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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1828회 | 9년 은둔 고립 생활에도 내가 무너지지 않은 이유 | 권유리

권유리 서울시 청년정책조정위원

 

9년 은둔 고립 생활에도 내가 무너지지 않은 이유

 

상사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동료들에게 오해를 사서 따돌림을 당하고, 

남자친구는 바람을 피우는 일이 생겼을 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집에서 고립 은둔을 하게 됩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집 밖으로 갈 수가 없었어요. 

'집 밖에 나가면 나쁜 일이 생길 거야'

사람들은 모두 무섭고 나쁘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정말 제 인생을 바꿀 선택을 하게 됩니다.

 

9년 은둔 고립 생활에도 내가 무너지지 않은 이유

 

안녕하세요. 

권유리입니다. 

저는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에게도 못했던 이야기를 지금 하려고 하는데요.

저는 20대 때부터 약 9년 동안 집에서 고립은둔을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고립 은둔 청년에 대해 알고 계세요? 

정서적으로는 도움을 받을 사람이 없고, 물리적으로는 방이나 집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학업과 구직,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청년을 말합니다.

 

 

모든 고립은둔 청년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은둔했던 기간 동안 영혼을 잃어버린 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람이 영혼 없이 지내면 어떨까요? 

 

고립은둔청년의 선택지?

 

고립-은둔을 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습니다.

 

자책하고 울며 괴로워하거나, 현실을 외면하고 회피하기, 두 가지 다 힘들지만, 저는 회피하기를 택합니다.

잠들면 다시는 깨지 않기를 바랐어요. 

자다가 눈을 뜨면 가슴에 쿵하고 바위가 얹어져 있는 기분이라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용기를 내서 정신과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우울과 불안이 심한 상태라며 치료를 권했지만, 불친절한 의료진에게 상처를 받아서 다시는 병원에 갈 수가 없었어요.

 

몇 번의 자살 미수와 시도가 있었고, 다음엔 실패하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철저히 준비합니다.

자살에 한 번에 성공하기 위해 3중, 4중의 계획을 세웁니다.

죽는 것보다 희망 없는 고통 속에서 사는 게 더 무서웠습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루에 수천 번씩 하다 보니 어느 날은 '아... 밥 먹고 죽어야겠다.'

또는 '자고 일어나서 죽어야지'라는 충동성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스위스에 가서 안락사를 하기 위해 영어 공부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저는 '진정한 평온을 얻었구나.' , '이젠 힘들지 않겠지' , '부럽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행할 수 없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무기력해서 실행할 힘조차 없던 게 대부분이었고,

또 한 가지는 부모님에게 할 수 있는 제 최대한의 효도는 자살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육아 방식이 저와는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키운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버텨야 했습니다.


 

어린시절, 부모님으로부터 학습한 '무기력'

 

이제 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부모님은 맞벌이로 바쁘셨고 저를 섬세하게 돌봐주지 못하셨어요.

자다가 무서운 꿈에서 깼을 때, 무서워서 못 자겠다고 하면, 뭐가 무섭냐며 내일 유치원 가야 하니 빨리 자라고 하셨고,

목욕하다 때를 밀 때 아프다고 하면, 살살 미는데 뭐가 아프냐고 하는 등,

저의 감정과 느낌은 무시되고,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은 잘못됐다는 인식이 생겨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을 학습합니다.

 

저는 사랑받기 위해 착한 아이가 되기로 했기 때문에,

자아를 버리고 어른들 말씀을 잘 듣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그러면 나는 사랑받을 거고 좋은 일만 일어날 거라 믿었습니다.

대학도 부모님이 원하는 학과로 진학하였고,

취업을 위해 간 세무회계학과는 저랑 맞지 않아서 취직을 해서도 업무적으로 너무 힘들었습니다.

퇴근 후 폭식과 구토를 반복하며 스트레스를 풀었고,

출근길에는 공황장애 증상이 와서 또 업무 중에는 원인 모를 통증에 의자에서 쓰러져 응급실에 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버텼어요.

 

연속된 힘든 일로 인해 깊어진 우울감

 

결정적으로 저를 힘들게 만든 일이 몰려온 시기가 있었습니다.

상사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동료들에게 오해를 사서 따돌림을 당하고,

남자친구는 바람을 피우는 일이 생겼을 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집에서 고립 은둔을 하게 됩니다.

우울증과 높은 불안, 사회공포, 섭식 장애, 공황장애 등의 증상이 집에 혼자 있을 땐 좀 괜찮아진 것 같았습니다.

 

제가 원해서 집순이가 된 거라 생각하고 처음 2년간은 푹 쉬면서 지냈어요.

어느 날은 중학교 동창에게 연락이 와서 이주일 만에 외출을 했는데, 

그 친구는 저를 다단계 업체에 데려가고, 다섯 시간 만에 겨우 풀려난 저는 집으로 왔을 때 도둑이 들어 있었습니다.

현관문이 쇠지렛대로 뜯겨져 있었고, 집안을 다 뒤져서 돈이 될 만한 건 가져갔습니다.

저는 무서워서 급하게 더 좁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더 우울해졌습니다.

 

어느 날은 집에 쓰레기 봉투에서 냄새가 나서 버리려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못 나가겠는 거예요.

한 발만 디디면 자연스레 계속 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한 발을 도저히 뗄 수가 없어서 냄새나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다시 방으로 돌아간 적도 있어요.

 

이해하기 어렵지만 집 밖으로 갈 수가 없었어요. 

 

"집 밖으로 나가면 나쁜 일이 생길거야" "사람들은 모두 무섭고 나쁠거야"

 

집 밖에 나가면 나쁜 일이 생길 거야.

사람들은 모두 무섭고 나쁘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시기에는 사진도 기억도 거의 없어요.

게임하는 것조차 힘들어서 누워서 잠만 자고 라면만 먹고 지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은둔기간 동안 저도 나름 노력을 했습니다.

가끔 상태가 좋아지거나 저금이 떨어졌을 때는 다시 사회에 나가서 재취직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처 때문인지 작은 역경에도 무너져 얼마 못 가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제 취직과 제 은둔을 여러 번 경험한 뒤에는 사람을 마주하는게 적은 일이라도 계속했습니다.

구청에서 공공근로로 어린이 공원의 놀이시설을 소독하는 일불법 전단지 제거 일을 했습니다.

이것도 저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주변에 이렇게라도 해보려고 하는 은둔 청년이 있다면 격려하고 도와주세요."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몸을 움직이니 우울증이 조금 나아졌지만,

한두 달의 계약 기간이 끝나고 다시 무기력한 은둔의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일은 내가 아직 회복이 안 돼서 그래, 회복하기로 마음먹으면 다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은둔 청년에게 아주 큰 문제는 우울과 무기력만은 아닙니다.

 

우울, 무기력보다 큰 문제 외로움

 

저에게 이 단계에서 힘든 문제는 외로움이었습니다.

외로움이 몰려올 때도 '난 외로움을 즐기는 사람이야'라고 힘들지 않은 척했고,

친구가 없는 이유는 마음이 맞는 사람을 못 만나서 그렇지 만나기만 하면 해결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집 근처 청년센터에서 친해지고 싶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함께 차를 마시고 대화를 하는데, 제가 대화를 못 이어가고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황했고 어색하게 헤어진 뒤 집으로 와서야 제 뇌의 기능이 떨어진 것을 처음 인지했습니다.

은둔 생활이 길어지면 겪는 문제죠.

지금 이렇게 많은 분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저를 보면 안 믿겨지시죠?

나는 자발적으로 잠시 집에서 쉬는 것이고, 사회로 나가고 싶을 때가 오면 언제든 나갈 수 있을 거라며 지내왔는데,

그 생각은 틀렸고, 난 영원히 사회에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밤새 울었고,

(다음날) 집 근처 정신과가 문 열자마자 찾아갔습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좋은 의료진을 만났고 약물 치료를 꾸준히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우울증이 나아졌고 의욕도 생겼습니다.

청년몽땅정보통

 

이번에 정말 제 인생을 바꿀 선택을 하게 됩니다. 

'내가 뭔가 할 만한 게 있을까?' 하고 찾아본 청년 몽땅 정보통에서 서울시 고립운둔 청년 지원 사업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실 제가 고립은둔 청년이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스스로 집에 있기를 택한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곁에 청년도 그런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그 자신이나 가족은 고립은둔 청년이 아니라 조용한 성격의 취업 준비 청년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푸른고래 리커버리센터

 

 

그래도 저는 뭔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청을 하였고, 

상담 후 2023년 5월부터 "푸른 고래 리커버리센터"에 다니게 됩니다.

 

일주일에 두 번은 나가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매일 아침 10시에 성북천을 걸으며 그날의 주제와 내 몸 점수와 마음 점수를 생각해 보고 종이에 표현해 보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 마음과 몸의 점수를 알 수가 없어서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발표하는 시간이 왔을 때 발표를 안 해도 된다는 거예요.

저는 처음엔 놀랐고, 그다음엔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하기 싫은 내 마음을 존중받았고, 비난이나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다음번엔 발표를 해볼까?라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어요.

그 뒤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미술 치료 시간에 선생님은 저 자신조차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제 작품을 보고 '이 부분 참 멋지다' 하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의식하고 보니 다른 청년들에게도 각자의 작품을 존중해 주고 잘된 부분은 칭찬해 주셨어요.

저도 선생님을 따라 긍정적인 부분에 더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한 달 뒤 우울증이 또 심해졌고, 마음속에는 죽음만을 생각한 채 미술치료 시간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완성된 그림은 암울하고 섬뜩해서 보기가 싫을 정도였습니다.

'내가 저런 끔찍한 그림을 그렸다니, 역시 나는 끔찍한 사람인가 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주 뒤 다시 본 추상화

 

몇 주의 시간이 지난 뒤 제 추상화 그림을 다시 봤습니다.

끔찍하게만 느껴졌던 그림에서 저도 모르게 희망을 빛으로 표현해 놓은 부분이 느껴졌고 더 이상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부정적 생각이 줄어들었고 저는 빠르게 회복해 나갔습니다.

 

청년이음센터 서포터즈모집

 

일상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나니 무언가를 더 해보고 싶었습니다.

청년이음센터에 고립 운둔 청년 서포터스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했습니다.

도움을 받는 입장에 있다가 도움을 주는 활동을 하는 것이 회복하는 과정 중인 저에게 쉽지는 않아서 여러 번 그만두고 싶었어요.

하지만 비슷한 아픔을 겪은 청년들 앞에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4개월쯤 지나니 처음 만났을 때보다 밝고 적극적인 청년들의 모습에 저도 도움이 된 것 같아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고립 청년 일 경험 지원사업

 

이제는 일도 하고 싶어 졌습니다. 

하지만 취직을 했다가 다시 재은둔한 경험에 두려워서 망설이던 중,

청년어부의 사회적 고립 청년 적합 일자리 개발 사업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고, 이거라면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참여 후 기업의 인턴십으로 일 경험을 열심히 한 결과 인턴십 종료 후에 취업까지 하였습니다.

업무를 하며 익힌 생성형 AI 프로그램을 활용해 색칠하기 책을 만들어서 출판도 했습니다.

 

색칠하기

 

현재는 프리랜서이자 청년정책조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좋은 정책이 저와 가족들을 희망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었습니다.

고통받던 제가 이제는 비슷한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한때는 무섭고 벗어나고 싶었던 이 도시 서울이 요즘은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제가 변해서겠죠. 

이게 저에게만 기적이 아닐 겁니다.

 

고립-은둔 시기를 이겨낸 방법

 

저에게 도움 된 몇 가지를 정리해 보자면 

첫 번째가 우울증 치료, 

두 번째가 도움 요청하기, 

세 번째가 나를 부정하지 않기였습니다.

 

부정적 생각이 들면 의식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몇 달째 효과는 미미했지만, 이번엔 내 감정을 느끼고 인정하는 연습을 추가로 하면서 뭔가가 달라졌습니다.

제 자신을 진정으로 알게 됐고, 그 모습이 괜찮게 느껴졌어요.

그러니까 노력해도 안 됐던 긍정적 사고가 되기 시작해요.

긍정적으로 삶을 대하니, 제가 다른 노력을 더 한 게 아닌데, 그동안 해도 안 됐던 것들이 됐어요.

잃어버린 영혼, 제 자아를 들여다보면서 살아가던 난이도가 낮아졌어요.

너무 편해요. 

 

이 과정에서 제가 알게 된 장점이 있습니다.

바로 저는 계속되는 좌절 속에서도 더 나아지려고 계속 도전하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그리고 예전엔 예민한 제가 싫었지만,

이제는 불필요한 예민함은 덮어두고, 다른 사람이 느끼기 어려운 작은 부분을 볼 수 있는 것을 장점으로 생각하고,

이 특성을 살리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혹시 저를 보고 고립은둔 청년들이 불안감을 느끼지 않으셨으면 해요.

'쟤는 저렇게 회복했는데 나는 나아질 수 있는 건가?' 하고 괴로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어렵게 강연에 선 이유는 충분히 괴로워 봤기 때문이에요.

제가 고리은둔 상태인 줄도 몰랐고, 고통스러운 체

알게 된 뒤에는 저와 비슷한 상황에서 회복된 사람을 볼 기회가 없어서 불안했어요.

사실 아직까지 저도 100% 회복됐다고는 못하겠어요.

어려운 일이 생길 때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우울증 치료를 받고, 정책과 기관의 도움을 받고, 자아를 찾아가니까 덜 힘들어요.

그동안 내가 너무 힘들게 살았구나 느껴져요. 

이제는 한 걸음을 걸으면, 한 걸음이 걸어져요.

그전에는 한 발을 딛기 위해 열 걸음을 걸어야 될 만큼 노력해야 했어요.

저는 고립 은둔 청년이 얼마나 힘들게 노력하려 했는지 알아서 이제는 좀 편안해졌으면 해요.

청년들에게 제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아진 경험이 도움 되길 바라요.

그리고 여러분들께 고립 은둔 청년을 따뜻한 마음으로 봐주시고,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괜찮아요. 당신은 부족하지도, 잘못하지도 않았어요.

충분히 쉬다가 나오고 싶을 때, 어려움이 있다면 도움을 요청하세요.

나를 괴롭게 했던 사람들과는 다른,

진심으로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