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에서 6개월 동안 걷기만 한 사람들의 전신 MRI를 찍어봤더니, 전신 근육량이 평균 300g 줄었습니다." 매일 1만 보를 채우며 뿌듯해하던 분들에게 살짝 미안한 한 줄로 강연이 시작합니다. 서울대 의대 재활의학교실 교수이자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길 위의 뇌〉 저자, 그리고 20년 차 러너인 정세희가 세바시 1974회에서 풀어낸 17분짜리 이야기입니다. 본캐 — 뇌졸중·파킨슨·치매 환자를 보는 의사. 부캐 — 작가, 그리고 러너. 같은 뇌출혈에 걸리고 한 사람은 교사가 되고 다른 사람은 누워서 가족 수발을 받게 된 이유, 뇌의 NVU(신경혈관 동맹체), 그리고 25년 의사 생활에 병가가 단 하루도 없었던 본인의 비결까지.
📌 한 줄 요약
걷기만으로는 부족하다 — 숨이 차고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의 유산소 운동이 뇌의 NVU를 살리고, 위기에 닥쳤을 때 다시 일어설 '운동 저축'이 된다.
⭐ 추천 점수
★★★★★ 5/5 — 17분 동안 '걷기만 해도 건강해지겠지'라는 오해를 정확한 데이터로 깨면서도, 결국엔 '봄에 한 번 달려보자'는 다정한 권유로 끝나는 강연. 운동을 망설이는 모든 사람, 그리고 부모님의 뇌 건강이 걱정되는 자녀 세대에게 닿는 강연.
👥 이런 분께 추천해요
① 매일 1만 보 채우며 뿌듯해하지만 정작 근육은 빠지고 있는 분
② 부모님 뇌 건강이 걱정되는데 무엇을 권해야 할지 모르겠는 분
③ "달리기는 내가 할 운동이 아니야"라며 미리 단정해온 분
📑 목차
1. 같은 병, 두 사람의 완전히 다른 경로
2. 뇌 가소성 — 뇌는 공짜로 바뀌지 않는다
3. 무게 2% · 에너지 20% — 뇌의 비밀
4. NVU — 뇌는 신경 덩어리이자 혈관 덩어리
5. 유산소 운동의 진짜 효과 — Morale 연구
6. 1만 보의 함정 — 걷기만 한 사람의 근육 300g
7. 운동 저축 — 병원 화재 그 밤, 혼자 계단을 내려간 할머니

본캐 의사, 부캐 러너 — 정세희가 권하는 운동 저축 17분
1. 같은 병, 두 사람의 완전히 다른 경로

강연의 첫 장면은 두 명의 젊은 뇌출혈 환자입니다. 첫 번째 환자는 고혈압 진단을 받고도 약을 안 먹고 담배·술을 이어가다 뇌출혈로 쓰러진 사람. 처음엔 회복이 빨라 지팡이 없이 걸을 정도가 됐지만, 퇴원 후 "아프다"는 이유로 하루 종일 앉아 TV만 봤습니다. 그렇게 5년 뒤 — 다시 뇌출혈로 실려옵니다. 이번엔 술에 취해 의자에서 넘어져 두개골이 골절된 상태.
두 번째 환자는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청년. 뇌교(腦橋)에 출혈이 와서 복시 때문에 글씨를 못 읽고 연필조차 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치료실이 닫는 밤에도 병실 복도에서 지팡이를 짚고 몇 시간씩 걷는 연습을 했습니다. 신경학적 회복이 멈춘다는 6개월·1년·2년이 지나도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 발병 2년 후 임용고시에 합격해 지금까지 교사로 근무합니다.
"발병 당시의 사진만 보면 두 사람은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인생 경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같은 병에 걸리고도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이유 — 그 차이가 강연의 진짜 주제입니다.
2. 뇌 가소성 — 뇌는 공짜로 바뀌지 않는다
왜 노력해야 할까요? 정세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뇌는 공짜로, 아니면 뭐 좋은 거 먹는다고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뇌의 가변성을 가리켜 의학에서는 '뇌 가소성(neuroplasticity)'이라고 부르는데, 이 가소성은 '쓰는 만큼 변한다'는 뜻이지 '저절로 좋아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뇌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 — 말하고 듣고 감정을 느끼고 자고 먹고 움직이는 모든 일을 거치는 기관입니다. "무릎은 인공관절로 바꿔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만, 뇌가 바뀌면 완전히 딴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뇌의 병은 단순한 기능 저하가 아니라 인격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정세희는 재활의학과가 환자의 개인사를 꼬치꼬치 캐묻는다고 설명합니다. 재활의학의 목표가 '아프기 전 삶으로 최대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죠. 병에 걸렸을 때 그 병을 이겨낼지, 병에 무너질지는 — 아프기 전 삶이 결정합니다.
3. 무게 2% · 에너지 20% — 뇌의 비밀

뇌의 무게는 약 1.5kg. 2리터 생수병보다 가볍고, 체중의 2%도 안 됩니다. 그런데 — 우리 몸 전체의 에너지 21%를 씁니다. 무게로는 50분의 1도 안 되는데 에너지는 5분의 1을 넘게 쓰는 거죠. "왜 머리 쓰면 배 고프고 피곤하잖아요. 그게 다 이유가 있습니다."
병원에는 정전을 대비한 비상 발전기가 있죠. 인공호흡기를 쓰는 환자에게 전기가 끊기면 안 되니까요. 뇌도 마찬가지인데, 잠시라도 에너지가 끊기면 뇌세포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뇌에도 '비상 발전기'를 둘 수 있을까? 불가능합니다. 뇌는 단단한 두개골 안에 빈틈 없이 들어차 있어 뭐라도 더 채우는 순간 뇌압이 올라 생명이 위험해지거든요.
그래서 뇌는 — 실시간으로 산소와 에너지를 받아야 하는 기관입니다. 바로 피를 통해서요.
4. NVU — 뇌는 신경 덩어리이자 혈관 덩어리
그래서 뇌는 신경 덩어리이자 동시에 혈관 덩어리입니다. 에너지가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많은 피를 받기 위해서, 신경세포와 혈관은 긴밀한 동맹체를 이루는데 — 이 동맹체를 NVU(Neuro-Vascular Unit, 신경혈관 동맹체)라고 부릅니다.
NVU가 건강해야 산소와 에너지가 잘 공급되고, 뇌세포가 살아 있고, 노폐물도 제거됩니다. 뇌에 노폐물이 쌓이면 — 치매와 파킨슨병이 옵니다. 실제로 정세희가 본 환자 데이터에 따르면, NVU가 부실한 사람은 파킨슨병·치매·뇌졸중에 잘 걸립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 불면증·우울증 환자의 뇌도 NVU가 부실했다고 합니다.
5. 유산소 운동의 진짜 효과 — Morale 연구

그렇다면 NVU를 어떻게 건강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좋은 음식? 영양제? 아닙니다. 정답은 — 유산소 운동입니다.
유산소 운동은 흔히 심장과 폐를 단련하는 운동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게 끝이 아닙니다. 심장·폐·혈관·근육·자율신경계·면역·에너지 대사 시스템까지 모두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유산소 운동입니다. 최근의 대규모 연구인 Morale에서는 운동, 특히 유산소 운동이 우리 몸의 모든 조직을 변화시킨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조직까지 다 바뀌고, 그 덕을 가장 많이 보는 장기 중 하나가 뇌였습니다.
운동을 하면 뇌세포가 건강해지고, 새로운 뇌세포가 더 많이 생기고, 세포 간 연결망이 촘촘해지고, 미세혈관이 늘어나고, 에너지 대사가 좋아집니다. 한 마디로 — NVU 동맹체가 더 튼튼해지는 것이죠.
6. 1만 보의 함정 — 걷기만 한 사람의 근육 300g
그런데 "걷기만 해도 건강해지겠지"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스마트워치로 매일 1만 보를 채우면 뿌듯해하면서요. 정세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걷기는 대표적인 저강도 운동입니다."
한 연구에서 3~6개월 동안 걷기만 한 사람들의 전신 MRI를 찍었더니 — 전신 근육량이 평균 300g 줄었습니다. 특히 건강에 중요한 코어·허벅지·엉덩이 근육은 걸을 때 거의 쓰이지 않거든요. 그래서 정세희는 익숙한 농담을 던집니다 — "여러분, '믿는 도끼'가 아니라 '믿는 걷기'에 발등 찍히셨죠?"
NVU가 좋아지려면 심폐체력이 좋아져야 하고, 심폐체력은 — 숨이 차고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의 강도여야 길러집니다. 그게 곧 유산소 운동의 의미입니다.
7. 운동 저축 — 병원 화재 그 밤, 혼자 계단을 내려간 할머니

정세희 본인 이야기로 강연이 좁혀집니다. 2003년 달리기를 시작해 2005년 풀코스 첫 출전, 그렇게 20년이 넘었습니다. "머리로는 뇌를 생각하고 몸으로는 달리는 사람"으로 20년을 살았다고요. 그리고 그 결과 — 25년 의사 생활 동안 병가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코로나에도 걸리지 않았고요.
달리기의 진짜 힘은 기대도 안 한 곳에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예민하고 꼼꼼하고 칭찬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어 늘 "나는 부족하구나"라는 생각으로 살던 사람이, 달리면서 자존감이 자랐다고요. "달리기로 단단해진 두 다리로 힘 있게 딱 서면 — 든든한 뭔가가 느껴졌어요."

그리고 강연의 가장 깊은 한 장면. 15년 전 정세희가 근무하던 병원에 큰 화재가 났습니다. 용접 작업 불똥이 튀어 병동까지 검은 연기가 들이쳤고, 모든 환자를 대피시켜야 했습니다. 거동이 어려운 재활의학과 환자들은 부축하거나 들것에 태워 계단으로 날랐죠. 그런데 그때 정세희가 목격한 믿기 힘든 장면 하나.
"할머니 환자 한 분이 혼자서 계단을 막 내려가시는 거예요. 그분은 사실 전날까지만 해도 재활 치료실에서 혼자 서지도 못하던 분이었습니다." — 정세희
위기에 닥쳤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 건강 검진 며칠 전의 벼락치기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건강할 때부터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차곡차곡 쌓아둔 체력·정신력·삶의 태도가 그제야 꺼내 쓸 수 있는 '저축'이 됩니다. 정세희는 그것을 '운동 저축'이라 부릅니다.

강연의 마지막은 한 줄로 단정합니다. "사람은 달려서 지구상에서 살아남았고, 우리 인체는 달리기에 더없이 좋게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 — 알고 계셨나요? 그러니 잠재력을 믿어보세요. 이 햇살과 산들바람만으로도 행복한 봄입니다. 다들 — 나오세요. 이 봄의 길 위로요.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숨차게 달리고 있는 나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 내가 밑줄 친 세 문장
"무릎은 인공관절로 바꿔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만, 뇌가 바뀌면 완전히 딴 사람이 됩니다." — 정세희
"병에 걸렸을 때 그 병을 이겨낼지, 병에 무너질지는 — 아프기 전 삶이 결정합니다." — 정세희
"전날까지만 해도 혼자 서지 못하던 할머니가, 화재가 나자 혼자 계단을 내려가셨습니다." — 정세희 (운동 저축의 진짜 의미)
📝 블로거 한 줄 후기
청각이라는 감각 하나가 사라지거나 약해지면, 사람의 인지 구조가 통째로 다시 짜인다는 걸요. 그래서 '뇌의 NVU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게 곧 뇌 건강의 기본'이라는 정세희의 한 줄이 — 단순히 운동 권유를 넘어, 감각 하나에 인생이 어떻게 매달려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했어요. 그리고 가장 깊게 박힌 건 화재 그 밤, 전날까지 혼자 서지 못하던 할머니가 계단을 내려간 장면.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오늘 한 가지만 — 지금 당장의 효용이 아니라 '언젠가의 위기'를 위한 저축으로 시작해보시기를. 그게 5분 달리기든, 일주일에 두 번 운동이든, 하루 한 줄 글쓰기든요. 우리는 모두 어느 날의 그 할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 오늘, 단 한 가지만 해본다면
오늘 평소보다 100m만 더 빠르게 걷거나, 1분만 가볍게 뛰어보세요. 숨이 조금 차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그 1분이 — 정세희가 말한 NVU 동맹체를 깨우는 시작입니다. 운동 저축은 적금처럼, 매일 한 줄씩 쌓입니다.
📚 더 보면 좋을 자료
정세희 교수의 책 〈길 위의 뇌〉는 이 강연의 풀버전입니다 — 재활의학과 의사이자 20년 차 러너인 한 사람의 진료실 일기와 마라톤 기록이 함께 엮여 있습니다. 강연 중 언급된 Morale 연구는 유산소 운동이 우리 몸 전 조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주는 대규모 코호트입니다. 매일 1만 보가 정말 충분한지 다시 점검하고 싶다면 '걷기 vs 달리기의 근육량·심폐체력 차이'를 검색해 보시면 좋고요. 강연이 속한 월간 세바시 4월 강연회 '봄빛질주 — 봄처럼 빛나는 인생을 달리다' 시리즈(1966 황가람·1967 김지호·1968 류재언과 같은 시리즈)와 함께 보면 봄과 운동의 결이 더 단단해집니다.
오늘 한 발만 더 — 그 한 발이 어느 날의 계단이 됩니다. 봄입니다. 다들, 길 위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