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서 하는 일이라도 어려움은 늘 있어요.
주변의 말에 지지 않고 자신의 한계에 계속 도전을 하려면 저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뭐냐면
우와 신기해요.
여러분들 안녕하세요 전광판까지 어우 감사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와이 잭스와 갬블러 크루를 대표하고 있는 비걸 김예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다리가 과연 누구의 다리일까요?
눈치채셨겠지만 바로 저의 다리입니다.
댄서들만 아는 고통이 있어요. 바로 부상이에요.
근육통과 멍은 이 사진처럼 기본적으로 달고 살고요.
무릎인대가 파열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고 허리를 크게 다쳐서 못 일어나기도 했고요.
테크닉을 연습하다가 다치기도 십상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저는 이 춤의 진심이고 춤과 이 문화를 사랑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사랑하는 춤을 추기 위해서 이제 저는 이 사랑하는 춤을 그만두지 않기 위해
저는 저를 한 개 짓는 것과 계속해서 싸워왔던 것 같습니다.
처음 춤을 배우게 된 계기는 건강을 위해서였어요.
원래 체육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싫증이 나서 아무 운동도 하지 않게 된 제게 부모님이 권했던 게 바로 춤이었어요.
어디까지나 운동이 목적이었죠.
그렇게 저는 13살 쯤에 처음으로 문화센터에서 케이팝 안무를 배우면서 춤을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배우다 보니까 도전 정신이 발휘가 되면서 점점 더 어려운 난이도의 안무를 찾게 되더라고요.
여러분 프리즈라는 동작을 아시나요?
바로 지금 이 사진처럼 어떤 포즈로든 잠깐 멈추는 동작인데 이렇게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해서 잠시 멈추는 이 동작을 제가 이 브리즈를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데요.
제가 중학생일 당시에 bap라는 보이 그룹이 데뷔할 때였어요.
그 그룹의 안무가 정말 빡세고 완전 힙합이고 특히 브레이킹을 하는 멤버가 있었어요.
제가 그 그룹에 바로 팬이 되어서 그 그룹의 모든 곡의 안무를 따기 시작을 했는데, 그 안무 중에 프리즈라는 걸 정말 너무 하고 싶은 거예요. 제가 정말 너무 하고 싶었고 보이그룹이라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바로 브레이킹을 배울 수 있는 학원을 검색해서 중학교 2학년 때쯤 드디어 제가 브레이킹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요.
처음에는 이 프리즈만 마스터할 요량으로 배우기 시작을 했는데, 제가 배우다 보니까 뭐 푸더크도 배우고 파워노브도 배우고 이것저것 많이 건드려 보게 됐어요.
그래서 프리즈 하나를 배우겠다는 제안의 한계선을 넘으니까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배우고 하다 보니 포기하기가 정말 아까웠어요.
그래서 그냥 냅다 무작정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시험 기간 뭐 주말 상관없이 학원에 가서 배우기 시작을 했어요.
그런 제가 못마땅하셨는지 부모님은 건강을 위해서 적당히 하라고 한 거지 춤추라고 허락해 준 것이 아니다 하면서 학원 지원을 끊으셨어요.
그 어린 나이에 10만 원이 넘는 레슨비를 계속해서 낼 여력이 안 됐기 때문에 저는 더 이상 춤을 그만둘 위기에 처하게 된 겁니다.
그 제가 무슨 깡이 있었는지 그 이후로 학교만 끝나면 집 앞 놀이터에 나가서 연습을 했어요.
저희 집 앞에 있는 놀이터가 고무 바닥이라서 뭐 뭐라도 어떻게든 연습을 할 수 있었고 겨울이 되면 제가 그냥 장갑을 끼고 그 앞에 나가서 연습을 했어요.
그리고 춤을 추면서도 공부도 잘할 수 있다라는 거를 보여드리기 위해서 노력을 한 결과,
제 중학교 3년간의 성적이 계속 상승선을 탔어요.
이런 저의 꾸준함과 노력을 봐주셨는지 부모님도 저에게 서서히 마음을 여시고 중학교 3학년 말쯤에는 제가 다시 학원을 다닐 수 있게끔 허락을 해 주셨어요.
그 후부터 지금까지 부모님은 언제나 든든한 저의 후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큰 부모님의 반대라는 장애물을 넘고 나니까 이번엔 또 새로운 문제에 마주해야 했어요.
제가 감사하게도 수석으로 입학하게 되었던 한림예고와 저의 집은 이제 2시간 거리 거의 약 2시간 거리였고 왕복 약 4시간인 거죠.
그만큼 참 멀고 먼 학교였는데, 그러다 보니 부모님은 제가 뭐 한두 달 다니다 그만두겠지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지금 보시는 사진처럼 저는 이렇게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들과 한림예고에서 보냈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1학년 동안 거의 내내 1년 내내 새벽 4시쯤에 기상을 해서 준비를 했고요.
첫 차를 타고 학교를 갔고 그리고 수업 시작 전까지 매일 학교에서 아침 연습을 했어요.
17살에 젊은 패기로 지각 결석 없이 1년을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리고 제가 공부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수업도 열심히 들었고, 몇몇 과목의 교과 우수상을 제가 받기도 했어요.
그렇게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기를 보내던 제게 이제 또 한 번의 전환점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죠. 18살 중반에 전설적인 비보이 팀 갬블러 크루의 오디션을 보고 입단을 하게 되었어요.
그 당시 제가 오디션을 봤을 때 합격을 했던 4명 중에 딱 유일하게 혼자 여성이었고요.
갬블러 크루를 거쳐간 비걸들은 몇 분 계시지만,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비걸로는 제가 유일을 해요.
팀에서 저에 대한 시선이 심상치는 않았어요.
이번에는 남녀의 벽에 부딪히게 된 겁니다.
나중에 들어보니까 예 좀 며칠 몇 달 다니다가 금방 나가겠지 하고 생각한 멤버들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한림예고를 다니면서 아침 이른 등교를 위해서 제가 원래는 밤 8 9시에 집에서 잠들었는데 이제는 연습실에서 더 늦은 시간인 10시까지 연습을 하고 집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몸이 점점 망가져가는 게 느껴졌어요.
건강을 위해 시작한 춤인데, 이제는 건강도 해치고 제대로 학교를 다닐 여력도 없어졌어요.
저는 춤을 정말 좋아하지만, 춤은 이렇게 제에게 많은 아픔을 주기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저는 결국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식 날에 한림예고를 자퇴했습니다.
자퇴를 선택하게 됐어요.
그래서 자퇴를 한 이후 팀 연습실만 학교 가듯이 주구장창 다니기 시작했어요.
당시 저의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자퇴라는 저의 선택을 주변에서 그렇게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별로 안 계셨어요.
팀 안에서도 왜 자퇴를 했냐? 하고 한 소리 듣기도 했고요.
그리고 그때 마침 이 브레이킹이 정식 시범 종목으로 채택이 된 부에노스 아이레스 유스 올림픽 모집이 시작됐어요.
마침 그게 아마 자퇴하고 한 달 채 안 된 시점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저는 이번에 다시 한 번 사람들이 그 한계선을 뛰어넘을 수 있는 무대가 될 거다라고 확신했죠.
하지만 제가 온 시간을 쏟아붓고 노력하는 모습도 팀 멤버들에게 그렇게 믿음을 주지 못했나 봐요.
제가 한국 비디오 예선을 통과를 하고, 그다음에 아시아 예선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제 아시아 예선을 결승까지 갈 의지로 준비를 하고 있는 저한테 팀 멤버가 저에게
'너가 이번 예선 결승을 갈 수 있을까? 너가 갈까?'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더 칼을 갈았죠.
이제 제일 먼저 연습실에 일찍 출근을 해서 제일 늦게 퇴근을 하고,
누구보다 더 열심히 준비를 해서 결국엔 결승을 갖고 2등으로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네 하지만 이렇게 통과를 하게 돼서 간 요소 올림픽 본선도 순탄치는 않았어요.
이 본선 준비 기간에 댄싱하이라는 10대 댄서 프로그램에 참여를 하게 되었거든요.
이 두 가지를 다 하기 위해서 의지를 다지고 있던 저와 다르게,
부모님과 동료들은 저를 많이 걱정했고 특히 부모님이 강하게 반대를 하셨어요.
댄싱왕의 일정도 정말 벅찼기 때문에 유소 올림픽을 제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할까 봐 걱정스러우셨던 거예요.
그때 제가 부모님한테 울면서 정말
나는 둘 다 중요하고 둘 다 할 수 있다. 제발 난 할 수 있으니까 믿어달라
고 부모님한테 빌었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저는 댄싱하이 연습이 끝나면 팀 연습실로 바로 가서 1시간이라도 대회 준비를 하고 다시 새벽에 댄싱하이 연습을 가는 그런 살인적인 스케줄을 버텨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여러분
저는 이제 유스 올림픽 동메달 리스트가 되었고, 한국 최초의 브레이킹 메달리스트가 되었습니다.
정말 그때 생각하면은 와 내가 어떻게 했나 싶기도 한데
당시 코치 오빠께서 저에게 너는 정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는 최고의 칭찬을 해주셨어요.
주변의 말에 지지 않고 자신의 한계에 계속 도전을 하려면, 저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뭐냐면, 열정으로 한계에 부딪히는 것
그리고 그걸 실력으로 두 눈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번에 많은 주목을 받게 된 계기인 스트리드먼 파이터에서도 한계에 도전하는 시간이었어요.
이제 댄싱하이와 요소 올림픽이 겹쳤던 것처럼 국가대표 선발전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브레이킹 대회 중에 하나인 레더 wbc 1 월드 파이널이 바로 이 수화 촬영하는 동안과 겹치게 됐어요.
유서 올림픽 때는 이제 두 가지 정도가 겹쳤다면 이번에는 국제 선발전, 레wbc원 그 외에 광고나 여러 가지 다양한 일정들 그 3개 이상 모두 해내야 하는 거였죠.
그래서 스트리드몬 파이터도 댄싱하이보다 정말 장난 아닌 스케줄이었고, 정말 살인적인 촬영 연습 스케줄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동안 여러 번 한계를 넘어왔던 경험이 있잖아요.
시간이 되는 대로 꼭 회사 연습실로 가서 새벽에도 연습을 하고, 와이 잭스의 단체 연습이 끝난 뒤에도 혼자 남아서 대회 준비를 하면서, 항상 제가 만족할 만큼의 연습량을 채우고 갔어요.
그러다 보니까 저희 와이덱스 언니들도 제발 예리야 제발 집에 좀 가라.
제발 가라고 자주 저한테 얘기할 정도였고
저 스스로도 참 피곤한 삶이다 싶긴 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까지 노력하는 이유는
주변에서 저를 의심할 때마다
"네가 나에 대해 얼마나 알아? 내가 그것밖에 안 될 것 같아? 나는 생각보다 되게 독하고 대단한 사람이야. 헛소리하지 마"
하고 그들이 지어놓은 한계를 깨부수는 거를 두 눈으로 직접 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런 저를 보고
"물론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지"
하실 수도 있어요.
그러나 하지만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좋아서 하는 일이라도 어려움은 늘 있어요.
특히나 이제 힘든 춤을 추는 댄서이다 보니까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상대적으로 이런 하드 트레이닝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은 크게 지장이 없는 다른 장르의 댄서나 뭐 안무가 언니 오빠들을 볼 때 특히 이런 걸 느꼈어요.
나도 같은 댄서인데 왜 나는 유일하게 뭔가 비걸이라는 이유로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나,
"왜 나만 왜 이렇게 힘든 것 같지?"
억울하고 회의감이 들 때도 있었어요.
근데 그러던 중에 제가 우연히 SNS를 하다가 국가대표 선수들의 명언 모음집을 제가 보게 됐어요.
그 안에 모든 말씀들이 다 정말 명언이었지만, 그중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결코 최고가 될 수 없다
이런 한 영혼이 제일 인상 깊었어요.
저한테 내가 이뤄내고 싶은 목표와 지켜내고 싶은 내 자신과 가치를 위해서는
정말 엄청난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고 수많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하는구나
아 이게 맞는 거구나 하고 다시 저를 다잡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와이즈 x와 갬블러 크루를 대표하는 비걸이라는 책임감,
그리고 2024년 파리올림픽 브레이킹 국가대표가 되어서 좋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저에게 달려 있습니다.
제가 이런 하고 싶은 바를 이뤄내기 위해서 나를 지키고 싶다는 의지 하나로 이겨내 온 그동안의 시간들이 이제는 더 넓게 확장이 된 거예요.
하지만 여전히 저와 그리고 한국 비걸들을 향해서 전체적인 비걸 신을 향해서 의심의 시선 냉랭한 시선들은 여전합니다.
제가 불과 정말 며칠 전에 치러진 레더블bc1 월드 파이널에 다녀왔을 때도 첫 경기부터 우승자랑 만나서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습니다.
이제 제가 이 레더블비시온이라는 대회를 레더블 측에서 직접 초청을 받아서 와일드카드로 바로 본선 무대를 나가게 된 건데,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어 예리는 안 된다 역시 안 된다 한국 비걸 약하다 와일드카드가 된 것도 감지덕지다 뭐 이런 안 좋은 시선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한국 비걸 중에 저는 역사상 최초로 20년 넘게 치러온 이제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의 1대 1 대회 저는 한국 비걸 최초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에디션 모든 라인업이 우승 후보라는 평을 받았어요.
그리고 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도전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반 정도 되는 경력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무대에 올라봤고요. 자 이쯤에서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리정언니의 멘트를 인용해 볼게요.
그러는 본인들은 22살 때 뭐 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혹시 어떤 도전 앞에서 자신을 쉽게 의심하고 있진 않으신가요?
사람들도 여러분들을 한계 지을 거예요.
힘든 시간들을 못 견뎌낼 거니까 견뎌내지 못할 거니까 그만한 능력이 안 될 거니까 적당히 타협하고 편한 길 가라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서 이 말이 여러분들을 위한다는 이유를 댈 거예요.
저 또한 역시 전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한계를 스스로 긋지 않고 계속 넘으려고 노력을 해왔을 뿐이에요.
저는 여러분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믿습니다.
정말이에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는 생각보다 정말 강해요.
정말 할 수 있다라고 자신을 믿어보세요.
자신을 믿고 그리고 그다음이 중요하죠.
한계를 넘을 수 있다는 거를 열정과 직접 실행으로 보여주세요.
이건 저 스스로 항상 새기는 단어인데
LIMITLESS 한계 없음을 뜻하는 영어 단어이고요.
LIMITLESS 이것만을 기억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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