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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살린 건 한국에만 있던 '이것'"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일 때 길이 열린다 — 영국과 한국, 두 문화로 살아온 피터 빈트 이야기 | 세바시 2046회

2025. 12. 1. | 세바시 2046회 | 피터 빈트 (영국 출신 방송인, '지극히 사적인 영국' 저자)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일 때 길이 열린다 | 세바시 2046회

 

 

한국인 어머니와 영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방송인 피터 빈트 님.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미국 놈'이라 불리며 처음 문화의 벽을 느낀 그는, 평생 영국과 한국 두 세계 사이에서 살아왔습니다. 하나를 고르라는 세상에 그는 '둘 다'를 택했고, 두 문화를 동시에 품은 그 힘은 면접관의 표정을 바꾸고 끝내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까지 지켜냈습니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일 때 길이 열린다'는, 다름이 곧 축복이 된 이야기를 옮깁니다.

 

📖 이 강연의 순서
1. "미국 놈이다?" — 놀이터에서 처음 만난 '다름'
2.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
3. 흔들리지 않은 어머니, 그리고 한국의 정
4. 두 문화가 열어준 길
5. 아버지를 살린, 한국에만 있던 '이것'
6. 둘 다일 때, 길이 열린다

 

 

피터 빈트 ·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 일 때 길이 열린다 (세바시 ‘서울 자랑회’)
피터 빈트 ·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 일 때 길이 열린다 (세바시 ‘서울 자랑회’)

 

 

"미국 놈이다?" — 놀이터에서 처음 만난 '다름'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온 피터입니다.

아직도 제 어머니가 한국 사람인 걸 모르는 분이 계세요.

제가 그렇게 안 생겼으니까요.

 

한국인 어머니와 영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피터 빈트
한국인 어머니와 영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피터 빈트

 

저는 어릴 때 여름방학이면 영국에서 한국으로 자주 왔어요.

1~2년에 한 번씩 왔는데, 그 몇 주를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꿈 같았습니다.

한국에서 제가 제일 좋아한 건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야쿠르트.

그 작은 병에 든 달콤한 음료를, 노란 유니폼을 입은 아주머니가 집까지 가져다주시는 게 어린 저에겐 마법 같았죠.

다른 하나는 아파트 놀이터였습니다.

바닥이 다 모래였고 미끄럼틀도 돌로 된 게 많았는데, 저한테는 그 모든 게 너무 재밌었어요.

그런데 그 놀이터에서 잊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말이 서툴러서였는지, 어떤 아이들이 저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쳤어요.

"우와, 미국 놈이다!"

저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반박했어요.

"아니야, 나는 영국 놈이야!"

그 말을 하고 나서 이상하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다섯, 여섯 살밖에 안 된 꼬마가 벌써 '나라의 서열' 같은 걸 마음에 품고 있었던 거죠.

얼굴이 조금 다르고 말투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너는 우리랑 좀 달라"라고 구분 짓는 것 — 그게 제가 처음 마주한 문화의 벽이었습니다.

그 놀이터에서의 짧은 순간이, 지금 돌아보면 제 인생의 방향을 정해준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

 

그날 이후 저는 늘 두 세계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영국과 한국, 두 언어, 두 문화, 두 마음 사이에서요.

영국에 가면 완전한 영국인도 아니고, 한국에 오면 "넌 외국인이야"라는 말을 들었어요.

나쁜 뜻은 아니었지만,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죠.

그런데 제 생각은 조금 달랐어요.

왜 꼭 하나만 골라야 할까?

두 나라를 모두 알고 두 문화를 모두 느끼는 건 사실 엄청난 축복이 아닐까?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일 때 길이 훨씬 더 열린다."

이건 단순히 제 정체성 이야기만은 아니에요.

빠르게 변하는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흔들리지 않은 어머니, 그리고 한국의 정

 

어릴 때 저는 한국인 어머니와 보낸 시간이 정말 많았어요.

아버지는 군인이셔서 자주 해외로 파병을 나가셨거든요.

그래서 런던에서 하루 종일 엄마의 한국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엄마는 제게 옛날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려주셨어요.

콩쥐팥쥐, 청개구리, 흥부와 놀부까지요.

지금 돌아보면 그 옛날이야기가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제 안에 한국의 감정을 심어준 것 같아요.

이야기 속의 따뜻함, 슬픔, 그리고 한국의 '정' 말이에요.

엄마는 당신이 자란 가족 이야기도 들려주셨어요.

7남매 중 막내였던 이야기, 평택 집 이야기까지.

한국이라는 나라를 책이 아니라 이야기로, 감정으로 가르쳐 주신 거죠.

 

주변의 만류에도 어머니는 '한국어' 교육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주변의 만류에도 어머니는 '한국어' 교육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 시절 80년대에는 "아이에게 두 언어를 가르치면 어릴 때 헷갈린다"는 말이 많았어요.

주변 한국 친구들도 엄마에게 "피터가 한국말 하면 학교에서 왕따 될 수도 있다, 그냥 영어만 하게 하라"고 많이 말했죠.

그런데 엄마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제 또래 혼혈 친구가 네다섯 명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에 자주 온 건 저뿐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지금 한국에 정착한 친구도 저뿐입니다.

이제 나이 든 그 친구들의 어머니들이 제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대요.

"언니, 그때 참 잘했어."

엄마, 지금 보고 있죠?

고마워요.

그때는 외롭고 힘들었지만 지금은 정말 보람이 있다고, 엄마는 말합니다.

 

두 문화가 열어준 길

 

 

어린 시절, 한국은 제게 '제2의 고향'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한국은 제게 '제2의 고향'이었습니다

 

한국은 제게 단순히 '엄마의 나라'가 아니라 제2의 고향이었어요.

저는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1500년대에 인가한, 아주 오래된 중·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입학 면접을 부모님과 함께 봤는데, 선생님 표정이 그리 좋지 않다가 이런 질문이 나왔어요.

"혹시 다른 언어도 하니?"

제가 "네, 한국말을 합니다"라고 하자 그때부터 표정이 바뀌었고, 결국 합격했습니다.

그 학교엔 한국 학생이 한 명도 없었거든요.

그때 처음 느꼈어요.

'아, 이 두 가지 언어와 문화를 안다는 게 영국에도 도움이 될 수 있구나.'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한국 무역회사에 취직했어요.

한국과 영국의 언어도 문화도 모두 이해하는 사람이 필요했기에 제게 기회가 온 거죠.

영국 회사와 회의할 땐 영국식 유머로 분위기를 풀고, 한국 거래처엔 믹스 커피를 맛깔나게 타며 다리를 놓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게 참 뿌듯했어요.

그리고 그 회사에서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을 만났습니다.

한 어학연수 학생을 소개받았는데, 그 친구가 바로 지금의 제 아내예요.

소개해 준 분이 "무조건 영어로만 말하라"고 엄하게 시켜서, 착한 우리 둘은 6개월 동안 영어만 썼어요.

그러다 어느 날 한국 식당에서 그 마법의 초록색 병, 소주를 조금 마시니 제 입에서 무심코 한국말이 툭 튀어나왔습니다.

"어, 이거 맛있다!" 그 순간이 진짜 사랑의 시작이었어요.

이제 우리 집은 반은 영국, 반은 한국입니다.

아이들 이름도 영국 성에 한국식 이름이 섞여 있죠.

두 문화가 만나면, 정말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제가 한국에서 방송을 시작하게 된 것도 결국 이 두 문화 덕분이었어요.

 

아버지를 살린, 한국에만 있던 '이것'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를 준 일은 2013년, 아버지가 한국에 오셨을 때입니다.

그때 첫째 돌이었는데, 아버지가 살이 많이 빠지고 기운이 없어 보이셨어요.

감기인 줄 알고 그냥 두었죠.

그런데 영국으로 돌아갈 때가 다 됐는데도 낫질 않는 거예요.

"아버지, 병원에 한번 가보세요."

아버지는 "영국에서 이미 몇 달에 걸쳐 검사 다 했는데 문제없다더라"며 괜찮다고 하셨어요.

만약 제가 한국과 영국의 의료를 둘 다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그냥 그런가 보다 했을 겁니다.

하지만 두 나라의 의료 시스템을 다 겪어본 사람으로서, "그래도 꼼꼼한 검사 한 번 받고 가시자"고 부탁드렸어요.

 

2013년, 한국에 오신 아버지 — "혈액암 말기였어요"
2013년, 한국에 오신 아버지 — "혈액암 말기였어요"

 

함께 병원에 갔고, 하루 만에 결과가 나왔습니다.

혈액암 말기였어요.

의사 선생님의 설명이 끝나는 순간, 세상이 참 조용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부터 한국에서 치료를 받기로 했어요.

며칠 뒤 항암 치료를 시작했고, 7개월간 거의 매주 병원에 모셨습니다.

빠른 진단과 빠른 치료, 최첨단 기술 속에서 지내시는 걸 보며 정말 감사했어요.

이후 조금 회복되어 영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이어가셨고, 여덟 달 뒤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만약 영국에서만 지냈다면 진단까지 훨씬 더 오래 걸렸을 테고, 아버지와 보낸 그 소중한 마지막 15개월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분들은 영국 의료 시스템을 비판하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느꼈습니다.

두 나라 모두 진심으로 환자를 돌보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각자 다른 방식의 한계와 아름다움이 있었어요.

영국은 시설이 오래되고 속도는 느리지만,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시간을 많이 들이고 손으로 직접 살피는 — 또 다른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어요.

문화의 차이는 서열을 매기는 게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배우는 것이라는 걸요.

 

둘 다일 때, 길이 열린다

 

오랫동안 저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살았습니다.

영국 사람일까, 한국 사람일까.

그 사이에서 길을 잃기도 했죠.

하지만 이제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문화를 동시에 품는 건 혼란이 아니라, 진짜 축복이었다고요.

영국의 차분함과 한국의 따뜻함, 영국의 유머와 한국의 정 — 그 서로 다른 세계가 부딪히는 순간마다 저는 조금 더 열린 마음을 배웠습니다.

누군가 지금도 제게 물어요.

"피터, 넌 영국 사람이야, 한국 사람이야?"

그러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답합니다.

"저는 둘 다의 사람이에요."

두 나라의 언어로 생각하고 두 나라의 감정으로 살아갑니다.

그 둘이 제 안에서 싸우지 않고 그냥 나란히 살아 있어요.

물론 앞뒤가 안 맞을 때도 많아요.

영국은 천천히 차분히, 한국은 빨리빨리.

그래도 괜찮습니다.

오늘 여러분께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혹시 여러분 안에도 두 세상이 싸우고 있다면, 억지로 하나로 만들지 마세요.

그냥 그대로 두세요.

앞뒤가 안 맞아도 괜찮습니다.

그 다름이 언젠가 여러분을 더 큰 세상으로 이끌어 줄 거예요.

지금까지 피터 빈트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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