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6. 1. | 세바시 2098회 | 이선우 (딥 다이브 코리아 CP)
영국 BBC와 한국이 처음으로 함께 만든 프로그램 '딥 다이브 코리아'. 그 카메라가 향한 곳은 산소통 없이 평생 바다로 들어가는 제주 해녀들이었습니다. 촬영 현장에서 저체온증 직전까지 몰린 배우 송지효는 말했습니다. '해녀분들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제작을 이끈 이선우 CP가 해녀의 강인함에 담긴 진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이 강연의 순서
1. 송지효가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한 순간
2. BBC가 찾던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이야기'
3. 해녀는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
4. 바다는 매번 생과 사의 경계였다
5. '다시 태어나면 평범한 여자로 살고 싶다'

송지효가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한 순간
안녕하세요.
'딥 다이브 코리아 - 송지효 해녀 편'을 제작한 CP 이선우입니다.
촬영 초반에 있었던 일부터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제주도 바다에서 송지효 배우가 훈련을 마치고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저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 해녀분들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아.'
그 현장에 계시던 해녀 삼촌들이 한참을 웃으셨습니다.
그러다 한 분이 아주 시크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사람이다.
먹고 살려면 할 수 없는 거다.' 사실 그날 송지효 배우는 저체온증 직전 상태였습니다.
배 한 구석에서 고개도 못 들 정도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차가운 바닷물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체온을 빼앗았고, 몇 번 잠수하지도 않았는데 손끝의 감각이 무뎌졌습니다.
물속에서는 위아래 방향조차 헷갈리고, 숨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심장이 빨리 뛰며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고 말도 잇지 못했습니다.
그때 스태프 모두가 실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방송이 아니라, 자연에 맞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순간이라는 것을요.
우리는 흔히 해녀를 보며 '강한 여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녀들의 강인함은 정말 타고난 것일까?

BBC가 찾던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이야기'
'딥 다이브 코리아'는 영국 BBC가 한국과 처음으로 만드는 국제 공동 제작 프로그램이었습니다.
BBC 측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이야기'를 원했습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솔직히 막막했습니다.
K팝, K푸드, K드라마처럼 세계적으로 익숙한 한국의 이미지는 이미 너무 많이 소비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정말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 끝에서 해녀를 떠올렸습니다.
한국 방송에서는 익숙하고 어쩌면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는 소재였습니다.
하지만 BBC 제작진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산소통 없이 바다에 들어가 평생 물질을 하며 살아온 여성 공동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들은 눈을 반짝였습니다.
'그게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나요?'라고 되묻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보이지 않았던 것이, 낯선 이들의 눈에는 이렇게 특별하게 보이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때 확신했습니다.
해녀는 단순한 제주만의 문화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지나온 시간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라는 것을요.

해녀는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
해녀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여성들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남성 잠수부인 '포작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깊은 바다에서 전복과 해산물을 채취했고, 그렇게 채취한 것들은 대부분 곡물 대신 나라에 바쳐졌습니다.
그런데 바쳐야 할 양은 점점 늘어났고, 관리들의 부정부패까지 더해지면서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할당량이 내려왔습니다.
결국 많은 포작인들이 견디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들어 죽었고, 어떤 사람은 제주를 탈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제주 밖으로 나가는 길을 막고 배 만드는 것을 제한했습니다.
사람을 붙잡아 둔다고 해서 바다가 덜 위험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남성 잠수부는 줄어들었고, 부족해진 노동력은 여성들에게 떠넘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해녀의 역사는 자발적 선택의 역사라기보다, 강제로 떠맡겨진 생존의 역사에 더 가깝습니다.
돌이 많아 농사가 힘들고 바람이 거세 삶 자체가 고단했던 제주.
남자들은 더 큰 수입을 위해 먼 바다로 나가 몇 달씩 돌아오지 못했고, 폭풍이나 사고로 목숨을 잃는 일도 많았습니다.
남편이 돌아오지 못하면 여성은 자연스럽게 가족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 선택에는 준비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 자리를 살아내야 했습니다.
조선시대 제주 목사로 부임한 관리들은 한겨울 얼어붙은 바다에 얇은 옷만 입고 뛰어드는 해녀들을 보고 충격을 받아, 전복을 끊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습니다.



바다는 매번 생과 사의 경계였다
보행기를 밀며 천천히 걸어오시던 한 해녀 삼촌을 본 적이 있습니다.
허리는 심하게 굽어 있었고 걸음도 불안정해, 저분이 정말 물질을 하실 수 있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잠수복을 입고 바다에 들어가는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셨습니다.
젊은 스태프들보다 훨씬 빠르게 방향을 바꾸고 파도를 타며 숨을 조절했습니다.
물질은 욕심을 부리거나 단 한 번 방심하는 순간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해녀분들은 늘 말씀하십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올 수 있는 그 숨만큼은 남기라'고요.
물 위로 올라오며 휘파람 불듯 내쉬는 소리, 바로 '숨비소리'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 소리를 '생과 사의 경계'라고 표현합니다.
그 작은 숨을 남기지 못하면 바다에서 나오지 못하고, 그 숨을 남겨야 물 밖으로 나와 마지막 숨을 내쉴 수 있습니다.
촬영을 계속할수록 그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됐습니다.
해녀들에게 바다는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매번 삶과 죽음의 경계로 들어가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녀 공동체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바다에 들어가기 전 서로의 장비를 확인하고, 한 사람이 늦게 올라오면 끝까지 주변을 돌며 기다립니다.
능력과 깊이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뉘고 처음 시작하는 해녀를 '똥군'이라 부르는데, 경험 많은 상군이 초보 해녀를 살피고 대상군의 말을 따릅니다.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생겨난 문화입니다.
우리 사회는 종종 누가 더 빠른지, 누가 더 많이 가졌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해녀 공동체는 강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서로 의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들의 공동체였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평범한 여자로 살고 싶다'
촬영 중 한 삼촌께 여쭤봤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해녀를 하시겠습니까?' 한참을 조용히 계시던 삼촌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다시 태어나면 그냥 평범한 여자로 살고 싶다.' 또 다른 삼촌은 '다음 생엔 미용실을 하며 손님들 머리 해 주고, 저녁이면 집에 가서 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꿈을 버리고 해녀가 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해녀를 보며 대단하다고, 강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강함은 원해서 선택한 삶이라기보다 버텨야 했기에 만들어진 삶이었습니다.
제주에는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해녀 민요에 '딸을 낳으면 차라리 죽도록 엎어버린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처음 들으면 충격적이지만, 그 안에는 딸마저 평생 위험한 바다에 들어가야 하는 두려움을 지닌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해외 프로모션 중 대만 상영회에서 관객들이 가장 많이 운 장면도 바로 그 대목이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평범한 여자로 살고 싶다.' 그 한마디에 객석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고, 어떤 관객은 자신의 어머니가 떠올랐다고 했습니다.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한 번도 선택하지 못한 여성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해녀는 여성도 강할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건 성별이 아니라 삶이라는 증거입니다.
누군가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해서, 누군가는 포기할 수 없어서, 또 누군가는 자신 말고는 버틸 사람이 없어서 강해집니다.
어쩌면 여러분 주변에도, 혹은 여러분 자신에게도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그렇게 버티고 있는 순간이 있을지 모릅니다.
강함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버티고 있다면,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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