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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얼굴이름이 있다 | 허노중 국립서울농학교 교사 | 세바시 380회


강연 소개 : 학생들은 저를 '기린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기린은 제 별명이 아니라 '얼굴이름'입니다. 소리로 부르지 못하고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아이들은 상대의 특징적인 것을 하나 찾아서 얼굴이름을 붙입니다. 아마 청각장애 학생들과 함께 한 적이 없는 일반학교 선생님들도 얼굴이름이라는 것이 무척 낯설 것입니다. 청각장애학생들이 있는 농학교의 학교 담장은 높지 않지만 많은 분들은 아직 그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탓에 우리의 학교 현장은 여전히 금단(?)의 공간으로 남아있습니다. 27년간 청각장애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느꼈던.. 또 기뻐하고 아파했던 우리의 학교 이야기, 교육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그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게시일: 2014. 1. 21.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이와 난, 우린 함께 울고 웃었다...

아이는 눈과 손을 놀리고 

난 입과 귀를 놀린다

아이들의 손은 허공에서 말이 되고 

나의 입은 귓속에서 말이 된다

아이는 입을 움직이지 않고 말을 하고 

난 손을 움직이지 않고 말을 한다

얼마 전 우린 함께 

울고 웃었다 

손으로 말을 하는 아이는 

자막을 읽으며 울고 웃었고

귀로 소리를 듣는 나는 

귀로 소리를 들으며 울고 웃었다

아이와 나는 같은 영화를 보았다

자막처리가 된 영화를 보며 

아이와 난 함께 울고 웃었다

아이와 나는 다르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얼굴 이름이 있답니다 

소리로 불러도 부르지 못하고 

소리를 잘 듣지도 못하는 

이름을 부르거나 또는 

지화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쉽고 간편하게 수화로 한 번에 나타내는 

그런 얼굴이름들이 있답니다


그런 얼굴이름들을 가진 

청각장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생활하며 느끼고 아파하고 기뻐했던 

교육 현장 이야기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 여기 화면에 소개한 글은 

예전에 장애인 영화제에 아이들과 함께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한국영화는 자막이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한테는 자막이 없는 한국영화는 

그림의 떡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지금 들려드리겠습니다 

함께 보기도 하고 수화로 


제 소개를 먼저 하겠습니다

저는 국립 서울농학교에서 중고등부 

과학을 맡고 있는 기린 선생님입니다 

저의 얼굴이름은 기린입니다 

여러분 같이 해 보실래요? 기린 

이거 선물 주셔야 해요 

기린 

근데 이렇게 하면 뭘까요? 

이렇게 하면? 아시는 분? 

여우이지요 역시 제자들입니다

여우입니다 제자들 몇 명 왔거든요 

기린은 목이 깁니다

다리가 네 개 있습니다 아시겠죠? 

그런데 제가 만일 여자 선생님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저는 아마 황새가 아니었을까 

수화 없을 겁니다 황새 제가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이렇게 수화는 쉽습니다 



팔이 아파서 집에 가서 일찍 잠들었어요 

선생님은 말을 하면 아프지 않나요? 


아이는 많은 말을 하고 싶은데 

팔이 아프네요

입으로 말을 하는 나는 

끊임없이 떠들어도 아프지 않은데 

그 아이의 귀는 언제쯤 열릴까요? 

아마 그 아이의 귀가 열린다면 입도 열리겠죠 


네 그렇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손으로 팔로 얼굴로 이야기 하다 보니 

청인 보다 두배 세배 

더 힘들고 어렵답니다

여러분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저기 계신 수화로 얘기하는 것을 

우리 아이들 아닌 청인들이 봤을 때 

쉽게 읽을 수 있습니까? 볼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수화가 뭔지도 모르겠고 눈도 아프시죠? 


그러나 저는 우리 아이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비록 잘 들을 수는 없지만 

잘 들을 수 없는 귀를 주셨지만 

그러나 눈으로 보고 손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귀한 것을 주셨다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하자고 감사하게 살아가자고 

그렇게 아이들에게 얘기합니다


몇해 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장애인 특례입학을 하기 위해서 

장애인을 모집하는 홍보물이 있었어요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했어요 

장애인이면 지원이 된다고 해서 전화를 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가 소리를 들을 수 있냐고 물어보더군요 저에게

청각장애 아이라고 얘기를 했는데도 소리를 들을 수 있냐고 물어봤어요

여러분 제가 얼마나 실망을 했겠습니까? 

전화를 확 끊어버렸습니다

어떻게 장애인을 모집하는 대학에서 학과에서조차 

청각장애를 지닌 이유만으로

소리를 들을 수 있냐고 반문하는 

대학 진학 담당자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있는 겁니다 


작년 겨울 어느 졸업생 아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취업 중인 아이가 대학 진학을 하기 위해서 

자동차를 컴퓨터로 디자인하는 학과를 가고 싶다고 해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걸 소개해 달라고 

제가 무슨 말을 했을까요? 

자리 없다고 그런 대학 없다고요 

우리 아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학을 

자기가 원하는 학과로 

단지 청력이 약하고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고 

면접 시험에 또는 대학 수업에 있어서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배려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소통력이 필요합니다 지금처럼 

자막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 주는 대학은 몇몇 특정 대학입니다 

몇몇 특정 학과입니다

그러다보면 결국은 

우리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는 

몇몇 특정 학과 몇몇 특정 대학 아니고는 

우리 아이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이게 우리 청각장애 아이들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혹시 1981년이 세계 UN이 정한 무슨 해인지 아십니까? 아시는 분? 




세계 장애자의 해였습니다 장애인이 아닙니다


그럼 1988년은 뭘까요?

세계장애자 올림픽 장애인 올림픽 아니었습니다


그 해에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보도블럭이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시작이 그 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입니다 이제 25년이 흘렀습니다




아마 2005년으로 기억이 됩니다 

여러분 이 사진 보시면 아시겠죠? 누구세요? 



제 제자입니다 자랑스러운 제자입니다 임수정 

밑에는 신민아입니다


영화에 나왔는데 

수화지도를 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임수정 씨는 신민아의 언니인데 신민아가 농인이에요

임수정 씨는 수화통역사 겸 청인으로 나왔어요 


거기 우리 아이들을 데려 간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아이들입니다



그 분이 임수정 씨가 처음에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나와 많이 다를 줄 알았는데 우리 애들은 참 맑고 곱다'

여러분 맑고 곱지 않습니까?

여느 일반학교 아이들보다 더 맑고 

더 예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은 아줌마 되셨어요 그렇습니다 

결혼식한다고 초대도 안 하더니만 돌잔치는 초대하더군요

요즘 이 때가 아이들이 고2 때 였습니다 

고2 아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맑아요? 

우리 아이들도 졸업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학도 가고 싶고 월급도 많이 받고 싶다고

제가 교육현장에 있은지 올해로 27년째입니다  

그러나 교사 월급보다 더 많이 받는 제자를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 아이들은 취업할 수 있는 곳이 

조립이나 세탁 등의 단순 노동에만 종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주 특출하게 여기 나온 친구들처럼 자기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는 친구도 있죠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답니다


얼마 전에 제 제자가 문자를 보냈어요 

저희는 주로 문자로 주고 받습니다. 카톡 뭐 이런 거로

'선생님 저 회사에서 잘렸어요' 

해고당했다고 문자로 받았대요 만나고 싶다 문자가 왔어요 

그래서 힘내렴 농아인 협회에 가 봐라 

가서 구인구직을 해줄 거다

그런데 벌써 갔다왔대요 일자리 없대요 

제가 뭐라 그러겠습니까? 할 말이 없어요 

지금 취업 자리도 적은데다가 

인원감축 바람이 불면 우리 애들부터 먼저 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이 겨울에도 

구인구직 광고를 보고 차가운 길거리를 헤매고 있답니다


임수정 님이 이렇게 신문 인터뷰를 했더군요

'수화를 배우니 농인 아이들과 같이 대화를 나눠보니 

참 소리 없는 수다쟁이들이라고'

여러분 아시나요? 청각장애 현장에서 

얼마나 소리 없는 수다인지 아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단어 하나하나에 표정이 변하고 얼굴이 변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울고 웃고 짜증내고 고통스러워하고 기뻐할 줄 알고 박수칠 줄 알고 

화관무도 하고 난타도 하고 그림도 그리는 아이들입니다 

여느 아이들과 똑같습니다

다만 청력이 약해서 잘 듣지 못하고 

그러기에 더 많은 호기심을 지니는데 


우리 아이들을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아이들한테 성질이 무척 급하다고 합니다

여러분 혹시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전화한 적 있나요? 잘 못 들으시죠? 

그럼 어떻게 합니까? 

'얘야 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본인이 짜증내는 얼굴 나타내지 않습니까? 여러분 듣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우리 아이들은 못 듣겠지요 


TV 화면에서 무엇이 나타나는지 

내 이웃은 옆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혹 나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건 아닌지 

우리 아이들은 답답해합니다 무척 답답해합니다


특히 전철이나 버스에서 우리 아이들이 

수화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무슨 일인 양 

뚫어지게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아줌마들, 아시죠? 


그렇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에게 

'왜 뚫어지게 바라보냐고 우리가 뭐냐고'

그렇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이 바뀌기를 바랍니다 


우리 아이들은 졸업한 뒤에도 선생님을 찾아옵니다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결혼식 주례 다섯 번 했습니다 벌써 이 나이에 아이 돌잔치라고도 연락이 오고

또 어느 날은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도 하고 

절차 몰라요 

불러요 

새벽이라도 문자 보내요

새벽 1시에 문자 받습니다 5시에 가보면 애들 모여 있어요 

그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기다리고 있어요 


어느 일반학교 아이들이 졸업한 뒤에 선생님을 찾아오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에게는 학교가 바로 천국입니다 

이 사회는 그렇지 못함이 실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여러분 저한테 주어진 시간이 재깍재깍 지나고 있어요 

27년간 우리 아이들과 살아온 이야기를 

다 하려니까 너무 시간이 촉박합니다 

끝으로 다음 이야기를 함께 보며 이 시간을 마칠까 합니다



아이야

소리를 잃은 아이야


아이야

울지 말아라


소리쳐 부르는 어미의 소리 

들리지 않는다 


울지 말아라 


목 터지게 부르짖는 어미 눈가엔 

말 못하는 너가 태반처럼 엉켜 있단다


세상의 너른 벌판에서 

못 듣는 너를 낳은 네 어민 


터진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단다


울지 말아라 


아이야 소리를 잃은 아이야 

너를 부르는 찢어진 어미의 가슴은 


소리조차 잃은 벌판 

어미 소리샘엔 恨만 채곡채곡 


세월을 비워가고 있을 뿐이란다


여러분 이 글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를 둔 

어머님의 마음을 담은 글입니다

여러분 우리 아이들 잘 자라고 있습니다 

맑고 곱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 사회에 나가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여

이 사회를 구성하는 작은 톱니바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봅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 세상의 빛이 되는 그런 날이 어서 오길 두 손 모으며

여러분 거듭 이 아이들을 고운 눈으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이 시간을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END


이 글은 청각을 잃은 제 친구를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전체 또는 일부가 잘못 듣고 잘못 옮겨 적은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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