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31. | 세바시 2062회 | 김현철 (경제학자)
소득 격차는 커지고 정치와 문화의 분열은 깊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진지하게 토론하지 않고, 자신이 믿고 싶은 이야기만 듣습니다. 경제학자 김현철은 이 확증 편향의 시대를 반전시킬 세 가지 열쇠로 만남, 근거, 배려를 제시합니다. 국회 좌석 배치부터 증거 기반 정책 실험까지, 데이터로 증명된 통합의 길을 함께 살펴봅니다.
📖 이 강연의 순서
1. 서로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시대, 우리는 에코 챔버 안에 있다
2. 섞어 놓으면 달라진다, 만남이 편견을 줄인다
3. 좋은 의도만으로는 부족하다, 근거가 정책을 살린다
4. 정책도 실험으로 증명한다, 증거 기반 정책의 시대
5. 증거는 무기가 아니라 다리, 배려가 완성한다

🔊 서로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시대, 우리는 에코 챔버 안에 있다

우리는 지금 서로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소득 격차는 커지고 정치와 문화의 분열은 깊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진지하게 토론하지 않고 서로 싸우기만 하며, 대신 자신이 믿고 싶은 이야기만 듣습니다.
특정 정당이나 이익단체에 유리한 방송만 보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만 만나면서 하루를 채우다 보면 듣는 말은 좁아지고 보는 세상도 좁아집니다.
이것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민주 국가가 함께 앓고 있는 병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문보다 알고리즘이 짠 피드를 먼저 봅니다.
SNS의 추천 시스템은 이용자의 과거 행동을 학습해 비슷한 선호의 정보만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그 결과 사람들은 다른 관점을 접하기보다 자신의 신념을 강화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정보의 울타리, 이른바 에코 챔버입니다.

최근 연구들은 디지털 환경이 이 확증 편향을 강화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1억여 건이 넘는 게시물을 분석해 백신, 정치, 낙태 같은 민감한 주제에 대한 이용자 성향을 측정했습니다.
가로축은 개인의 성향, 세로축은 SNS 친구들의 평균 성향인데, 이 두 값이 거의 완벽하게 일치했습니다.
자신의 유튜브 피드와 페이스북 친구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다양한 관점이 공존합니까, 아니면 특정 성향의 채널과 친구가 대부분입니까?
후자라면 당신은 이미 에코 챔버 속에서 세상을 보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 섞어 놓으면 달라진다, 만남이 편견을 줄인다

확증 편향을 넘어서는 첫걸음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국회의사당은 민주주의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분열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정당별로 떨어져 앉는 좌석 배치는 물리적 거리와 함께 심리적 거리까지 만듭니다.
그런데 사람을 좀 섞어 놓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유럽의회는 정당별 구역은 유지하되 그 안의 좌석은 알파벳 순서로 배정합니다.
덕분에 어떤 의원은 자연스럽게 다른 당 의원과 나란히 앉게 되는데, 연구자들은 이 규칙 덕분에 옆자리 효과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는 흥미로웠습니다.
다른 당과 옆자리에 앉은 의원들은 서로 다른 표를 던질 확률이 약 7퍼센트 감소했고, 특히 여성 의원들끼리 앉은 경우에는 그 수치가 무려 17에서 40퍼센트까지 커졌습니다.
아일랜드 국회는 아예 제비뽑기로 좌석을 무작위 배정합니다.
회기가 열릴 때마다 추첨함에서 공을 뽑아 자리를 정하는 방식이지요.
1991년부터 2017년까지 모든 표결을 분석했더니, 주변 의원들이 모두 다른 정당이면 이탈표를 던질 확률이 30퍼센트포인트나 증가했고, 이 상황이 한 달 지속될 때마다 3퍼센트씩 더 높아졌습니다.
우리 국회도 매 회기마다 추첨으로 좌석을 정하거나, 초등학교 마니또처럼 무작위로 짝을 지어 서로 알아가는 제도를 생각해 볼 만합니다.
만남의 힘은 교육 현장에서도 증명됩니다.
미국의 한 대학은 신입생을 무작위로 룸메이트로 배정한 뒤 1년을 추적했더니 학생들의 성향이 점차 비슷해졌고, 그 변화는 교수의 강의가 아니라 일상의 대화와 접촉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레바논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에서는 이슬람계 고등학교 출신 학생이 비이슬람 학생과 함께 공부할수록 성적이 높아졌고 타 종교 교수의 수업 선택도 늘었습니다.
다름을 마주 보는 일은 불편하지만, 바로 그 불편한 만남이 사회 통합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 좋은 의도만으로는 부족하다, 근거가 정책을 살린다


그러나 만남만으로 사회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근거 기반의 토론이 더해져야 합니다.
좋은 의도만으로는 모든 정책이 성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965년 미국은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조기 교육과 건강, 영양을 제공하는 헤드 스타트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효과가 불분명하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국가가 직접 실험 평가를 했더니 유치원 초기에 향상된 인지 능력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사라졌고, 많은 사람이 실패한 정책이라며 폐지를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이 후속 연구를 이어가자 전혀 다른 그림이 나타났습니다.
가정 방문과 부모 지원 같은 통합 서비스가 함께 제공되면 효과가 오래 지속됐고, 단기 학업 능력 대신 사회성, 감정 조절, 자기 통제력 같은 비인지 능력이 향상되어 범죄율은 낮아지고 대학 진학률은 높아졌습니다.
가난한 아이를 돕자는 선한 의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정책을 체계적으로 평가하는 일이며, 그것이 프로그램이 오래 지속되는 비결이었습니다.
대한민국에도 근거가 적용된 사례가 있습니다.
2025년 민생 회복 소비쿠폰을 두고 논쟁이 있었지만, 코로나19 시절 재난지원금 연구는 저소득층 지원이 더 큰 소비 성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모두에게 25만 원을 주려던 안은, 기초생활수급자 50만 원, 차상위계층 40만 원, 일반 국민 25만 원, 상위 10퍼센트 15만 원으로 차등 지급하도록 조정됐습니다.
근거가 정책을 움직인 순간이었습니다.
🔬 정책도 실험으로 증명한다, 증거 기반 정책의 시대

이를 경제학에서는 증거 기반 정책이라고 부릅니다.
정책의 설계와 집행 전후에 인과적 효과를 검증하고, 그 결과에 따라 프로그램을 확대하거나 조정하고 때로는 종료하는 것입니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연방 정부 안에 근거 팀을 만들어 각 부처의 평가와 데이터 활용을 체계화하고, 모든 연방기관이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 정책을 세우도록 명문화했습니다.
영국은 더욱 인상적입니다.
2013년 출범한 총리실 산하의 왓 웍스 네트워크는 내각의 평가 태스크포스가 총괄하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물론 민간 기관과 대학이 함께 어떤 정책이 가장 효과적인지 검증합니다.
보건, 교육, 범죄, 노동, 청년 등 9개 분야에서 정책 효과를 평가하고 근거에 기반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책 평가의 황금 기준은 실험입니다.
의료 현장에서 의사들은 수십만 건의 무작위 대조 실험으로 어떤 치료가 최상인지 데이터로 입증해 왔습니다.
코로나19 백신도 무작위로 뽑은 절반에게는 백신을, 나머지 절반에게는 투여하지 않아 대조군과 치료군을 비교해 효과를 증명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책도 말이나 신념이 아니라 실험과 검증으로 입증되어야 합니다.
서울시는 2023년 국내 최초로 음의 소득세 모델을 적용한 디딤돌 소득 실험을 시작해, 참여 가구와 대조군을 무작위 배정하고 소비와 고용, 삶의 만족도를 추적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무작위 대조 실험으로 정책의 과학화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 증거는 무기가 아니라 다리, 배려가 완성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토론은 아무리 잘해도 상대가 설득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은 옳았는데 관계는 멀어지고, 논리로는 이겼는데 마음은 닿지 않은 경험을 많은 분이 갖고 계실 것입니다.
많은 경우 문제는 내용이 아니라 언어이며, 배려 없는 표현과 말투가 상대를 방어적으로 만듭니다.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대를 반박하거나 이기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틀렸다가 아니라 다를 수 있다는 마음으로, 무엇보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열린 태도로 대화해야 합니다.
이런 조건이 갖춰질 때 비로소 증거는 갈등의 무기가 아니라 우리 사이를 다시 연결하는 다리가 됩니다.
확증 편향의 시대를 넘어 분열된 사회를 바꾸는 것은 만남과 근거, 그리고 배려에서 시작됩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섞일 용기, 내 신념을 근거의 시험대 위에 올려 볼 용기를 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변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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