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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한겨레 기자, 딸이 축구를 그만둔 진짜 이유 | 세바시 209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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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6. 5. | 세바시 2099회 | 박수진 (한겨레21 기자)

 

 

토요일마다 신나게 축구를 하던 딸에게 어느 순간부터 패스가 오지 않았습니다. 한겨레 박수진 기자는 딸의 경험을 실마리 삼아 소녀들의 운동장이 왜 이렇게 좁은지 취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치를 보느라 벤치에 앉아 있는 아이들, 그리고 제도와 교육이 만들어 낸 변화의 사례를 통해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드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운동장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해 본 경험이 교실과 회의실에서도 힘이 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 이 강연의 순서
1. 패스가 오지 않던 토요일
2. 운동장은 누구의 것일까
3. 눈치 보여요
4.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5. 제도가 만든 변화
6. 모든 아이에게 운동장을

 

 

박수진 한겨레21 기자 세바시 강연 세상을 바꾸는 시간
박수진 한겨레21 기자 세바시 강연 세상을 바꾸는 시간

 

 

패스가 오지 않던 토요일

 

어느 따뜻한 봄날이었습니다.

저희 딸은 토요일마다 동네 축구 교실에서 축구를 했습니다.

공을 차고, 내가 찬 공이 골문을 흔들고, 패스한 공이 정확히 동료의 발에 닿는 그 쾌감을 딸도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코치님이 딸의 이름을 자꾸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미나한테 패스해라, 미나에게 줘라.

사진을 찍어 주려고 핸드폰을 들었다가 알게 된 상황은 정반대였습니다.

아이들이 저희 딸에게만 패스를 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축구 교실에서 10명 중 여학생은 2명뿐이었고, 남학생들끼리 공을 돌리며 경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딸이 두 살 때 김은비 작가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라는 책을 읽고, 우리 딸이 원하면 꼭 축구를 하게 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실제로 축구 교실에 등록도 해 주었지요.

하지만 엄마 개인이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아이가 저절로 축구를 즐겁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팀의 절반이 여학생이었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여학생이 줄더니 4학년이 되자 딸과 친구 둘만 남았습니다.

결국 딸은 주말마다 패스 누락의 경험을 두세 달 겪다가 나 축구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 라고 말하며 축구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왜 여학생들은 운동장 한가운데로 나오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고 있는 걸까요?
왜 여학생들은 운동장 한가운데로 나오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고 있는 걸까요?

 

 

벚꽃 핀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다투며 뛰노는 아이들 (AI 생성 이미지)
벚꽃 핀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다투며 뛰노는 아이들 (AI 생성 이미지)

 

 

운동장은 누구의 것일까

 

그 책에는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축구를 왜 나는 이제야 하게 됐지?

어렸을 때 우리는 왜 축구할 기회가 없었을까?

저는 이 질문을 현재형으로 고쳐 답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여전히 소녀가 축구를 하기 어려운지, 왜 소녀의 운동장이 좁은지.

이 문제의식으로 한겨레21에서 취재를 하다 보니 책 한 권 전체를 여자 축구로 채우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운동장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운동장에서 슬그머니 비켜났던 경험은 교실에서, 나아가 직장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여성이 회의 테이블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곤 합니다.

매킨지앤컴퍼니가 2025년에 발표한 일터에서의 여성 보고서를 보면, 승진을 원한다고 답한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낮았습니다.

그런데 멘토링, 스폰서, 승진 추천 같은 경력 지원을 하자 그 차이가 줄어들었습니다.

욕망의 차이가 아니라 구조와 지원의 차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소녀에게 운동장을 돌려주는 것은 단지 운동장을 주는 게 아니라 더 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주는 것입니다.

 

눈치 보여요

 

동료들과 취재를 시작하며 제일 먼저 들여다본 것은 진짜 아이들의 운동장이었습니다.

서울 시내 중학교 5곳의 운동장을 점심시간에 찾아가 누가 점유하고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운동장 한가운데를 쓰는 건 거의 남학생들이었고, 여학생들은 한편에서 배드민턴을 치거나 트랙을 돌며 산책을 하는 정도였습니다.

굳이 점심시간까지 뛰고 싶지 않다는 친구도 있었지만, 뛰고 싶어도 못 뛰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남자애들이 다 쓰고 있어요, 걔네가 더 잘하는데 제가 방해하면 좀 그렇죠.

남미에서 열심히 축구를 하다 한국에 온 친구는 경기가 너무 좋다면서도 점심시간에는 스탠드에서 구경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한 말이 눈치였습니다.

남학생 눈치, 선배 눈치, 다른 여학생 눈치.

2020년대에 운동장을 쓰면서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 운동장을 달리는 학생들 (출처: 한겨레21 '소녀들의 학교 운동장은 남의 것')
학교 운동장을 달리는 학생들 (출처: 한겨레21 '소녀들의 학교 운동장은 남의 것')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그래서 눈치 안 보는 운동장이 어디 없나 찾아봤더니 있었습니다.

서울 광양중학교에는 K리그 선수 출신의 열정적인 체육 선생님이 2024년에 부임해 스포츠클럽 여자 축구부를 만들었습니다.

아침 7시 반 훈련을 취재하러 갔더니 남학생과 여학생이 반반씩 운동장을 쓰고 있었고, 제가 간 날은 오히려 여학생이 더 많았습니다.

공간이 열려 있고 눈치 보지 않아도 되니 여학생들이 와서 축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원더 티처라는 교사 모임도 있습니다.

2022년에 만들어진 여성 체육 교사 공동체로 전국에 160여 분이 활동합니다.

이 선생님들은 여학생들이 주저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운동장을 즐길 수 있도록 모였습니다.

공만 던져 주고 아이들을 방치하면 남학생은 공놀이를 하고 여학생은 벤치에 앉아 있다 간다는, 이른바 아나공을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익숙하지 않은 친구가 공을 잡고 드리블할 때는 3초 동안 공을 뺏을 수 없게 하는 규칙을 둡니다.

이렇게 하면 익숙하지 않은 친구에게는 기회가 되고, 익숙한 친구에게는 도전이 되어 모두가 즐거운 경기가 됩니다.

기울어진 경기를 평평하게 만드는 교육 방법을 적용하는 교사들이 있는 것입니다.

 

광양중학교 아침 운동장에서 지도교사와 함께 훈련하는 학생들
광양중학교 아침 운동장에서 지도교사와 함께 훈련하는 학생들

 

 

제도가 만든 변화

 

제도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든 사례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에서 1972년에 만들어진 교육개정법 타이틀 나인입니다.

연방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교육 프로그램에서 그 누구도 성별을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법입니다.

시행 이전에 700명이던 고교 여자 축구 선수는 20년 뒤 12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미국 여자 축구가 피파 랭킹 1, 2위를 유지하는 것도 결국 제도의 힘이라고 평가받습니다.

국내에서도 좋은 정책을 만났습니다.

서울시교육청이 2021년부터 실시한 공차 소서 프로그램입니다.

처음 중학교 3곳과 고등학교 1곳에서 시작해 참여 학생이 2021년 176명에서 2024년 1,235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시교육청은 2025년에 갑자기 사업을 중지했습니다.

이제 충분하다는 이유였습니다.

정말 충분한지 따져봤습니다.

2025년 학교 스포츠클럽 축구대회에 신청한 남학생 팀은 중학교 279곳, 고등학교 153곳이었지만, 여학생 팀은 중학교 64곳, 고등학교 21곳에 불과했습니다.

실제로 여학생 축구팀이 있는 곳은 아직 20%가 안 됩니다.

그럼에도 증가율만을 이유로 사업을 일몰시킨 것입니다.

법이 시행되고 제도가 생기면 변화가 생깁니다.

 

탁구·축구 기본기 자료가 올라온 원더터치 '연구활동' 게시판 화면
탁구·축구 기본기 자료가 올라온 원더터치 '연구활동' 게시판 화면

 

 

모든 아이에게 운동장을

 

지금 여성 풋살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골 때리는 그녀들 같은 예능의 영향으로 뒤늦게 공을 차 본 여성들은 이 좋은 걸 왜 이제야 했을까 라고 말합니다.

저도 딸과 함께 엄마 축구를 해 봤는데, 마흔 줄에 시작하려니 허리와 허벅지가 아파 결국 석 달 만에 팀이 해체되기도 했습니다.

충청남도 홍성에서 반반 FC를 만든 노예원 작가님은 동네 중학생들에게 어릴 때 축구하는 너희들이 진짜 부럽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자아이들이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어른이 되어서야 뒤늦게 공을 차며 아쉬워하지 않도록, 눈치를 보느라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모르는 일이 없도록, 모든 아이에게 모든 종류의 운동장을 더 열어 주면 좋겠습니다.

운동장에서 당당히 자기 자리를 차지해 본 경험은 교실에서도, 회의실에서도 그 자리를 지키는 힘이 될 것입니다.

딸이 다시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장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갈 수 있도록, 함께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천 학교스포츠클럽 축제에서 메달을 목에 건 여자 축구팀 단체사진
부천 학교스포츠클럽 축제에서 메달을 목에 건 여자 축구팀 단체사진

 

 

 

소녀의 운동장을 되찾는 이야기 | 세바시 209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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