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23. | 세바시 2075회 | 윤승림 (리전드 크리에이티브 헤드 디렉터·K팝 뮤직비디오 감독)
에스파 아마겟돈, 아이브 헤야, 올데이 프로젝트 페이머스를 만든 K팝 뮤직비디오 감독 윤승림. 화려한 커리어의 정점에서 그는 오히려 가장 어두운 터널을 걷고 있었습니다. 무력감과 분노, 회사의 와해라는 위기 앞에서 그가 붙잡은 것은 자신의 선택을 정답으로 만들겠다는 믿음, 그리고 AI라는 새로운 파트너였습니다. 기술에 끌려가지 않고 기술을 창의성의 언어로 바꿔 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 이 강연의 순서
1. 모든 작업에 이름을 남기는 감독, 리마윤
2. 2023년, 나를 소모시키는 구조 앞에서
3. 분노를 에너지로 바꾼 첫 번째 선택
4. 아마겟돈과 헤야, 두 배의 에너지를 쏟다
5. 회사가 무너진 자리에서 만난 AI
6. 신기술과 휴머니즘, 윤승림의 시즌 2

모든 작업에 이름을 남기는 감독, 리마윤
안녕하세요.
저는 리전드 크리에이티브의 헤드 디렉터이자 K팝 뮤직비디오 감독인 윤승림입니다.
여러분은 제 작업은 아셔도 저를 모르실 겁니다.
에스파 아마겟돈, 리치맨, 아이브 헤야, 올데이 프로젝트의 페이머스, 세븐틴, NCT, 트와이스, 여자아이들 등 많은 작품이 제가 만든 작업들입니다.
특히 아마겟돈과 헤야는 각각 국내에서 가장 큰 시상식에서 최고의 뮤직비디오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만든 모든 작업에 공개적으로 디렉티드 바이 리마윤이라는 크레딧을 남기는 감독입니다.
보통 뮤직비디오에는 기획사와 아티스트 이름만 들어가고 관례적으로 감독의 이름은 잘 넣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건방지게도 이 이름을 넣기 시작했습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제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인생에 정답이 없다고 말합니다.
많은 강연도 그렇게 끝이 나죠.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른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정답은 없지만, 자신의 선택을 정답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제 직업입니다.
감독의 역할은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린 모든 선택을 끝까지 정답으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AI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 선택의 폭은 훨씬 넓어졌고, 구현하는 방법 자체가 진화했습니다.
불가능했던 것들이 가능해졌고, 제 비전을 훨씬 빠르고 깊이 있게 구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23년, 나를 소모시키는 구조 앞에서
대다수는 아마겟돈과 헤야를 만든 2024년이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보시겠지만, 저에게 진짜 의미 있던 시간은 그 전인 2023년입니다.
그해 저는 정말 지독한 터널을 걷고 있었습니다.
10년 넘게 이 업계에서 일하면서 점점 깨닫게 된 치명적인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 구조가 저를 완전히 소모시키고 있다는 것이었죠.
창작자인데도 저에게는 저작권도, IP도 없습니다.
미친 듯이 작업을 만들어도 포트폴리오에 경력 한 줄이 추가되는 것이 전부인 삶이었습니다.
당시 클라이언트들은 감사하게도 제 기획안이나 아웃풋에 별다른 클레임을 걸지 않았습니다.
보기에는 좋은 얘기지만, 저는 오히려 이것을 위험 신호라고 느꼈습니다.
유명한 아티스트, 빅 클라이언트와 일하다 보니 그분들이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관성적인 방법으로 영상을 만들고 있구나, 하는 위기의식을 가졌던 시기였습니다.
그 시절 정말 친했던 촬영감독에게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스태프들이 너 너무 일찍 내려오는 거 아니냐고 걱정한다는, 걱정인 척 포장된 평가였습니다.
그 말은 저에게 칼처럼 날카롭게 꽂혔습니다.
그분은 아마 몰랐을 겁니다.
제가 그때 불안과 우울 때문에 이미 심리 상담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요.
그 말이 기폭제가 되어, 꾹꾹 눌러 담았던 불안과 우울이 미친 듯이 저를 잠식해 왔습니다.
결국 그날 저는 한숨도 못 자고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타인들이 재미로 가볍게 평가한 내 미래가 진짜 현실이 될 수도 있겠다.
그 두려움이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분노를 에너지로 바꾼 첫 번째 선택
그 불안과 무력감 속에서 동시에 하나의 감정이 저를 강하게 치고 왔습니다.
정말 화가 났습니다.
엄청난 분노가 치밀어 올랐죠.
내 연출력이 끝나간다고?
니들이 뭘 알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분노를 통해 제가 한 선택은 단순했습니다.
그냥 미친 듯이 작업을 해보자.
주변에서 내가 어떤 우울감과 무력감을 느끼는지 절대 알 수 없을 만큼 쏟아붓기 시작했습니다.
아티스트의 네임드나 견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회사 일일지라도 제가 진짜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작업을 받아서 했습니다.
이틀에 한 번씩 잤고, 3일 동안 40시간을 연속 촬영하고도 한숨도 못 잔 채 다른 프로젝트로 넘어갔습니다.
세어 보니 세 달, 120일 동안 하루쯤 잤던 것 같습니다.
집에 가면 울고 회사에 가면 달리는 일상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끝이 안 날 것 같은 터널 속에서 이런 질주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딱 하나였습니다.
나만이 만들 수 있는 그림을 보여주자는 것이었죠.
이것이 제 첫 번째 선택이었습니다.
분노를 에너지로 바꾸는 것.
그 선택이 제 창의성의 첫 번째 확장을 만들어 냈습니다.

아마겟돈과 헤야, 두 배의 에너지를 쏟다
그렇게 시야를 넓히다 보니 2023년이 끝나갈 무렵, 완전히 다른 콘셉트의 두 곡이 들어왔습니다.
에스파의 아마겟돈과 아이브의 헤야였습니다.
누가 봐도 무리한 일정이었죠.
다른 프로젝트도 병행하고 있어서 동시에 세 편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야 했고, 모두 엄청난 예산과 인력이 소모되는 빅 프로젝트였습니다.
게다가 콘셉트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아마겟돈은 초인, 멀티버스, 코즈믹 코어 같은 거대한 세계관을 담아야 했고, 헤야는 한국풍에 대한 트렌디한 재해석을 시도해야 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생각했습니다.
내 연출력이 끝나간다고 했지?
웃기고 있네.
그리고 두 곡을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완전히 다른 두 콘셉트에 두 배의 창의적 에너지를 쏟아부었습니다.
시간은 평소보다 3배 정도 더 썼고, 아트 팀과 하루 12시간씩 미팅을 했습니다.
헤야를 작업하다 밤을 새운 상태로 차 뒷좌석에 그대로 실려 지방으로 아마겟돈을 찍으러 갔습니다.
그 무렵 제 차량 뒷좌석에는 항상 침구 세트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완성한 두 작업이 릴리즈되었고, 결과는 제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놀라웠습니다.
아마겟돈과 헤야는 각각 국내에서 가장 큰 두 시상식에서 모두 최고의 뮤직비디오상을 받았습니다.
한 해에 서로 다른 아티스트의 뮤비로 뮤직비디오상을 받은 감독은 저를 포함해 거의 없을 겁니다.
대중은 물론 평론가들에게서도 새롭다, 감각이 다르다는 평가가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아마겟돈 직후, 다들 제가 승승장구했을 거라 생각하시겠지만 사실 저는 가장 강한 빛과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동시에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회사가 무너진 자리에서 만난 AI
터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임신을 하게 되어 신체 변화를 느꼈는데, 이 업계에는 임신을 한 디렉터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일을 못 할 줄 알았습니다.
그 와중에 동업자와 헤어지면서 회사가 와해되기 시작했고, 내부 스태프가 모두 사라지고 리전드라는 회사 자체가 사라질 상황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한 번 무너져 본 사람이기에, 위기가 올 거면 애매하게 짭짤 때리지 말고 제대로 한 방 들어가라, 그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임신한 상태로 혼자 회사에 남아 다시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만삭인 배로 콘셉트를 잡고 촬영을 하고, 퉁퉁 부은 다리로 출산 하루 전까지 편집을 했습니다.
이제 잃을 게 없으니 뭐든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평소 몰래 쓰던 AI 기술을 이번엔 대놓고 써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때까지 K팝 뮤직비디오 업계에서는 AI 사용을 드러내는 것을 굉장히 꺼렸습니다.
브랜딩해야 하는 대상이 무생물이 아니라 아티스트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출산 후 돌아와 완성한 작업이 바로 올데이 프로젝트의 데뷔곡 페이머스였습니다.
예전에는 디자인, 모델링, 텍스처, 시뮬레이션에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는데 AI 프로그램을 쓰면서 그 시간이 크게 단축됐습니다.
심지어 클라이언트를 설득할 문구까지 AI가 써주니 정신적 소모도 줄었습니다.
페이머스가 공개되자 SNS는 물론 광고계에서도 오퍼가 쏟아졌고, 해외 협업 의뢰가 하루 걸러 들어왔습니다.
페이머스를 기점으로 K팝 뮤직비디오에 AI가 대놓고 투입되기 시작했고, 제가 그 신호탄을 쐈습니다.
AI는 저에게 신진 스태프 같은 존재였습니다.
홀로 첫 작업 페이머스를 내고서야 저는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나 믿을 만하구나, 이제 정말 스스로 믿어도 되는 사람이구나.
저를 일으킨 세 번째 계기는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제 태도였습니다.



신기술과 휴머니즘, 윤승림의 시즌 2
지금 저는 터널을 지나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주변에 스스로 지금이 윤승림의 시즌 2라고 말합니다.
AI 시대를 만나면서 선택지의 영역이 예측 불허로 열릴 수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설렙니다.
그것을 제 창의성 영역의 확장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스태프들이 제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신발 밑창이 들리면서 거기서 빌딩이 솟고 뒤틀리며 자동차가 등장한다.
이 말만 들으면 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죠.
그런데 AI가 생기면서 제가 생각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가능했던 것들이 가능해졌고, 기술이 제 비전을 더 빠르고 깊이 있게, 더 대담하게 구현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도파민을 자극하는 이미지들이 쏟아질 겁니다.
이미 시작됐고,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조차 없게 되겠죠.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이 보편화되고 자극적인 이미지가 쏟아질수록 창작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명확해집니다.
바로 감정, 가치, 의미, 철학, 이야기입니다.
아마겟돈과 헤야, 전소미의 엑스트라, 비비 같은 작업은 모두 제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VFX와 AI로 만들어졌지만 그 안에는 진정성이 있습니다.
절대 기술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내 선택의 파트너로 만드는 것.
그것이 진정한 창의성의 확장이라고 봅니다.
저는 무력감과 분노가 있을 때 그것을 에너지로 바꿨고, 세간의 평가가 제 자리를 위협할 때 제 선택을 믿기로 했으며, 시스템이 저를 제약할 때 새로운 사람과 기술을 찾아 협업자로 만들었습니다.
미래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두려움보다 큰 감정이 있습니다.
설렘과 기대입니다.
저는 제 선택을 믿고, 그 선택을 구현해 줄 기술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제 작업에 믿음을 새기며 이 문장을 남깁니다.
디렉티드 바이 리마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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