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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1941회 | 전교 1등 엄친딸 의사, 한쪽 눈을 잃고 더 넓은 시야를 얻다 | 서연주 윙크의사 ‪@wink.doctor‬

전교 1등 엄친딸 의사, 한쪽 눈을 잃고 더 넓은 시야를 얻다 | 서연주 윙크의사 ‪@wink.doctor‬ | 세바시 1941회 | 희망 동기부여 행복

 

전교 1등 엄친딸 의사, 한쪽 눈을 잃고 더 넓은 시야를 얻다

 

 

출구가 없는 아주 깊은 터널의 어둠 속에 있는 것 같은 분들 계시면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세요.

당직을 서고 나면 오프라고 부르는 휴식이 주어지는데요.

이 시간에 폭발적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해야겠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밤새 운전해서 강원도에 승마를 하러 떠났습니다.

그게 제 기억의 마지막이었어요.

한쪽 눈과 얼굴이 온통 뭉개진 피투성이 환자가 되어 응급실로 실려왔습니다.

 

 


 

1️⃣ 출구 없는 터널 같았던 사고의 순간

강연자는 과중한 당직과 스트레스로 위험한 취미에 몰두하다가 승마 사고를 당한다. 그 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하고, 의사였던 자신이 하루아침에 환자가 되어 같은 병원 응급실로 실려 오게 된다. 인생이 끝난 것 같은 절망의 순간이었다.

2️⃣ 첫 번째 인생의 전환, ‘의사가 된 이유’

과거 과학자를 꿈꾸던 시절, 치열한 경쟁 속에서 후배의 극단적 선택을 목격하며 삶의 의미를 깊이 고민하게 된다. 그 사건을 계기로 사람의 생명과 삶의 가치를 지키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힘든 과정을 거쳐 내과 전문의가 된다.

3️⃣ 두 번째 전환, ‘의사이자 환자’가 되다

사고 이후 남은 한쪽 눈마저 잃을 수 있다는 공포 속에서 가족, 의료진, 친구들의 헌신적인 사랑을 경험한다. 그 과정을 통해 환자의 두려움과 감정을 몸소 이해하게 되었고, 의사의 말 한마디가 환자에게 절망이 될 수도, 희망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4️⃣ 장애를 받아들이며 더 넓어진 시야

한쪽 눈의 실명과 장애 등록은 삶의 또 다른 도전이었지만, 이를 숨기지 않고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과 연결되며 희망을 얻고, 자신의 이야기를 책과 강연으로 나눈다. 장애를 통해 오히려 세상과 사람을 더 깊이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얻게 된다.

5️⃣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었음을 깨닫다

사고는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얻은 계기였다. 평범한 일상, 가족과의 식사, 산책 같은 순간들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 의사로 복귀한다. 한쪽 눈으로 보지만 더 넓고 깊게 세상을 보는 ‘윙크 의사’로서, 고난 속에서도 길은 열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서연주
서연주
한쪽 눈을 잃고 더 넓은 시야를 얻다
한쪽 눈을 잃고 더 넓은 시야를 얻다

 

 

 

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윙크 의사라고 불리는 내과 전문의 서현주입니다.

여러분 제가 왜 윙크 의사인지 궁금하신가요? 네 저는 사실 왼쪽 눈이 안 보여요.

사고로 한순간에 시력을 잃었습니다.

작아진 눈이 이렇게 찡긋 윙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윙크 의사라는 별명을 얻었어요.

 

 

오늘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요.

우리가 살다 보면 다양한 시련을 마주하잖아요.

그런데 이때 이 시련을 어떻게 넘어서고 또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 인생은 두 번 크게 바뀌었어요. 2년 전 저는 매일 야간 콜을 받는 새내기 내과 의사였는데요.

 

 

병동 중환자실 응급실을 뛰어다니느라 너무 힘들었지만 환자 상태가 좋아지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워낙 쉬지를 못하다 보니까 몸이 망가지고 스트레스가 쌓여 갔습니다.

당시 병원에서 36시간 연속 당직을 서고 나면 짧은 off 라고 부르는 휴식이 주어지는데요.

이 시간에 폭발적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해야겠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그래서 오토바이 승마 이런 위험한 스포츠에 손을 댔습니다.

 

 

네 그렇게 위태롭게 살던 제 삶에 갑자기 꽝 하고 사고가 나요.

2022년 단풍이 아름답던 계절이었습니다. 토요일 밤까지 병원에서 세미나를 들었고요.

밤새 운전해서 강원도에 승마를 하러 떠났습니다.

세미나를 무사히 마치고 이제 저는 평창으로 가야 됩니다.

 

 

그리고 그게 제 기억에 마지막이었어요.

말에서 떨어진 저는 기억을 잃었고 한쪽 눈과 얼굴이 온통 뭉개진 피투성이 환자가 되어 응급실로 실려왔습니다.

 

 

네 모든 것이 꿈 같았어요.

아니 이것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의사였던 제가 만 24시간도 채 안 돼서 갑자기 환자가 되어 실려온 겁니다.

그것도 같은 병원에요. 부모님 뵐 낮이 없었습니다.

평생 애지중지하며 보석 같이 키워왔던 딸인데 제 스스로 흠집을 내버린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난 이제 뭘 해야 하지?

의사로서의 꿈은 이제 끝인 건가?

마음이 무너졌어요.

 

하지만 제 인생의 영화라면요. 다행히 해피 엔딩이에요. 감사하게도 저는 여전히 내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2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일곱 번 전신마취 수술을 하고 아직도 또 수술이 남아 있어요.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죠.

그래도 의사잖아. 네 실제로 저희 어머니 지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대요.

연주는 가진 게 많으니 그 정도는 잃어도 괜찮지 않아?

 

 

물론 위로하시려는 마음이셨겠지만 처음에 듣고 충격을 받게 된 거예요.

누구한테나 한쪽 눈을 영구 실명하는 일은 영원히 괜찮은 일이 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소중한 걸 잃기만 한 게 아니더라고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었습니다.

한쪽 눈을 잃었지만 더 큰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얻게 된 거예요.

 

한쪽 눈을 잃고 얻은 더 큰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
한쪽 눈을 잃고 얻은 더 큰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

 

혹시 지금 이 세상이 끝난 것 같고 

출구가 없는 아주 깊은 터널의 어둠 속에 있는 것 같은 분들 계시면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세요.

 


 

중학교 때 제 별명이 올백이었거든요. 네 올백이 아니고 시험을 보면 모두 100점을 맞아서 올백이었어요.

기뻐하는 엄마를 보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습니다.

아마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공부를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 결과 과학 영재 고등학교를 거쳐서 과학 영재들이 모인다는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었는데요.

 

당시 과학자가 꿈이었던 저는 무척 설레고 또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니까 충격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거예요.

 

카이스트생 또 자살
카이스트생 또 자살

 

2011년의 아름다운 봄날이었고 재학생들이 하나 둘 목숨을 끊기 시작했습니다.

언론에 대서 특별 됐죠. 대한민국 경쟁 사회가 영재 학생들을 죽였다라고요.

그러던 중 네 번째 학생이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충격적 이게도 그 친구가 제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 동아리 후배인 거예요.

새벽에 그 친구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후배의 너무 아리따운 영정 사진 앞에 아버님이 소주병과 함께 쓰러져 잠들어 계셨어요.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이 왈칵 나왔습니다.

나 지금까지 뭐 했지?

나 이 친구가 삶을 저버리는 동안 나 지금까지 뭐 하고 있었지?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았어요.

그때부터 저는 우울감에 빠져서 방황을 시작합니다.

제 인생에서 그때만큼 공허했던 시기가 없었던 것 같아요.

내가 아무리 공부와 연구에 매진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이 비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저는 인간의 생명과 그리고 삶의 가치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교과서 한 줄로 남기보단 사람 살리는 일을 하겠어
교과서 한 줄로 남기보단 사람 살리는 일을 하겠어

 

결국에는 과학자의 꿈을 접고 곁에서 사람을 살리고 곁에서 사람을 돌보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해요.

부모님은 힘든 길이 될 거라고 반대하셨지만 결국 저는 의전원에 합격했고 그렇게 힘들게 의사가 됐어요.

그랬는데 그렇게 힘들게 의사가 됐는데 제가 갑자기 한쪽 눈을 실명한 환자가 된 거예요.

그리고 남은 눈마저 실명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네 승마장 흙이 더럽기 때문에, 반대쪽 눈에 감염될 위험이 높다고 했어요.

그리고 혹시 감염이 생기면 반대쪽 눈도 적출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영원한 어둠을 상상했던 것 같아요.

 

한번도 상상해본적 없는 영원한 어둠
한번도 상상해본적 없는 영원한 어둠

 

새벽에 환자 침대에서 눈을 뜨면요 이렇게 양손을 허우적거렸어요.

여전히 앞이 보이는지를 확인해야 했거든요.

 

그런데 끝없이 어두운 동굴처럼 느껴졌던 그때 어디선가 작은 빛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곁에서 헌신적으로 저를 지켜주는 가족들이 보이기 시작한 거예요.

 

 

응급실로 실려온 저 하나뿐인 여동생이 저를 보러 오지도 않더라고요.

저 잘못되면 영영 앞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야속했죠.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나 엄마가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동생이 너 실명했다는 소식 듣자마자 뭐라는 줄 아냐면서, 자기 눈 주겠다고 언니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으니까 근데 나는 컴퓨터 사무직이라 눈 하나여도 괜찮다고 내 눈 이식해 주겠다고

기꺼이 본인 눈을 언니에게 줄 생각을 하며 동생은 응급실 문 앞에서 울고만 있었대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참 바보 같은 언니죠.

동생뿐만은 아니었어요.

늘 세심히 눈을 살펴봐 주시던 의료진,

이 시기가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 될 거라며 믿음과 용기를 주셨던 스승님

그리고 아침마다 따뜻한 커피를 타다 준 친구들 모두가 연약한 저를 사랑으로 보호해 줬어요.

 

 

덕분에 다른 쪽 눈도 무사히 살릴 수 있었고요.

그래서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고 끝까지 수련을 마쳐 멋진 내시경 전문의 자격증도 취득했습니다.

 

소화기내시경 세부전문의
소화기내시경 세부전문의

 

감사합니다.

 

제가 비록 한쪽 눈을 잃었지만 또 얻게 된 새로운 세상은요 환자의 세상을 보는 눈이었습니다.

 

새롭게 얻은 환자의 세상을 보는 눈
새롭게 얻은 환자의 세상을 보는 눈

 

 

실명 소식을 듣고도 꽤나 담담했던 저였는데요 한 번 웅웅 울었던 적이 있어요.

언제였는지 아세요? 바로 퇴원할 때였습니다.

병원에 있으면 당장 무슨 일이 생겨도 바로 처치가 가능하잖아요.

그런데 집으로 갔는데 혹시 나빠지면 어쩌지 너무나 두려운 거예요.

그때 예전에 제가 의사로서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환자들이 퇴원을 머뭇거리면 일상에 돌아가는 것도 치료의 일부입니다라고 단호하게 얘기를 했던 게 부끄럽고 죄송하더라고요.

의사의 입장도 제가 이해를 하게 됐습니다.

사실 제가 환자로 있을 때 인턴 선생님이 제 얼굴 드레싱을 대충 해주고 간 적이 있는데 저희 엄마가 씩씩거리셨거든요.

근데 제가 엄마를 말리면 그랬지 바빠서 그래 괜찮아. 환자가 되어 보니까요. 의사들이 하는 말이 새롭게 느껴졌어요.

차갑게 말을 끊고, 방법이 없다고 말할 땐 상처를 받았고요.

반대로 아유 잘했어요. 하는 사소한 칭찬이 얼마나 힘이 되던지요.

또 솔직하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는 분을 만나면 그렇게 믿음이 갈 수가 없었어요.

그 경험 때문에 저는 요새도 종종 친구 의사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안 좋은 결과를 알려줄 때, 따뜻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고요.

환자한테는 의사의 말 한마디가 절망도 또 희망도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게 제가 의사이자 환자가 된 이유인가 봐요.

 


 

한쪽 눈만 남았지만 제가 더 보게 되는 세상이 또 있는데요 바로 장애의 세상입니다.

사실 주변에서는 제가 장애 등록하는 걸 반대했어요.

직업도 괜찮지 나이도 젊지 한쪽 눈 정도는 숨기고 살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장애인이 되려고 하냐고요.

하지만 장애도 제 정체성의 일부로 용기를 냈습니다.

 

대학병원 여의사, 장애인이 되었다
대학병원 여의사, 장애인이 되었다

 

사실 좁아진 시야부터 해서 눈부심이나 피로감까지 저한테는 일상의 모든 것이 한계이자 또 도전이었거든요.

네 하지만 공식적으로 장애를 등록한 후에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려주는 곳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저에게 주어진 정보가 너무 없다 보니까 헤쳐 나오기가 너무 힘든 거예요.

부모님도 눈이 다 보이시니 모르시잖아요.

그런데 그때 사실은 우리 남편이 한쪽 눈이 안 보인다.

혹은 나는 어릴 때 한쪽 눈을 실명했다는 분들이 저를 찾아주시고, 또 경험을 공유해 주시고 연결돼 주셨어요.

그 감사한 분들 덕분에 저는 차차 희망을 갖고 나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도 스스로를 밖에 드러내기로 결심했어요.

실명을 하고 겪은 일들 그리고 그럼에도 일상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담아 책도 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용기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고 또 서로 치유되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장애를 자꾸 숨기거나 숨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것이 안타까워요.

제 이야기를 통해 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자신의 삶이나 경험을 더 많이 기록하고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죽을 뻔했던 큰 사고를 겪어보니까 일상의 소중함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된 거예요.

아무 일 없는 평범한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한 거 있죠 하루는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엄마 근데 나 이상하게 지금 너무 행복하다. 그랬더니 엄마도 그렇대요.

그동안 제가 너무 치열하고 또 바쁘게만 사느라 놓친 것들이 참 많더라고요.

가족들과 함께 먹는 따뜻한 아침밥, 강아지와 함께 하는 오후 산책 그리고 자기 전에 편안한 침대에 누워 읽는 책 이런 것들이요.

어쩌면 사고로 제 인생이 멈춘 게 아니라 끝날 뻔했던 인생의 기회와 시간을 새롭게 얻은 거더라고요.

 

한쪽 눈이 남았으니까 큰 문제없는 것 아니야?라고 생각하실 수 있어요.

그런데 한쪽 눈으로 보다 보니까 계속 좁은 시야 때문에 몸을 부딪히게 되고요. 물을 엎지르기도 하고요.

때로는 불빛이 너무 세거나 또 어둡게 느껴지기도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잘 걷지도 못하는 저를 부모님께서 오롯이 뒷바라지를 해 주셨거든요.

그런데 가족에게 짐이 된다는 그 생각에 스스로가 얼마나 실망스럽고 싫었는지 몰라요.

한창 힘들었던 순간에는 엄마 아빠는 눈이 두 개라 나 몰라 이렇게 가슴에 대못을 받기도 했어요.

근데 그날 부모님이 우시는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아차 싶었고, 그 이후로 악착같이 회복했습니다.

 

덕분에 6개월 만에 의사로 다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인생이 예측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어요.

그래서 , so what,  그러려니 하는 멧집이 생겼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그러셨어요.

예전에는 내 딸이 꽃길만 걷길 바랐고 그래서 매 순간이 불안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돌부리에 걸려도 돌뿌리에 걸려 넘어져도 잘 일어날 아이라는 걸 알아서 마음이 편안해졌다고요.

 

그리고 때로는 한쪽 눈을 감아야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어요.

최근에는 장애 비장애 청년들이 함께 해외 연수를 떠나는 장애 청년 드림팀 프로젝트로 스페인에 다녀왔는데요.

이 사진은 스페인의 한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제 양쪽 홍채 사진이거든요.

 

 

제 왼쪽 닫힌 눈이 지구 같아 보이지 않나요?

저는 그야말로 시력을 잃은 쪽 눈에 지구를 담아 세상을 본답니다.

 

잃어버린 왼쪽 눈에 세상을 담아서 봅니다
잃어버린 왼쪽 눈에 세상을 담아서 봅니다

 

얼마 전엔 KBS 인간극장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요.

 

 

장애 청년 드림팀에서는 최우수상을 탔어요. 그리고 현재 일하는 수원의 성빈센트 병원에서는 중도 시각장애인 환자들을 위한 재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제가 만약에 한쪽 시력을 안 잃었다면 저는 여전히 환자도 장애도 세상도 잘 모르는 많이 부족한 의사이자 사람으로 살아갔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이 사진은요.

제 동생이 제가 퇴원해 집에 온 날 선물해 준 액자거든요.

사랑하는 나의 언니 비록 한쪽 눈으로 보는 세상은 좁아도 언니의 세상은 그 누구보다 빛나고 넓을 거야

라고 했던 동생의 말처럼 저는 이렇게 한쪽 눈을 감은 밍크 의사가 되어 더 넓고 더 빛나는 세상을 보게 됐어요.

어둡고 나갈 수 없는 동굴인 줄만 알았지만 함께 걷다 보니 터널이었습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용기 내서 나아가다 보니 모두 기적인 순간들이었어요.

 

저는 오늘도 한쪽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넓고 더 깊게 볼 줄 아는 윙크 의사가 되었어요.

 

여러분 아무리 힘든 고난을 만난다고 해도 끝이 아니더라고요.

여전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 무언가를 할 때 또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지금 동굴 속에 계신 여러분 우리 함께 더 환한 세상으로 나아가 볼까요?

 

네 여러분을 만나니까 저도 정말 에너지와 용기를 많이 받는 것 같고요.

지금까지 외로워도 슬퍼도 눈물보다 윙크를 윙크 의사 서연주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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