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6. | 세바시 2065회 | 에바 (국제회의 통번역사)
러시아 국적이지만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국제회의 통번역사 에바. 두 나라의 언어와 정서를 오가며 그는 수많은 리더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봤습니다. 한국인의 뜨거운 '열심히'와 러시아인의 여유로운 '자기 돌봄', 그 사이에서 그가 발견한 진짜 리더십은 무엇일까요. 누군가를 이끌기 전에 나부터 살피는 일에서 시작되는 리더십 이야기를 전합니다.
📖 이 강연의 순서
1. 통역사가 두 나라 사이에서 발견한 것
2. 한국과 러시아, 두 정서 사이에서 자라다
3. '열심히'라는 말, 마음을 태우다
4. 러시아식 여유, 나를 돌보는 힘
5. 진짜 리더는 뜨거움과 여유를 함께 가진다
6. 리더십의 출발점은 나를 살피는 일

통역사가 두 나라 사이에서 발견한 것
안녕하세요.
저는 국적은 러시아지만, 초등학교 시절을 한국 경기도 의왕에서 보냈습니다.
지금은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쓰는 사람들이 서로 가까워지고 협력하기를 바라며, 두 언어와 정서를 통역하는 국제회의 통번역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통역사로 일하다 보면 기업의 CEO부터 정부 관료, 국제회의 연사까지 굉장히 많은 리더를 만나게 됩니다.
한번은 만찬 통역을 하던 자리에서 한 대표단 분이 저에게 직접 물으셨어요.
한국에서는 어떤 동화나 설화가 유명하냐고요.
통역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데다, 보통은 통역사에게 직접 묻지 않는 질문이라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저는 떠오르는 대로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전해 드렸습니다.
그분은 나중에 한국 측 관계자들과 다시 만났을 때 그 설화를 화제로 삼아, 자기 나라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며 대화를 이어가셨습니다.
사소한 문화와 전통에 대한 질문으로 정서적 연결고리를 찾아 대화를 이끌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은 제가 통역을 하며 두 나라를 오간 경험을 바탕으로, 진짜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 우리가 생각하고 실천해 보면 좋을 것들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한국과 러시아, 두 정서 사이에서 자라다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그때만 해도 한국에는 외국인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처럼 외국인같이 생긴 아이에게 동네 어르신들이 따뜻한 칭찬과 격려를 건네 주셨고, 덕분에 한국 정서에 빠르게 스며들 수 있었습니다.
서툰 한국어와 90도 인사를 배우며 예의와 겸손, 어른 공경 같은 한국적 가치를 익힌 저는 그야말로 한국형 어린이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 시절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면서 저는 큰 문화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국처럼 밝게 인사하고 무엇을 도와드릴지 묻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어요.
사람들은 늘 뚝뚝하고 차갑고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춘기에 이런 문화적 차이를 겪다 보니 말을 걸기도 힘들었고, 엄마가 심부름 하나만 시켜도 잔뜩 긴장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시간이 지나자 그 차가움이 오히려 저를 편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감정 소모가 적으니 에너지가 잘 비축됐거든요.
그때 깨달았어요.
러시아 사람들은 남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 마이웨이식으로 여유 있게 타협할 줄 아는 사람들이구나 하고요.
한번은 러시아에서 피자를 시켰습니다.
제가 살던 극동 지역은 겨울이면 영하 20~30도까지 떨어지는데, 그 눈보라 속을 자전거로 배달해 주신다는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한 시간 2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아 전화를 걸었더니, 고객님 것만 배달하는 게 아니니 좀 기다리라고 하시더군요.
결국 식은 피자를 다 같이 데워 먹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거치며 한국의 정서와 러시아의 문화가 제 가치관과 태도를 함께 빚어 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열심히'라는 말, 마음을 태우다
언어를 다루는 일을 하다 보니 한국인의 표현에 자연스레 관심이 갔는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 하나가 바로 열심히,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한번은 남편과 지방에 갈 일이 있어 제가 운전대를 잡았는데, 남편이 갈 길이 머니 부지런히 가야 한다고 하는 거예요.
차로 어떻게 부지런히 갈 수 있는지 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통역이 습관이 되면 어떤 말이든 머릿속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게 됩니다.
그래서 이 말을 러시아어로 옮겨 봤어요.
트루돌류비비(трудолюбивый)라는 단어가 되는데, 직역하면 노동(труд)에 사랑(любить)이 붙은 말, 곧 노동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열심히 해라' 같은 표현은 러시아어로 옮기면 어감이 도무지 살지 않아요.
러시아 사람에게 그렇게 말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이 잘 안 되고, 들은 사람도 그래 열심히 해보겠다고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열심히라는 말의 어원을 찾아봤습니다.
더울 열(熱) 자에 마음 심(心) 자를 결합한 말이더군요.
정말 마음을 다 태워서 찐으로 일한다는 뜻이었어요.
무엇이든 열심히, 부지런히 하는 그 열정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가지를 하려면 이 몸 하나, 이 마음 하나 다 태워서 하겠다는 마인드셋.
그것이 한국인의 '열심히'에 담긴 온도였습니다.
러시아식 여유, 나를 돌보는 힘
그럼 이 단어를 자주 쓰지 않는 러시아 사람들은 다 한량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서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 뿐이에요.
열심히에 해당하는 러시아어 동의어들의 어원을 찾아보니, 돌보다·키우다·발전시키다, 혹은 소원을 이루어 주다 같은 숨은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한국어의 마음을 태우다와 러시아어의 돌보다·키우다·소원을 이루어 주다는, 같은 뜻이라도 나오는 뉘앙스와 온도가 다릅니다.
기후가 혹독한 지역에서는 기준치 자체가 조금 낮은 게 아닐까 싶었어요.
오늘도 살아남았다, 영하 27도에 옷을 잔뜩 껴입고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 나를 잘 돌봤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정서가 자리 잡는 겁니다.
그러면서 셀프 칭찬도 잘하는 편이에요.
나 이 정도면 괜찮았다고 스스로를 보듬는 정서죠.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것이 오만이 아니라 자신을 인정하는 건강한 자존감을 만들어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스스로를 낯설게 여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가, 무너지지 않는 건강한 자존감을 만듭니다.
진짜 리더는 뜨거움과 여유를 함께 가진다
그렇다면 통역 현장에서 만난 리더들은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진짜 리더들은 한국식의 뜨거운 열정과 러시아식의 여유, 자기 돌봄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한 대표님은 매일 아침 누구보다 먼저 출근해 회의실 불을 켜고 자기 업무는 치열하게 하되, 팀원들에게는 회의가 끝나면 이만하면 됐으니 퇴근하라며 컨디션 조절을 먼저 챙기는 분이었습니다.
해외 파트너와 일할 때는 새벽 여섯 시에 나와 그 나라 신문 헤드라인을 번역기로 읽고 경제 지표와 현지 이슈를 꼼꼼히 챙기셨어요.
양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그 나라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열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에게 배운 건 조금 다른 지점이었습니다.
그토록 열심히 일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는 의외로 관대하셨거든요.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제가 모르니 도와달라고, 이건 무슨 뜻이냐고 먼저 자연스럽게 물으셨습니다.
리더라면 모르는 게 없어야 한다고 여겼던 제 고정관념이 그때 많이 깨졌습니다.
강해야 리더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노력하는 태도는 오히려 팀원들에게 안심을 주고 단단한 신뢰를 만들었습니다.
이 사람도 우리와 함께 키워 갈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을 불러온 거죠.
비타민을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몸 건강을 돌보던 사소한 모습까지, 한국인의 열심과 러시아인의 여유가 한 사람 안에서 조화롭게 균형을 이룰 수 있음을 저는 그분에게서 보았습니다.
리더십의 출발점은 나를 살피는 일
우리는 지금 문화와 사람이 자연스럽게 뒤섞이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협력하며 새로운 문화를 접해야 하죠.
그 모든 흐름을 살아내려면 무엇보다 스스로의 에너지와 힘이 필요합니다.
아무도 대신 채워 주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또 사전을 찾아봤습니다.
리더십의 순우리말은 지도력이더군요.
가리킬 지(指), 인도할 도(導), 힘 력(力).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가리킬 지 자에 곤두서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이끌려면 우선 나부터 두 다리를 굳게 짚고 힘 있게 곤두설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부지런히 해야 할 일은 나를 살펴보는 것이고, 나를 살피는 일이야말로 리더십의 출발점입니다.
저는 통번역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청년들에게서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너무 부족한 것 같아요, 저 망한 것 같아요 하는 말이죠.
그때마다 안타깝습니다.
이미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고 단지 경험치가 아직 덜 쌓였을 뿐인데, 미리 남과 비교하며 자신을 가차 없이 깎아내리고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스스로에게 괜찮다는 말을 조금 더 자주 해 주셨으면 합니다.
괜찮다는 괜히 하지 아니하다가 합쳐진 말이라고 해요.
아무 까닭이나 실속 없이 하지 않은 일에 우리는 괜찮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은 괜히 하는 일이 아니니, 조금 힘을 내 자신을 살펴보시고 괜찮은 사람으로서 괜찮은 삶을 살아가는 리더십을 발휘하시길 바랍니다.
'YouTube > 세바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오진승 정신과 전문의, 갓생 살다 대상포진 걸린 이유 | 세바시 2067회 (0) | 2026.07.07 |
|---|---|
| 나이키 첫 스트랭스 코치 김은서, 최선을 다하지 마세요 | 세바시 2066회 (0) | 2026.07.07 |
| 송길영 작가, AI가 3개월 만에 바꾼 세상과 경량 문명 | 세바시 2064회 (0) | 2026.07.06 |
| 배경제, 인류학 박사가 글로벌 CEO 된 경계인 커리어 비결 | 세바시 2063회 (0) | 2026.07.06 |
| 경제학자 김현철, 확증 편향의 시대를 반전시키는 법 | 세바시 2062회 (1) | 2026.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