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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 세바시 88회 옛날 노래가 좋은 이유 : 쎄시봉 이야기 | 이상벽 방송인


강연 소개 : 복고가 올 한 해의 문화 키워드였습니다. 그 중심에 쎄시봉이 있습니다. 쎄시봉이란 서울 무교동에 있었던 음악감상실이었고, 이곳에서 활동하던 당시 가수들을 이르는 통칭입니다.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등이 주요한 구성원들이었는데요, 지금 방송인으로서가 아닌 쎄시봉 당시 연예부 기자로서 제가 쎄시봉의 이야기와 오늘 다시 이들이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이유를 여러분들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게시일: 2011. 12. 21.




네 여러분 반갑습니다

올 일 년은 그야말로 대중가요가

우린 어차피 텔레비젼 매체를 통해서

노래를 들을 수밖에는 없는 그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변화가 바로 가요계의 변화라고 보여지면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가장 큰 변화의 핵이었던 것이

이른바 세시봉 붐이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세시봉이 뭐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40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단어만 가지고는 도대체 정체가 불명해하는 분들이 많으신데

세시봉은 서울 무교동 주점가 한쪽 모퉁이에 있던 조그마한 음악 감상실 이름입니다

대게 대학생들이 많이 드나들었죠

그때만 해도 이렇게 음악을 들을만한 기기

전축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많이 보급이 안 됐을 시절이었기 때문에

음악을 들을려면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을려면

방송국에 신청 엽서를 낸다든지 이렇게 해서

한두 주일 정도 기다리면 겨우 얻어듣거나 그러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음악 감상실이라는 데를 가면 신청서를 DJ에게 갖다 주면

뭐 불과 20~30분 안에 듣고자 하는 노래를 틀어주고 그러니까

거기를 많이들 찾아갔습니다


저하고는 대학교 3학년 때 우리 모교 홍익 캄보밴드

홍익대학교 안에 캄보 동아리가 있었는데

전국 대학생 재즈 페스티발에 나가서 전국 대학에서 나온 동아리 한 50여 팀 가운데서

당당 최우수상을 받았는데

그때 저는 우리 학교 홍익 캄보밴드의 인솔자라고 그럴까요?

학생회 간부였으므로 그냥 인솔자로 같이 동행을 했었습니다

그래 인제 우리가 최우수상을 받았으니까 학교 교수님들한테도 칭찬을 받고

이제 교내에서 가끔씩 발표회를 하는 그런 팀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중에


세시봉 음악감상실이라는 데서 초청을 해서 연주를 한번 해달라는 거에요

그래서 그때는 우리가 외부공연을 한 번도 안해본 그야말로 아마추어 그룹이었는데

그냥 오라는 대로 나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저는 우리 팀들과 더불어 거기를 가게 됐는데

그때 여러분들 그분 이름을 기억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경악 평론가 이백천 씨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거기서 사회를 보고 있었어요

근데 저희가 간 날 그분이 자리를 비운 겁니다

방송 프로듀서였었는데 그날 제작이 좀 늦었거나 그랬겠죠?


그래 제가 그냥 인솔 책임진 사람으로

그때 ROTC(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 를 하고 있을 때니까

학군단 마크를 붙인 유니폼을 입은 채로 올라갔어요

올라가서 우리 캄보밴드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라든가

연습을 어떻게 했고 레파토리를 어떻게 선정을 해서

이번에 최우수상을 받게 됐고

이런 얘기를 한 한 시간 가량하면서 요즘 7080 진행하듯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 한참 뒤에 이백천 씨가 드디어 나타났어요

우리 공연이 다 끝났는데 저한테 즉석에서 제안을 한 것이

여기 대학생들이 많이 오니까

대학생의 밤이라는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어줄 테니

그걸 한번 진행을 해보지 않겠느냐

그래서 뭐 하는 건 좋은데 저한테 조건이 뭡니까? 그랬더니

'미술대학 댕기니까 물감을 사주겠다'

근데 저는 그때 국산 물감이 12색밖에 없을 때인데

일제 물감이 서른 네 가지 짜리가 있었어요

그걸 한 번 써보는 게 정말 소원이었거든요

그걸 사주겠다는 겁니다

즉석에서 '오케이'


그리곤 일주일에 한번씩 대학생의 밤의 진행자로

무교동 세시봉을 드나들기 시작을 한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인데 비가 좀 구정 구정 오는 날

그 당대의 탑 싱어인 차중락 씨가 출연이 예약이 되어 있었는데

요즘은 뭐 가수들이 모두 삐까번쩍 하는 승용차들 타고 댕기지만

그때는 버스 타고 댕길 때거든요 비가 오고 이러니까

이 양반이 어디 공연을 갔다가 대중교통 수단을 통해서 올래니까

자꾸 이렇게 늦어지는 거예요 한 30분 정도 늦어지니깐

진행을 맡고 있는 제가 당황하기 시작을 하는 겁니다

그 무대에 뻘쭘하게 서서 이런 얘기도 해보고 저런 얘기도 해보고

나중에 바닥이 날쯤 돼서 '누구 노래부를 수 있는 사람 한 사람 나와라'

무대 위에는 KBS 관현악단 단장하시던

김광섭 선생이 피아노 앞에 이렇게 준비를 하고 있고

나오라고 나오라고 하는데 아무도 안 나와요

40년 전이니까 숫기가 없잖아요 학생들이 다들 이렇게 앉아 있는데

저쪽 한쪽 구석에 어떤 사람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데

옆에 있는 친구들이 '나가 이 시키야~ 나가'

그게 저한테 포착이 되었어요 그래서 나오라고 나오면은

무조건 이 세시봉 무료입장권을 10장을 내가 책임지고 주겠다고

그랬더니 꺼부정해가지고 올라오는데

비 오던 날이니까 장화를 이만한 걸 신고 이 우비를 입었는데 나일론 우비에요

돌돌 말면 한 주먹 안에 들어가는 싸구려 우비를 입고

그때는 장발, 히피 이럴 때니까 머리는 산발이 되가지고 이러고 일어나 나오는데

속으로 '아 괜히 시켰어 저 인간이 나와서 무슨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걱정 걱정을 했어요

딱- 올라와서 피아노 앞에 딱- 앉드니

"Don't worry~about me~"

그자가 오늘날 조영남입니다

조영남은 그날 세시봉을 통해서 데뷔를 한 거에요

첫날 앵콜을 받았을 만큼 아주 가창력이 출중했습니다

그때 대학교 3학년 다니다가 중도에 학업을 중단하고 있던 그때였으니까

대단히 어려울 때죠


그렇게 가수들이 예약된 가수들이 펑크를 내니까 대비가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우리 학교 교정에서 점심때만 되면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던 놈이 하나 있었어요

누구한테 물어보니까 학교 앞에서 하숙하는 애래요 우리 학교 애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가서 너 우리 세시봉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어떠냐

그랬더니 거기가 어디냐고 하고 얘는 뭐 그 근처도 안가 봤나 봐요

'내가 너한테 뭘 어떻게 해주면 네가 거기를 갈래?' 그랬더니

삼시 세끼 밥만 해결해주면 가겠다는 거에요

그게 오늘날 송창식입니다

그리 거기 가서 형주를 만나고 세환이를 만나고 이장희가 나타나고 히피가수 한대수가 나타나고

정훈희가 안개로 거기서 데뷰를 하고

불과 한 7~8개월 사이에 동시다발적으로

후일 이 나라 청년문화의 기수로 불리는 사람들이 거기서 다 탄생이 된

말하자면 한 시절 포크송의 요람이 된 데가 바로 세시봉입니다

근데 이게 40여년 전 얘기인데


2011년에 들어서 이 사람들이 갑자기 각광을 받게 된

그 이유에 대해서 여러분 궁금하실 거에요

처음 단초는 이장희였습니다

이장희가 미국에서 '라디오 코리아'라는 방송매체를 운영을 하다가 그거를 접고

이제부턴 서울 들어가서 쓰는 재미로 살겠다

그 친구 원래 성격적으로 호방해요

근데 들어와서 우리가 11명 멤버를

이렇게 늘 같이 어울리고 술 마시고 이러는 11명 멤버가 있는데

이 사람들을 자기가 극진히 극진히 한 한 달에 한 번씩 저녁을 사겠다 그거예요

쓰는 재미로 서울 온다 그랬으니까

그러자 그게 좀 몸 불편한 우리 소설 쓰시는 최인호 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김민기

사진 찍는 김중만이, 이두식 홍대 교수, 전유성이, 이상벽이, 기타 치는 강근식이,

이장희 이렇게 하면 거의 11명이 되죠?

이 친구들을 데려다 아주 근사한 호텔 음식점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쏘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되니까 거기서 제일 가장 좌장이라고 할 수 있는 조영남 씨가

심리적으로 부담을 갖기 시작하는 거예요

'야 우리가 너무 일방적으로 얻어먹는 거 아니냐'

김민기가 어느 날 회갑 날이 됐어요

'민기 회갑날을 기념하는 의미하는 뜻에서 내가 저녁을 사겠다'

그래갖고 조영남 씨가 그 날 냈어요

거기서 저녁을 먹다가 조영남 씨가 라디오 프로그램의 DJ를 하잖아요?

'야 거기 나가서 우리가 옛날 얘기를 하면서 옛날 노래를 한번 같이 해보는 특집을 만드는 게 어떻겠느냐'

그냥 즉석에서 제안이 된거고 거기있는 대부분이 뭐 나쁠 거 없다고

그렇게 출연을 했어요

이게 시청자들 사이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겁니다

거기서부터 사건이 시작이 된 거예요

그걸 녹음을 해서 재방송을 냈을 정도고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붐업이 된 게 계기가 돼서 '놀러와'라는 프로그램에 나갔고

'놀러와'라는 프로그램에 나가서

그 전에 불렀던 '하얀 손수건'이나 '좋은걸 어떡해' 이런 거 저런 거 부르고

그 당시 40년 전에 불렀던 그 노래를 불렀는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특히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겁니다

우리도 깜짝 놀랐어요 학생들한테 물어봤습니다

저 나이 든 할배들 노래가 니들한테 어떤 대목에서 공감이 됐느냐 이랬더니

'노래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무슨 얘기냐면 가수는 입으로 노래를 해야 되는데

대게 요샌 히프(hip)로 노래를 하니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무슨 뜻인지

40만 되도 잘 모르겠다고 하는 노래가 한 10년 동안 지속이 됐어요

가수는 가순데 텔레비전에 나와서

무슨 예능 프로그램인지 이런데 나와서 떠들기만 하고 들어가지

걔가 노래를 하는 걸 못 본지가 한 10년 된

이상한 그런 텔레비젼의 시대가 지속이 되다가 어느 날 나와서 노래를 부르니까

그게 가슴에 와닿은 것이다

그러니까 과거에는 텔레비젼 앞에 아이들만 앉아 있었는데

우리 세시봉이 나오고부터는 어머니, 아버지 아이들이 같이 모이기 시작을 했고

요샌 서바이벌 프로그램 많이 하잖아요? 가수들

가수는 요즘 가수들인데 노래는 예전 히트곡을 부르는

그런 새로운 조류를 만드는 단초가 됐다

요즘은 정말 모든 가족들이 다 텔레비젼 앞에 이렇게 앉아서

같이 가요 프로그램들을 보고 듣고 이렇게가 됐습니다


저희가 붐이 일기 시작을 한 2월부터

지난... 그러니까 5,6,7,8,9,10 10월까지 국내 약 50개 도시를 돌고

미국 샌프란시스코 산호세하고 LA

서부에서는 제일 좌석이 많다고 하는 LA 슈라인 오디토리엄(Shrine Auditorium)에서 2회 공연을 했어요

6,200명씩 2회 공연이니까 만 명 이상이 다녀간 것 아닙니까?

거기도 불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처음에는 미주 지역 어디 방송사에서 우리 공연을 주관을 했는데

본사를 막 원망을 했어요 이 어려운 시기에 하루도 아니고 이틀을

그 6,200명 석을 무슨 수로 채우라는 거냐 막 원망을 했어요

바로 전날 산호세에서 거기는 한 3,000명 정도 되는 데였으므로 쉽게 채워졌어요

우리도 사실 걱정 했습니다 LA가 이틀 동안 Full(가득)로 채워질 보장이 없잖아요

아~ 꽉 채워졌어요

제가 옛날에 '주부가요 열창'이라는 프로그램을 녹화하러 거길 갔었고

나훈아 미주공연 때 거기를 한 번 섰었고 그럼 세번째 섰는데

정말 표 사서 그 무대 사회자로 서보면 오신 분들의 눈동자를 보면

정말 듣고 싶어서 온건지 누가 표를 주길래 그냥 받아서 온건지 이게 다 표시가 나요

박수 소리 자체가 틀려요

딱 올라갔는데 쫘악- 올라오는데

어우 소름 끼치더라고요



어쨌든 우리가 그럽니다 어딜 가면 요새 뭐

'고목나무에 꽃이 폈습디다'

그래요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이제 우리 나름 추억으로 간직할 뿐이다는 생각을 할 즈음에

이게 되살아 난 것이 너무 다행스럽고요

아까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노래가 진정성이 좀 바래가던 중에

우리가 새롭게 노래에 대한 정체성을 되살리는 데 역할을 했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래도 한 시절 청년 문화 시대를 이끌었던 사람들 나름으로

그래도 의무를 다한 게 아닌가 하는 그런 뿌듯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 곧 하반기 공연을 시작을 할 예정입니다

요샌 윤형주 씨가 또 사업으로 굉장히 바삐 지내는 그런 상황이래서

우리 세시봉 친구 가운데 또 다른 친구들을 투입을 시켜서

'세시봉 친구들 두 번째 이야기'라는 공연 타이틀을 걸고

다시 전국을 순회를 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정훈희하고 한대수가 참여를 하게 됩니다

그때 처음에 세시봉이 나타났을 때의 정황에 관해서도 기억을 되살리는 재미있는 이야기들

거기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행시 짓기, 식인종 시리즈

그런 것들이 거기서 다 만들어진 거고요

저는 정말 거기 우연히 붙들려 갔다가 6개월 만에

CBS 라디오에 스카웃이 되는 행운을 얻게 됩니다

그때 프로그램이 '명랑 백일장'이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우리 CBS를 대표하는 라디오에서는 가장 인기가 있는 프로그램으로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앞으로 세시봉 공연 오셔서 같이 추억을 얘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면 참 좋을 듯 싶습니다

이제 세시봉에 관해서 어지간히 궁금증이 풀리셨을 거에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고, 그렇게 해서 만났고 그렇게 해서 붐이 이루어졌고

의미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런 배경을 안고

2011년 우리 가요계에 세시봉이 아이콘으로 등장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청각을 잃은 제 친구를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전체 또는 일부가 잘못듣고 잘못 옮겨적은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해당글에 댓글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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