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완도에서 힙하게 사는 방법 | 김유솔 완도군 청년공동체 완망진창 대표 |#도전 #청년 #삶 | 세바시 1755회
저희 핸드폰 3초면 고칠 수 있어요.
제가 방해 금지 모드 하나만 딱 풀어드리면 어르신들이 막 박수를 치세요.
우리 장 기술자라고 너무 야물딱지다고 이렇게 말씀을 하시거든요.
지금 완도 여고생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진관 사장님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핸드폰 고쳐드린 것도 엄청난 재능은 아니잖아요.
제가 이렇게 완도에 돌아와 보면서 느낀 거는
요약
- 인물 소개와 배경: 김유솔, 26세, 전남 완도 용암리 이장·청년단체 ‘원망진창’ 대표·사진관 운영. 서울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특별함과 지역의 가치를 느껴 완도로 귀향.
- 귀향 계기: 완도에서 사진관을 운영하자는 친구들의 제안과, 고향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는 확신.
- 이장 선출 과정: 마을 행사 참여와 어르신들과의 관계 형성으로 지지를 얻어 이장 당선.
- 활동 내용: 플리마켓, 행사, 전남형 청년 마을 프로그램 운영, 외부 청년과 함께하는 체험·전시·교류로 지역 정착 유도.
- 지역 정착 사례: 일러스트레이터, 물리치료사, 영상 프리랜서 등이 완도에서 삶을 이어감.
- 지역의 가치: 도시와 달리 비교 대상이 적어 자신을 더 선명하게 인식 가능, 서로 돕는 공동체 문화, 실패 개념이 없는 창의적 활동 가능.
- 메시지: 지역은 소멸이 아니라 고유 색을 살리며 성장 중이며, 누구든 와서 경험해 보고 가능성을 확인하길 권함. 시골이라도 꿈과 가능성에 제한이 없음을 강조.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로 26살이고요.
완도 용암리라는 마을의 이장을 맡고 있는 김유솔입니다.

오늘도 이런 질문을 들었어요.
혹시 배 타고 왔냐는 질문을 들었는데요.
완도는 차로도 갈 수 있는 곳이고요. 제가 차로 운전을 해서 한 6시간 정도 걸려서 이곳으로 온 것 같아요.
저는 그 완도에서도 완도 읍이라는 가장 큰 본섬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인데요.
이 완도 친구들은 저도 그렇지만 커 오면서 당연하게 도시로 가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친구들이 정말 많아요.
그래서 저는 서울에서 회사 생활을 보낸 후에, 다시 완도로 돌아와서 좀 이장이라는 좀 특별한 직업을 갖게 됐는데요.

완도에 있는 웬만한 것들이 다 이사진 안에 나와 있어요.
바다, 양식장, 산, 섬 이런 것밖에 없는데,
제가 처음에 완도에 내려왔으니까 딱 보니까 진짜 이것밖에 없고 다른 거 너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좀 관심 있는 친구들 생기기만 하면 완도에 내려와라 나랑 같이 놀자 이렇게 꼬셔도 보고
또 근처에 있는 사장님들 좀 제 또래 좀 더 된 것 같으면, 같이 우리 좀 행사나 한번 해보자 이래서 플리마켓도 하고 했더니,
그게 근데 저는 모르고 했더니 도시 재생이랑 똑같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도시 재생 활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제가 그렇게 활동을 해보니까
막 이렇게 친구들이랑 하고 있으니까
어느 날 그때 당시 용암리 이장님께서 저한테 자네 혹시 이장일을 한번 해보지 않겠냐? 갑자기 이렇게 물어봐 주신 거예요.
여러분 이 장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계세요? 저는 완도에서도 완도 읍이라는 섬이에요.
근데 완도 읍은 약간 다운 타운이에요. 도시 출신이라서 저는 완도에서도 좀 고급스러운 편이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저는 이장 일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사실 잘 몰랐어요.
이 질문을 듣고 제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고 답변을 드렸어요.
제가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이장님께서 근데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해서 그냥 할 수 있는 거 아니다.
어르신들이 동의를 해 주셔야 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열심히 선거 운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마을에 행사를 하면 가서 괜히 저 누구 집 딸인데요 이렇게 얼굴도 비추고요.
그리고 마을 행사하면 가서 괜히 사진도 좀 찍어드리고, 그렇게 열심히 얼굴을 좀 비춰드리고 나니까
나중에 마을 총회 때 이장님께서 이장 후보로 본격적으로 좀 올려주셨어요.
그때 이장 후보가 저 말고도 다른 분이 한 분 더 계셨는데,
마을 사람들이 전부 다 잘 알고 그 집 괜찮지 하는 신뢰받는 어르신이셨어요.
그래서 각자 좀 본인의 포부를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분이 저보다 먼저 하셨어요.
근데 그분이 딱 이렇게 일어셔서 젊은 사람이 하것다는디 로 그냥 앉아버리시는 거예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응원을 받고 근데 그래도 좀 긴장이 되더라고요.
제가 오늘처럼 긴장을 하면 갑자기 머리가 영특해질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아 이 말을 해야겠다. 생각이 들어가서
마을은 어르신들이 워낙 잘 아시잖아요. 근데 저는 그 밖에 다른 것들을 잘 알아요.
그래서 어르신들이 마을을 잘 알려주시면 제가 그 밖의 다른 것들로 마을 일을 열심히 할게요.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다들 좀 만족을 하시긴 하시는데, 제가 아직 시집도 안 가고 너무 어리니까. 이러다 떠날지도 모르고 좀 걱정이 된다.
그래서 막 도움이 될 것 같은 이 말저말 막 하다가
저희 할아버지도 옛날에 이 동네 사셨어요.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갑자기 다들 눈빛이 바뀌시는 거예요.
저에 할아버지 성함이 뭔데? 이렇게 물어보시니까 저희 할아버지 성함이 황 맹자 석자십니다.
이렇게 말씀을 했더니, 아 그렇지 괜찮지 이러면서 이장을 시켜주셨어요.
그렇게 제가 이장을 맡은 지 2년 차가 되었고요.
현재는 딱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더니, 완도에서
저같이 좀 사고 잘 치는 유별난 토박이 친구들을 모아서, 원망진창이라는 청년 단체도 만들어서 활동을 하고 사진관도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걸 들어보면,
제가 완도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 같아 보이는데,
저도 어렸을 때는 완도가 너무 답답하고 그리고 하루빨리 완도를 뜨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냈었는데요.
저 말고도 다른 친구들도 시골에 사는 친구들도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할 거예요.
저는 디자이너가 꿈이었는데, 그때 당시 완도에 입시 미술을 할 수 있는 학원이 단 한 곳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막 검색을 해봤어요.
디자이너가 되는 방법 이렇게 검색을 하니까 좋은 건 다 서울에 있다는 거예요.
조금이라도 괜찮은 학원 다 서울에 있고 이러니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서울에 가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됩니다.
뭐 직장도 알아보고 학원도 알아보고 열심히 준비를 했어요.
그래서 준비를 하고 나서 선생님이랑 엄마께 계획을 말씀을 드렸는데,
저는 사실 좀 반대하실 줄 알았는데, 말은 제주로 가고 사람은 한양으로 가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도 반대를 안 하셨어요.
그냥 남들보다 조금 빨리 가는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순순히 보내주셔서 거창하게 서울 올라와서 몇 년 간은 고시원에서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해서,
제가 원하던 디자이너를 할 수 있었었어요.
처음에는 꿈꾸던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저한테는 되게 뜻깊고 좀 감명 깊고 그래서 되게 좀 꿈에 차 있었는데,
그렇게 몇 년간 직장 생활을 다녀보니까. 남들이랑 똑같이 지하철 타고 그냥 어떤 김사원 그냥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고
그냥 똑같은 사람인 거예요.
저는 완도에서 진짜 좀 특별했었거든요.
그래서 놀러는 절대 안 올 거라고 생각했던 완도에 휴가차 다시 내려가게 됐어요.
학창 시절에 집 밖에서 맨날 보던 바다도 오랜만에 내려가서 한번 구경도 하고요.
오랜만에 친구들도 만나 가지고 막 수다를 떠는데 친구들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나 이번에 사진 찍었는데 된통 망했다 찍은 그대로 나왔다 이렇게 말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너 같은 애가 완도 내려와서 좀 이렇게 보정도 잘해주는 사진관을 좀 해줬으면 좋겠어.
이 얘기를 하는데 집에 가서 생각을 해보는데 잠이 안 오는 거예요.
아 내가 다시 여기 오면 특별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렇게 바로 서울에 올라가서 사진 학원 등록하고 준비를 열심히 해서 2년 뒤에 기가 막힌 리터칭 기술을 가지고
완도로 다시 돌아왔고, 제가 그래서 완도에서는 지금 완도 여고생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진관으로 그 사진관 사장님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완도에 돌아와 보니까 완도가 너무 예쁘게 느껴지는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사실 완도는 변한 게 없거든요.
바다도 그대 로고 뭐 산도 그대로인데, 변한 거는 제가 변했던 거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완도에 돌아와 보면서 느낀 거는 아 완도 생각보다 좀 살 만한데? 이 생각이 들더라고요.
근데 살만한데 친구들이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질 않아요.
다른 또래 친구들도 완도가 저처럼 답답하다고 생각해서 떠나서 다시 돌아오질 않는 거예요.
근데 저희가 살아보니까 어 생각보다 좀 살 만하다고 느껴지는데, 이걸 저는 다른 분들도 좀 느껴봤으면 좋겠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 아까 그 사고 친다는 완망진창 친구들하고 완도에서 완도 살 만한지 본인들이 직접 와서 한번 느껴보세요. 하는,
전남형 청년 마을 프로그램을 저희가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 보시면 저희가 토박이 친구들이 직접 완도에 있는 명소를 본인 시점으로 소개한 건데요.
이때 여기가 별이 진짜 잘 보이거든요
전국에서 오신 체험 자분 들하고 같이 이렇게 같이 별구경도 하고, 여기에서 그냥 돗자리 깔아놓고 차도 마시고, 이렇게 지내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분들이 오셔가지고 본인의 작업물을 전시하는 전시나 아니면 플리마켓을 같이 운영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운영하다 보니까 감사하게도 정착을 하시겠다는 분들이 있었는데요.
그중에 한 분이 부산에서 오신 일러스트레이터 분이셨어요.
막 완도에 사시겠다고 하니까 저희는 감사는 한데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어 정착 근데 왜 어떤 마음으로 하시게 된 거예요? 이렇게 여쭤보니까 그분이
나는 부산에서 정말 수많은 일러스트레이터 중에 한 명이었는데 완도에 오니까 제가 좀 더 특별하게 느껴져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도시에서는 사람도 너무 많고 또 그 사람들이 너무 많다 보니까 그 사람들한테 가려져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자꾸 까먹게 되고 그랬었는데,
완도에 오니까 비교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눈에 띄기도 좀 더 쉽다 보니까
오히려 더 또렷하게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조금 더 느끼게 된다는 거였어요.
근데 저도 서울에서 그랬더라고요.
완도에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었구나 확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완도에 와보아야겠다는 그런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됐어요.
부산에서 오신 작가님 말고도 뭐 물리 치료사를 하시는 분도 있고요.
또 영상 프리랜서를 하시는 분도 완도에서 계속 일을 하면서 지내고 계세요.
이분들이 본인의 일상을 여기에서 구축해 나가시고 또 어떨 때 저보다 더 재밌게 사시거든요.

이분들이 항상 어디를 갔다가 다시 완도 내려오실 때는 완도 빨리 다시 내려가고 싶다.
이렇게 말씀을 많이 하세요. 약간 완도의 부작용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완도에서 조금 더 선명하게 제가 느낀 거는 나 우리 마을에 진짜 필요한 사람이구나! 이 생각을 느끼게 됐어요.
며칠 전에 어르신이 핸드폰이 고장 났다고 저한테 막 이장 며칠 전에 이거 핸드폰 바꾼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전화도 안 오고 진동도 안 울리고 카톡도 안 온다고 이거 핸드폰 고장 났다고 저한테 막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가 3초면 고칠 수 있어요. 제가 방해 금지 모드 하나만 딱 풀어드리면, 어르신들이 막 박수를 치세요.
우리 땅 기술자라고 너무~ 야무지다고 이렇게 말씀을 하시거든요.
제가 이렇게 어르신들을 이제 도와드리면서 지낸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장 나 이 장 주려고 지금 물에 감 담가놨다고, 이장 와서 감 가져가 그러고
어제 그거 도와준 거 너무 고마워서 내가 파김치 담가놓은 거 좀 가져가 가서 보니까 한 박스 이렇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근데 제가 이렇게 도움을 드린다고만 생각했는데 저희 친구들이 집 구할 때도 같이 알아봐 주시고,
빈집 나오면 누구보다 먼저 알려주 시 더라고요.
서울에서는 양 옆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면서 지냈는데,
이 완도에서는 아 누가 사는지도 알고 이렇게 서로 도우면서 사는 일밖에 없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아까 제가 핸드폰 고쳐드린 것도 엄청난 재능은 아니잖아요.
근데 그런 것마저 제가 이렇게 칭찬을 받으면서 하다 보니까
제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솔직히 가늠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 (별거 아니지만)
제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이 동네에서
재미있는 일들도 채우고 플리마켓도 운영하고
또 어르신들이랑 같이 행사를 운영하기도 하는데요

저희 마을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그냥 하나예요.
저희 마을이 전부 다 보이는 뷰인데, 여기에서 뭔가를 하면은 성공이나 실패의 개념이 따로 없어요.
왜냐하면 없는 걸 저희가 만들어낸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그걸로도 이미 충분해서 사실 실패(?)라고 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저나 저희 팀원들은 완도에서 뭔가를 할 때마다 아 우리 진짜 여기에 너무 필요한 사람이다
이런 걸 매번 느끼면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하는 청년들이 각 지역에 되게 많이 있어요.
지방을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는 분들이 정말 많거든요.
근데 이런 청년들이 저 말고도 지역에 많이 있는데, 요새 지역 소멸 진짜 문제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걸 볼 때마다 이거 진짜 지역 소멸이 되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이 생각이 많이 들어요.
많은 친구들이 아 너 완도에서 그렇게 힙하게 활동하고 있는 거 보면, 너무 멋있다 나도 같이 하고 싶다.
이런 친구들이 점점 늘어나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저는 오히려 지방이 소멸되는 게 아니라
지금 조금씩 더 성장해 나간다고 생각해요.
근데 그냥 성장하는 게 아니라 지역만이 가질 수 있는 색을 가지고 또 그 지역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서
그 방식대로 계속 성장해 나가는 것 같아요.
저는 지금의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너 그냥 서울에서 그러지 말고 뭐 할 거 없으면 완도나 내려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좀 더 빛날 수 있는 곳이고 내 가치를 좀 더 확인할 수 있는 곳이고 가능성을 더 넓게 생각할 수 있는 곳이라서
저희라도 그렇게 내려오라고 말씀드리고 싶고, 지역 소멸 때문에 내려와라고 했으면 저희라도 안 내려왔을 것 같아요.
근데 여기가 시골이라고 해서 저희가 꿈이 또 작은 것도 아니거든요.
그리고 또 하고 싶은 것도 못하는 것도 절대 아니에요.
그래서 한계가 없는 곳이라서 어디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지 가능성을 볼 수 있는 곳이라서
혹시 제 이야기를 들으시고 아 완도 그렇게 좋아 언니 그렇게 살만해라는 의문이나 관심이 조금 생기셨다면
또는 지방에 살고 싶으셨는데, 어떻게 할지 좀 막막하셨다면은
제일 먼저 해보셔야 되는 게 일단 한번 와 보시는 거
먼저 와 보시면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시간을 늘려서 오는 계기를 한번 만들어 보시면요.
솔직히 왔다 갔다 하기도 좀 귀찮고 엉덩이 붙이고 살고 싶어 지실 거라고 생각해요.
아까 제가 부작용 말씀드렸잖아요.
떠며면 다시 완도에 오고 싶어 져요.

그래서 저는 제일 중요한 게 언제든 떠날 수 있고 또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이 그렇게 시작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처럼 많은 청년들이 이 완도를 겪어보는 계기를 만들고요.
또 저희 어르신처럼 다양한 세대랑 소통하는 행사를 만들고 또 시골이라서 잘 안 보였던 것들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발굴해 내서 시골이라서 더 멋있는 브랜드들을 같이 찾아서 발굴해 낼 거고
그렇게 멋쟁이들이 사는 섬이 되어서 누구든 끼고 싶은 섬으로 만들 거예요.
저는 지금까지 용암리 이장이자, 원망진찬 대표이자, 솔진관 언니 김유솔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YouTube > 세바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세바시 1757회 🎮 게임을 통해 꿈꾸는 나의 미래 📚 박병현 여수 웅천중학교 재학 (2) | 2025.08.08 |
|---|---|
| 세바시 1756회🫂목욕 봉사 갔다가 끼와 흥을 배웠습니다🌊 금대현 거제 돌고래봉사단 단장 (4) | 2025.08.08 |
| 세바시 1754회👗옷은 날개가 아닙니다 ♻️ 이소연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자 (6) | 2025.08.08 |
| 세바시 1753회🚴♂️넘어지지 않는 자전거🍱이금주 도시락 봉사자 (4) | 2025.08.08 |
| 세바시 1752회🦮편안한 삶의 소통 방법, 체인지 메이커가 되라🥤이종혁 공공소통연구소장, 광운대 교수 (6) | 2025.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