 '푸짐한 밥 한 끼를 대접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만든 대표 콘텐츠가 바로 '독립운동가들의 한 끼' 시리즈였습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10대가 정말 많았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생, 더 어리면 초등학생 나이였죠.
이분들 사진 대부분은 형무소에 수감될 때 찍힌 것입니다.
이 AI 제작자는 그 아이들에게 교복을 입혀주고, 활짝 웃게 해줍니다.

지금 거리에서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깔깔 웃으며 걷는 아이들, 그 당연한 일상을 100년 전 그 아이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교육 기자로서, 또 한 부모로서 저도 울컥한 적이 정말 많았습니다.

기록되지 않아 빈칸으로 남은 3.6%
취재를 하며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정말 많이 알게 됐습니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선생은 들어보셨겠지만, 그의 아내 이은숙 선생은 대부분 생소하실 겁니다.
조선의 명문가였던 이회영 집안은 1910년 나라가 넘어가자마자 전 재산을 처분하고 일가 60여 명과 함께 만주로 망명합니다.
그 이후 일가의 생존, 아이들의 교육, 중국과 조선을 오가는 이주까지 모두 이은숙 선생 혼자 감당하는 삶이었습니다.

이은숙 선생은 그 고단한 세월을 '서간도 시종기'라는 책으로 남겼습니다.
남아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 기록 중 육필 원고가 현전하는 유일한 책입니다.
그런데 이은숙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공식 인정받은 건 2018년, 채 1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전까지 일기나 회고록 같은 기록은 독립운동의 공적 근거로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독립운동가를 인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수감 기록과 재판 기록이었습니다.
일제에 잡히지 않고 영리하게 싸울수록 오히려 기록이 없어 인정받기 어려운 구조인 것이죠.
게다가 여성은 형량이 낮아 공훈 점수도 낮아지는 역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체 독립운동가 1만 6천여 명 가운데 여성은 몇 퍼센트일까요?
단 3.6%입니다.
그마저도 2018년 서훈 기준이 바뀐 뒤 늘어난 수치입니다.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여성이 정말 3.6%만 기여했을 리는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기록하고 기억하지 않아서 역사의 빈칸으로 남은 것입니다.

그 이름 하나를 기억하는 것이 빈칸을 채우는 일
다시 남자현 선생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여자 안중근'이라고 소개했지만, 사실 남자현 선생은 안중근 선생보다 일곱 살 누나입니다.
손가락을 세 번 자르고 무장 투쟁에 나서고 분열한 독립군을 품었던 그 행적만 봐도, 굳이 안중근에 빗대지 않아도 충분히 기억할 만한 분입니다.
남자현을 그 남자현 그 자체로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남자현 선생의 생가가 있는 경북 영양에는 영화 '암살'을 계기로 남자현 기념 공원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지역마다 여성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기억하려는 노력이 조금씩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강연을 들으신 분들께 딱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사시는 곳 혹은 태어난 곳과 '여성 독립운동가'를 함께 검색해 보는 겁니다.
분명히 한 분은 나올 겁니다.
그 이름 하나를 기억하는 것, 그게 역사의 빈칸을 채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는 더 단단해질 거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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