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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양, 배우가 화가로 10년을 밤새운 진짜 이유 | 세바시 207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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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2. 23. | 세바시 2078회 | 박신양 (배우·화가)

 

 

허리 수술과 갑상선 질환으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1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자리에서 배우 박신양을 일으켜 세운 것은 뜻밖에도 강렬한 그리움이라는 감정이었습니다. 러시아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가 그리워 처음 붓을 든 그는 당나귀와 사과, 그리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그리움을 무언가를 찾는 힘으로 바꾼 화가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 이 강연의 순서
1. 쓰러진 몸, 그리고 찾아온 그리움
2. 그리운 친구를 그리다, 당나귀와 예술가들
3. 그리움이라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
4. 두봉 주교님과 사과 두 알
5. 초등학교 1학년, 빨간 사과와 어머니
6. 세종문화회관 전시, 감정을 따라가는 길

 

 

배우이자 화가 박신양의 세바시 강연
배우이자 화가 박신양의 세바시 강연

 

 

쓰러진 몸, 그리고 찾아온 그리움

 

저는 그동안 촬영을 참 열심히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허리를 여러 번 다쳐 수술을 받았고, 그다음에는 갑상선에 문제가 생겨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갑상선이나 호르몬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 건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고 가볍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정말 죄송한 마음이 들 만큼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몸이 일어나 주어야 하는데 일어나지 못한 채로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버렸습니다.

내일이면 괜찮아지겠지, 정신을 가다듬으면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을 오래 했지만, 몸은 좀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누워 있던 어느 날, 저는 제 안에 어떤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움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몹시 그리웠습니다.

스스로도 나에게 왜 이런 감정이 있는 걸까 궁금해질 정도로, 너무나 강렬한 그리움이 저를 휩싸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범죄의 재구성> 스틸컷 - 미소 짓는 남자의 얼굴
영화 <범죄의 재구성> 스틸컷 - 미소 짓는 남자의 얼굴

 

 

그리운 친구를 그리다, 당나귀와 예술가들

 

그 그리움의 대상은 러시아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의 얼굴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너무 그리워서, 그 얼굴을 그리려고 난생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그림을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날 몇 점을 그리고는 밤을 새웠는데, 3년이 지나고 5년, 7년, 그러다가 10년을 밤새워 그리게 되었습니다.

물감과 세척제의 독성이 강해 문을 열어두고 그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다시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리운 친구의 얼굴을 그리다가, 어느새 저를 닮은 당나귀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짐을 지고도 꾀부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우직한 예술가들, 그리고 저의 아버지 같은 이들을 떠올리며 그렸습니다.

그렇게 당나귀 같은 얼굴을 한 예술가들의 초상을 이어 그려 나갔습니다.

에곤 실레가 있었고, 피나 바우시가 있었습니다.

그림에 몰두하는 한편으로 제 감정에 집중하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함께 품고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움이라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는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메일도 전화도 있었고, 찾아가면 되는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토록 강렬한 그리움에 휩싸였을까 하는 물음이 오래 저를 붙들었습니다.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다만 그리움을 이야기하려 하면, 분명 한국말인데도 누군가와 길게 나누기가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 감정이 너무나 당연하고 분명하고 강력했기에, 저는 그리움을 제 숙제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저에게 그리움은 무언가를 찾는 힘입니다.

내가 그리워한다는 사실은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함께 불러옵니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이 바쁜 세상이 허용하는 만큼의 작은 무엇이 아니라, 굉장히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질문들을 계속 쫓아 들어갔고, 그림을 그리는 일과 제 질문과 거기서 생겨나는 감정을 하나로 연결해 보려 애썼습니다.

 

두봉 주교님과 사과 두 알

 

이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마땅치 않던 어느 날, TV에서 두봉 주교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오셔서 한국에서 오랫동안 봉사하시다가 얼마 전 돌아가신 분입니다.

저분과 이야기를 나누면 제 질문이 조금 풀릴 것 같아, 안동 작업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시던 그분을 무작정 찾아뵈었습니다.

연세가 드셔서 귀도 눈도 불편하시다기에 제가 운전을 해 드리겠다고 했고, 덕분에 오가는 차 안에서 단둘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도착해서 주교님은 감사하다며 사과 두 알을 선물로 주셨는데, 그 지역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담아 건네주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어떤 비닐봉투든 다를 게 없었던 것입니다.

얼떨결에 받아 온 그 사과가 너무나 소중했습니다.

그분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 사람의 아름다움이 사과 두 알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손도 대지 못하고 먹지도 못한 채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사과가 쭈글쭈글해지고 썩을 것 같아, 결국 사과를 들고 작업실로 가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사과를 그리면서 저는 감사를, 또 하나의 그리움과 존경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사과는 동그랗고 빨개야 한다는 선입견,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상징과 관념이 꼭 지켜져야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었고, 익숙한 생각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는 두려움과 오래 싸웠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빨간 사과와 어머니

 

사과를 그리다 보니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여러분 그리고 싶은 걸 그리세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저는, 이 세상에 이런 천사 같은 분이 계시는구나 하며 도화지에 빨간 사과를 아주 크게, 신나게 그렸습니다.

칭찬을 받을 줄 알았는데, 다가오신 선생님은 저를 심하게 혼내기 시작하셨습니다.

얼마나 크게 혼났는지 딱 두 마디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이게 그림이냐, 언제 이렇게 그리라고 했느냐.

그다음 기억은 충격이 클 때 나는 그 찡 하는 소리와 함께 지워져 버렸습니다.

하필 그날은 부모님을 초대한 공개 수업 시간이었고, 그 자리에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혼났던 두 마디와, 너무나 난감해하시던 어머니의 얼굴로 남았습니다.

예전에는 봉투에 돈을 넣어 가져다주는 문화가 있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봉투를 가져오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오랫동안 미안했습니다.

하지만 봉투를 갖다주지 않으신 것은 참 잘하신 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오랜 세월 동안 그림이 무엇인지, 예술이 무엇인지, 그림으로 다른 사람과 소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시간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큰 숙제와 생각할 거리를 주신 그 선생님께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언제 이렇게 그리라고 했니?' 사과 그림 앞에서 아이를 다그치는 교실 일러스트
'언제 이렇게 그리라고 했니?' 사과 그림 앞에서 아이를 다그치는 교실 일러스트

 

 

세종문화회관 전시, 감정을 따라가는 길

 

저는 세종문화회관에서 3월 6일부터 5월 10일까지 큰 전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친구가 그리워 시작한 그림이었기에, 이 표현이 얼마만 한 캔버스에 담겨야 하는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자유를 허용해 왔고, 그러다 보니 그림들이 아주 커졌습니다.

왜 팔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그리워서 그림에 몰두하다 보니 어떻게 팔아야 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연기든 그림이든, 표현은 누군가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속성만큼은 강력하게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표현은 보시는 분들의 마음에 작용이 일어나는 순간까지가 일차적인 완성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크고 많은 짐을 짊어지고서라도 어떻게든 이 그림들을 보여드리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봉투를 갖다주지 않으신 어머니께 감사드리고, 봉투를 드리지 못한 선생님께는 미안함을 전합니다.

그리고 제가 감정을 따라 길을 찾아왔듯이, 여러분도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며 좋은 힌트를 찾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움에서 시작된 한 배우의 그림 이야기 | 세바시 207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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