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을 때 헤쳐나가는 방법 | 김동현 수원지방법원 판사, '뭐든 해 봐요' 저자 | #동기부여 #도전 #극복 | 세바시 1503회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사고를 겪게 된다면 어떨까요?
간단한 시술을 받았는데 한 10분도 되지 않는 사이에 제 눈은 영원히 빛을 잃었습니다.
제 인생이 그날 끝난 것 같았죠.
지금을 좌절과 포기 흔한 시대라고들 하죠.
저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멈춰 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을 겁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일단 도전해 보고, 노력해 보고, 안 되면 그다음에 포기해도 늦지 않습니다.
이런 얘기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럴 때가 있죠. 저도 그런 시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좌절하고 싶을 때, 무엇을 기억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갑자기 큰 불행이 닥친다면 어떨까요?
자기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사고를 겪게 된다면 어떨까요?
10년 전 저는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IT 전문 변호사가 되려고 로스쿨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간단한 시술을 받았는데, 그 사건이 제 인생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한 10분도 되지 않는 사이에 제 눈은 영원히 빛을 잃었습니다.
제게 남은 건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었죠.
여러분이라면 어떠셨을까요?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키블러 로스는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처음에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큰 사고를 당한 사람들도 비슷한 단계를 거칩니다.
순서는 약간 달라질 수도 있는데 저도 조금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부정이었습니다.
저는 수술대 위에서 제 눈이 잘못된 걸 알아차렸습니다.
눈이 누르는 듯 아프면서 앞이 보이지 않았죠.
처음에는 의사가 제 눈을 누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그날 제대로 먹은 게 없어서 앞이 캄캄해진 줄 알았습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죠.
그날 수많은 검사를 거쳤습니다.
의사가 저한테 얘기를 했습니다.
'시신경이 손상됐고 더 이상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
그 말이 마치 사형 선고처럼 들렸습니다.
의학적으로는 더 이상 부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 인생이 그날 끝난 것 같았죠.
다음으로 분노가 찾아왔습니다.
병실로 돌아와서 뜬눈으로 밤을 지샜습니다.
그런 사고를 낸 의사와 그 선택을 한 저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밥도 맛이 없었어요. 굉장히 울분에 차올랐죠.
그다음 단계에 있는 타협은 없었고, 저한테는 바로 우울이 찾아왔습니다.
하루 종일 병원 침대에 누워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딱히 할 일도 없었고, 고통 때문에 참기가 어려웠습니다.
스테로이드와 마약성 진통제를 달고 살았습니다.
밥이 넘어가지 않았죠.
살이 쭉쭉 빠졌습니다.
그러니까 의료진이 저한테 영양제를 꽂았습니다.
그 효과가 되게 확실해서 갑자기 이제 또 살이 찌고, 몸이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영양제를 거부했죠.
그렇게 비몽사몽하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빨리 회복해서 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 뭐 잘했다고 저기 누워가지고 밥도 안 먹고 영양제도 안 먹겠단다 '
한탄하는 어머니 목소리였습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냥 눈을 감았는데 한 줄기 눈물이 옆으로 흘러내렸습니다.
한참 자는 척을 하다가 다시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영양제를 다시 꽂아달라고 했고요.
죽고 싶은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시련을 바라보는 관점을 조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저한테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스쿨 2년 더 다니면 변호사가 될 수 있었고, 이 길을 걸어간 선배님들이 있었습니다.
방법이 없는 게 아니었죠.
저는 제가 처한 현실을 내가 처한 현실을 들여다보고 제가 할 수 있는 걸 해나가기로 했습니다.
희망을 붙잡기 위해서 용기를 내보기로 한 거죠.
물론 이렇게 생각했다고 해서 바로 마음이 잘 잡히는 건 아니에요.
불안과 희망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때 어머니께서 저한테 '절에서 3천 배 기도를 해 보는 게 어떠냐?'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죠.
공양미 300석에 신봉사가 눈을 떴듯이 저도 그렇게 눈을 뜨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굉장히 큰 착오가 있었습니다.
저는 한 달에 3천 배를 생각했는데, 사실은 하루에 3천 배 한 달에 9만 배였던 거죠.
근데 이미 짐 싸가지고 저래 왔는데, 자존심에 물을 수도 없고 그냥 하기로 했습니다.
수도 없이 쉬어가면서 첫날 3천 배를 마쳤습니다.
갑자기 가슴에서 뜨거운 게 울컥하고 올라오는 거예요.
그 짐승처럼 소리 내서 울었죠.
이러면서 그동안 응어리진 마음 속 감정들이 막 소용 들어 있었습니다.
그날 사고 이후에 처음 울었던 것 같습니다.
한참 울고 나니까 마음이 굉장히 편해졌습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냈습니다.
기도를 마치던 날 선생님께서 저한테 얘기를 하셨습니다.
육신에 눈은 뜨지 못했지만, 이제 마음의 눈을 뜬 거야.
제가 원래 바라던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또 다른 기적이 이루어진 거죠.
저는 그렇게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저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제가 시각 장애인이 된 것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운 힘은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에 도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도전들은 되게 처음에는 미미했습니다.
처음에 제가 시력을 잃고 밥도 누가 떠먹여주고, 씻겨주고, 다리는 멀쩡한데 휠체어 타고 다녔습니다.
애기랑 다름없는 거죠.
씻겨서 밥 먹이고 유모차 태워서 밖에 나가는 거죠.
되게 답답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먼저 젓가락을 들었습니다.
밥 먹는 게 제일 빨리 늡니다.
그리고 화장실을 찾았고 혼자 씻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손을 잡고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해보니까 별거 아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재활 훈련을 시작하면서 저는 보행 훈련을 받았습니다.
흰 지팡이 하나 달랑 들고 이렇게 길을 찾는다는 게 쉬울 리가 없죠. 처음에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등에서 식은땀이 났죠. 길에 떨어지면 어떨지,
소리를 듣고 길을 따라 걷는 연습을 했습니다.
횡단보도를 걷는 연습도 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도 타봤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번화가에도 나가 봤습니다.
날마다 미션을 끝내고 집에 가는 길이면, 그동안에 제가 가진 두려움은 하나씩 성취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실 이게 뭐 대단한 일은 아니죠. 옛날에 제가 다 했던 일인데.
근데 그걸 다시 할 수 있게 된다는 게 저한테는 굉장한 성취감을 느끼겠습니다.
일상생활 훈련도 받았습니다.
바느질도 해보고 사과도 깎아봤죠.
안 될 것 같지만, 다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요리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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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처럼 잘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소소한 것들을 성공하게 되면서 저한테는 점점 자신감이 쌓였습니다.
도전하는 게 더 이상 두렵지 않았죠.
무엇보다 제가 다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행복했습니다.
이런 소소한 도전에서 오는 성취감이 공부에 있어서도 저를 성공하게 했습니다.
복학 간 첫 학기에 저는 최우등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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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이 뭘 잘할 거라고 생각을 안 하죠. 제 자신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경쟁의 무게를 조금 내려놓고 제가 할 수 있는 거에 집중한 결과 조금 나은 결과를 받아 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로스쿨을 졸업하고 재판연구원과 변호사를 거쳐서 지금은 수원지방법원에서 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눈 감고 판사가 된 거죠.
이렇게 한 번 맛본 성취감은 저를 다른 도전으로도 이끌고 있습니다.
저는 마라톤을 시작했습니다.
같이 남산에서 산책하던 형님이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걷기만 하면 심심하니까 뛰어보자
눈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뛰냐고 물어보니까 팔에 줄을 묶고 가이드 러너랑 같이 달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끈을 받아 들고 운동장으로 친구랑 같이 나갔습니다.
저는 제가 제 다리로 뛴다는 게 그렇게 좋은 줄 몰랐습니다.
바람을 맞으면서 달리는 기분이 엄청 상쾌했습니다.
그리고 고동치는 심장이 제가 살아 있다는 걸 다시 느끼게 해줬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은 것 같았죠.
그렇게 저는 지금 8년 넘게 마라톤을 하고 있습니다.
네 잘 뛰냐고 하면, 그건 절대 아니고요.
그냥 같이 뛰는 시간이 즐겁고 제 기록을 깨기 위해서 조금씩 노력하는 그 과정이 즐겁습니다.
앞서건 뒤처지건 제 페이스대로 그냥 띕니다.
마라톤 말고도 제가 하는 운동이 있습니다. 쇼 다운이라고 하는데요.
두 명이 테이블 양쪽에 서서 소리 나는 공을 배트로 쳐가지고 상대편 골에 넣는 경기입니다.
혹시 오락실에서 그 에어 하키 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네 그거랑 비슷합니다.
그런데 눈을 가리고 소리 나는 걸 듣고 위치를 파악해서 공을 치는데 굉장히 템포가 빠르고 박진감이 넘칩니다.
쇼다운은 최후의 승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그 의미처럼 테이블 앞에 서면 아드레날린이 뿜뿜 합니다.
공정하게 경쟁해서 승리를 쟁취했을 때 그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2019년에 국가대표로 이탈리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에 나갔습니다. 세계의 벽은 높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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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제가 버킹리스트로 삼고 있는 전국 장애인 체전 금메달을 따고 싶고 내년에는 영국에서 열리는 세계 시각장애인 경기대회에도 나가고 싶습니다.
대회 나갈 생각 하니까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 합니다.
최근에 도전은 책을 쓴 거였습니다. 뭐든 해 봐요 라는 에세이 책을 냈습니다.
제가 책을 낸다고 하니까 저희 어머니가 이렇게 얘기를 하셨습니다.
일기장도 못 채우던 애가 책을 쓴다고? 그래서 그러면서 비시고 쓰시는 거예요.
그래도 일하는 와중에 책을 한 권 다 썼습니다.
일주일에 짧은 글 하나 둘 그 정도만 써도 이게 모여서 책이 됩니다.
이제는 제가 어디 가서 어떤 작가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됐습니다.
제가 이렇게 도전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거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제가 지금 얘기만 들어보면 굉장히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그런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사실 저는 매일 도전 이러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맨날 누워서 뒹굴거리고 싶죠.
제 여자친구는 김대현이 찐 게임을 배인 걸 자기만 알고 있다면서 굉장히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데요.
근데 우연한 계기로 이런저런 것들을 접하게 되고 재미를 느끼면서 열심히 하게 됩니다.
도전해 보라고 제 등 떠밀고 옆구리 찌르는 분들이 생겨서 뭔가 시도해 볼 수가 있습니다.
지치는 순간에는 응원과 격려의 박수 덕에 다시 힘을 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걸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뭐든 해보면 경험치가 쌓이고 인생이 풍부해집니다.
제가 판사이자 마라토너, 쇼다운 선수, 작가인 것처럼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거, 원하는 거, 좋아하는 걸 위해서 사는 어딘가 불편하지만 따지고 보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런 한 인간일 뿐입니다.
지금을 좌절과 폭이 흔한 시대라고들 하죠
저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멈춰 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을 겁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일단 도전해 보고, 노력해 보고, 안 되면 그다음에 포기해도 늦지 않습니다.
이런 얘기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대단한 도전일 필요는 없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괜찮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저도 처음부터 잘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쇼다운 할 때 처음에는 한 골만 넣자, 그다음에는 한 세트만 따보자, 오늘은 이겨보자
이런 미션을 수행하고, 성취감을 느끼는 하루하루가 쌓여서 제가 국가대표가 된 것이죠.
저와 함께 뭐든 시작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리고 주변에 뭔가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